[티요의 일기 - 1]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아니, 약간 그렇긴 했는데 이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마 중 2때 부모님과 생이별하고 머나먼 행성 아제로스로 피난왔을 때부터인 것 같다.
나는 성격이 소심하고 말을 잘 못한다. 말을 재미있고 화려하게 하지 못하는, 그냥 평범한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어눌하고 살짝 더듬기까지 한다. 처음 보는 사람과는 인사말 나눈 후 입이 붙어버린다. 특히나 여자 앞에선 더하다. 여자들은 말 잘하는 남자를 좋아한다던데, 이러면 평생 여친이 안 생길 것 같다. 그럴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런 습관 고쳐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었다.
내 나이 스물 셋. 당시 막 군대 전역해서 엘레멘티움광석도 떡볶이처럼 씹어 먹을 때였다. 온 세상이 내 발아래 있었고, 이런 패기라면 지긋지긋한 말더듬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난 교회 누나였던 화이트메인에게 푹 빠져 있었고, 이 누나는 재미없는 내 이야기도 웃으면서 잘 들어주었다. 설마 누나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힘들게 용기를 내어 신청한 데이트를 누나는 오케이 해줬고, 그렇게 마련된 첫 데이트에서 내 습관을 고침과 동시에 누나에게 고백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날따라 왜 이리 더 긴장되는지, 인사 몇 마디 나누고 머릿속은 혼돈의 카오스가 되어버렸다. 억지로 말을 더 이어보려고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를 꺼내봤는데 내 말이 말인지 발인지, 어지간한 이야기도 다 들어주시던 누나의 얼굴엔 지루함과 억지스러움이 가득한 게,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발냄새를 맡고 있는 듯했다. 당황한 나는 타 부대 아저씨들과 축구했던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나는 갑자기 급한 약속이 있다며 나가버렸다.
어장이라구? 너따위를 내가 관리할 줄 알아?
이후로 나는 더욱 위축되어 말수도 훨씬 줄어버렸고, 약간의 대인기피증까지 생겼다. 특히 여자는 저 멀리서 걸어오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그래서 몇 없는 친구들, 사회 동료들과의 모임도 가능한 한 피해 다녔고, 어쩔 수 없이 참석한 자리에서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러한 내가 만만한 건지 그들은 날보고 더듬이더듬이 하며 놀려댔다. 행여 내가 말이라도 하려 하면 중간에 싹둑 자르고 지들 이야기만 해댔다.
나는 말을 못할 뿐이지 그렇다고 생각까지 없는 건 아니다. 비록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지만, 머릿속으론 수 없이 대답하고 생각하고 질문한다. 그리고 이렇게 일기장에 적는다. 헤맬까봐 즉석에서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생각들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채로 걸러져서, 스스로 만족할 때에야 비로소 글자로 추출된다.
뜬금없이 이런 글을 쓰는 이유가 뭐냐고?
조금 쑥스럽지만 어느 특별한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이렇게 소심하고 말도 못하고 남들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내가 그사람을 만나고부터 변하기 시작했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난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데 이게 다 그분 덕이기 때문이다.
그분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고백 차이고, 직장생활 치인 후, 혼자 놀기 좋은 성기사 수련을 하며 용병 임무를 수행하던 중에 만났을 것이다. 그는 유독 말이 많았고, 그의 허풍인지 진담인지 구분 안 가는 경험담을 듣노라면 이렇게 잘나고 위대한 녀석이 왜 나같이 별 볼 일 없는 놈에게 친한 척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였다. 용병생활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털릴 돈도 없는 나였기에 이러한 의구심은 더욱 컸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연한 행동들이었지만 당시의 나로썬 오해했던게 당연할 정도로 그와 나는 모든 면에서 너무 달랐었다.
엘레강스하고 럭셔리하고 딜리셔스한 그의 이름은 몽쉘로그. 노움 도적이며 내 은인이다. 그를 만나 제 2의 인생을 살며 이 글을 쓰는 내 이름은 티요. 성씨는 앙이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한 출발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