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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근무 경험담(남자보육교사의 시작)
게시물ID : humordata_198237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께레
추천 : 20
조회수 : 2750회
댓글수 : 26개
등록시간 : 2023/03/30 2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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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보육교사가 된 것은 아내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좋아하기는 했지만

직업을 가질 생각은 없었는데 아내가 어린이집을 할거라면서 저도 자격증을 따서 같이 하자 해서 유아교육과를 가게 되었습니다.

2학년이 되던 때 아내가 어린이집을 시작하고 저는 통학차량을 운행하면서 함께 어린이집을 운영할 때의 이야깁니다.

기존 어린이집을 인수받아 시작했습니다. 정원 27명 정도 잘해야 밥 굶지 않을 정도의 작은 어린이집이었습니다.

둘 다 이 분야에서 무경험자이면서 단순히 아이들을 많이 좋아하고 성실히 하면 될 거라는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여우같은 베테랑 교사, 어리바리하고 손재주 없는 교사, 소녀감성의 보조교사

이렇게 3명의 선생님들과 함께 초보원장과 초보이사장(원장 남편을 칭하는말)의 어린이집이 출범하였습니다.

도시 외곽의 하천변 동네는 시냇물이 흐르고 산새소리가 들리고 가끔 기차도 지나가는 동화같은 풍경이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둘이서 그 정취에 취해 그곳을 우리의 꿈의 출발지로 선택했던 것이었죠

열심히 의욕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으로 대했지요.

교사들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우는 아이 업고 설거지 하는 원장님, 아이들 간식은 우리집에서 먹는 것과 같은 수준으로 좋은 재료로 맛있게 만들고 아이들이 배 부르도록 먹여 주어서 항상 간식을 추가로 더 먹는 아이들, 응가한 아이는 꼭 엉덩이를 더운 물에 씻고 분을 발라 뽀송뽀송하게 해주니 아가들은 방실방실 아이들 놀이 시간에 땀 흘리며 아이들과 온 몸으로 함께 놀아주는 이사장님, 떼쓰고 고집 심하게 부리던 아이 달래려고 시냇가에 가서 함께 물고기도 잡고 업어도 주고 같이 딩굴며 안아주는 아빠보다 잘 놀아주는 선생님,

어느날 한 아이가 저를 아빠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아내를 엄마라고 불렀습니다. 교사들도 원장님은 진짜 엄마같아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날부터 2세반 아이들에게 원장님은 엄마, 저는 아빠선생님이라고 불리웠습니다. 교사들도 저를 그렇게 불렀답니다.

별난 엄마 한사람이 어린이집 수업을 몰래 염탐했었습니다. 다른 아이들과 노는데 자기 아들은 돌아 앉아 있었다고 그 찰나의 순간을 보고 눈물이 핑 돌더랍니다. 소중한 내새끼가 외면당하고 있더라고.... 그리고 아니라고 해도 기어이 퇴소 시키고 다른 원으로 보냈습니다. 까다로운 식습관으로 밥을 잘 먹지않는 아이를 밥 잘 먹게끔 맛있는 반찬, 생선을 구워 일일이 살 발라서 먹여가며 예쁘게 키웠는데....그리고 두달 후에 앙상하게 마른 아이를 데리고 다시 와서 사정하더군요 우리 아이 다시 받아 달라고 아이가 너무 안 먹어서 큰일났다며 애원을 해서 다시 받아 주었습니다만, 결국 나중에 다른 이유로 우리를 아프게 하더군요.

시장에서 토스트가게를 하는 집의 아이는 저녁 7시에 장사하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한창 바쁜 시간이어서 그리 해 달라고 부탁해서 어린이집이 6시 퇴근인데도 한시간 후에 데려다 주었고, 엄마 혼자 키우는 아이는 우리집에 데려가 저녁먹이고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엄마가 일을 마칠 때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리집에서 차로 15분 거리 그런데 추가 보육료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 안타까운 마음에 봉사한겨죠. 자다가 깨면 심하게 잠투정하는 아이 엄마 편하라고 차에서 안아들고 집안에 들어가 방에 눕혀주고 나왔습니다. 어린이집 원생이 아니라 우리 아이처럼 대했습니다. 할머니가 키우는 두 형제는 국수가 너무 맛있다고 간식으로 국수를 하면 두 그릇씩 먹었지만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하면서 듬뿍 담아 주었지요.

어린이집에서 행사를 하면 경험없는 우리는 베테랑 교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따로 수고비를 주었답니다.

금요일 마다 아이들 하원시에 공작물을 하나씩 만들어 들려 보냈는데 어리바리 교사의 솜씨가 너무 한심해서 문을 나서기도 전에 부서지기 일쑤였고 내가 대신 만들어 주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아침 등원은 아내와 함께 운행했고

소녀감성 교사는 하원차량 운행을 함께 했는데 강변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단풍지는 계절에 숲길을 운행하면서 음악과 영화 얘기도 많이 하던 제게 친구같은 샘이었습니다. 초보라 교사로서의 능력은 부족했지만 성실히 하려는 노력은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드디어 제가 졸업을 하던 해에 아내가 더 이상 어린이집을 운영할 수 없겠다고 그만 두자고 합니다. 세상 물정도 모르고 건강도 안좋은 나에게 나쁜 이야기는 다 숨기고 혼자 해결하던 아내가 하는 얘기는 충격이었습니다. 지역이 재개발 구역이라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떠나는 사람만 있으니 원아 모집이 되지 않아 보육료 수입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아이들에겐 아낌없이 퍼주다 보니 적자가 될 수밖에 없지만 교사들 월급은 더 줘야하는 상황이니 운영을 할수록 적자요 조금 더 있으면 우리는 집도 없는 처지가 될거라서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원 운영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아이들고 즐겁게 놀기만 하던 나는 보육교사 자격을 얻는 그 해에 우리 어린이집과 이별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 남자 보육교사의 길을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아내같은 착한 원장님만 있다면 어린이집은 어린이들의 천국이 되었을 거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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