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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분단의 원흉은 누구일까?
게시물ID : sisa_19834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포어시어러
추천 : 0/3
조회수 : 702회
댓글수 : 84개
등록시간 : 2012/04/20 23:30:28



한국문제가 표류하게 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국제연합 총회 제2일에 마샬(Marshall,G.C.) 국무장관을 통하여 한국의 독립문제를 정식 의제로 상정, 21일에 총회 운영위원회가 총회 의제에 포함시킬 것을 통과시키고, 23일 잇따라 본회의에서 의제 채택을 통과시킴에 따라, 총회 제1차(정치)위원회에 한국문제가 정식으로 부의, 심의되었다.
 
이 정치위원회에서 미국측은 1948년 3월 31일 이전에 국제연합임시위원단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주장한 데 반하여, 소련측은 1948년 초까지 먼저 한국에서의 외국군 동시 철수를 주장,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11월 14일 총회 본회의에서 미국측 안을 43:0(기권 6)이라는 압도적 다수결로 채택함으로써 모스크바협정이 규정한 5개년 신탁통치안이 국제정치무대에서 묵살되고, 한국문제의 새로운 방향이 설정되었다.
 
국제연합 결의에 따라 한국의 총선거 감시를 위하여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이 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등 9개국으로 구성되었으나, 우크라이나는 이에 불참하였다.
 
내용
 
이 위원단은 1948년 1월 12일 서울 덕수궁에서 첫 회합을 가지고 임무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월 24일 소련군정당국이 이 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입경을 거절함에 따라 북한지역에서의 기능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국제연합 소총회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고받고 그 해 2월 26일 위원단이 한국 내의 가능한 활동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게 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국제연합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접근할 수 없었던 북한지역의 선거를 유보한 채 남한지역만의 선거를 실시하도록 하였다. 미국에 의한 이와 같은 한국문제의 국제연합총회 상정 및 총선거안은 우리 나라 정계에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李承晩)이 이끄는 대한독립국민촉성회는 이에 찬동하였고, 이미 1947년 9월 하순까지 조속하고도 독자적인 총선대책위원회를 구성, 읍·면 단위의 지방조직까지 정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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