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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장편,브금]박쥐 - 1
게시물ID : panic_1969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1
조회수 : 222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09/19 18:33:11
0. 부산에서 서울로 향하는 경부고속도로를 중형 트레일러 운반차가 미끄러지듯 혼자 달리고 있다. 새벽 5시. 고속도로를 이용하는 차가 적다. 더군다나 심한 안개덕에 가시거리가 짧아져 다른 차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트레일러 측면의 붉은 색으로 칠해진 GREECE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그리스 신화 유물 전시회의 중요한 운반을 담당한 트레일러였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긴장감은커녕 라디오를 크게 틀어 놓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추어 입으로 흥얼거리고 있다. 자신의 뒤에 있는 트레일러 안에 들어있는 것들 중 하나만 팔아도 자신이 몰고 있는 트레일러 운반차를 3-4대는 너끈히 구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라디오 음악에 심취하여 한참을 운전해 나갔을 때 운전기사의 눈에 저 멀리 빨강과 파랑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경찰!' 아무런 범법행위를 한적 없는 그였지만 경찰만 보면 묘한 거부감이 든다. 속도를 천천히 줄여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는 곳에 다 닿았을 때는 사람이 걷는 속도 보다 조금 빠른 정도가 되었다. 노란색의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경찰 3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트레일러 운반차가 속도를 완전히 줄여 멈추자. 경찰 3명중 한 명이 차로 다가왔다. "잠깐 차안을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무슨 일인데 그러시오?" 운전기사의 대답은 처음부터 관심도 없었다는 듯 이미 다른 두 경찰이 트레일러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운전기사는 다짜고짜 트레일러를 뒤지기 시작하는 경찰에게 분노가 치솟아 문을 열고 내리며 소리쳤다. "아니 무슨 사정인지도 모르고 마음대로 조사...... 운전석 문 옆에 서 있던 경찰은 운전기사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뒷섭에서 긴 칼을 꺼내어 운전사의 가슴에 꽂아 넣었다. 아무 방비도 하지 못한 운전사는 가슴에 칼을 품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엎어진 운전사를 발로 차서 다시 앞으로 돌아눕게 한 경찰은 두어 번 힘을 주어 가슴에서 자신의 칼을 빼내었다. 붉은 피가 칼을 타고 운전사의 옷 위로 투툭 떨어져 내렸다. 잠시뒤. 트레일러 뒤에 가서 안을 조사하던 경찰 2명이 다되었다는 사인을 보내온다. 경찰 3명은 바리케이드를 자신들이 타고 온 경찰차에 싣고 그곳에서 재빨리 벗어났다. 안개가 더더욱 짙어졌다. 1. 국립박물관은 전시회 방문객으로 북적거렸다. 전시회가 열린 지 벌써 일주일이 다되어 간다.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회랑에 그리스 신화 유물이 갖가지 모양새로 방문객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유물을 옮기는 과정에서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전시회가 진행되어 되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룹 Wempti의 사장 비서인 조현주는 지금 사장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벌써 사장 밑에서 일한 지 1년이 다되어 가지만 아직도 완벽 주의자인 그의 성미를 맞추는 건 너무 어려웠다. 그냥 무조건 사장의 옆에 달라붙어 아양을 떠는 것말고는 그녀에게는 아무 대책도 마련되지 않았다. 몇 초간 침묵이 지속되었다. 현주는 불안한 마음에 사장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54세치고는 꽤 젊어 보이는 편이다. 그의 성격처럼 머리는 항상 올백으로 넘기고 사이사이로 나오는 흰머리는 항상 검은 색으로 염색하기 때문이었다. 키도 크고 덩치도 있는 편이라 체형이 작은 현주가 옆에 서있으면 마치 아버지와 딸 같아 보인다. "그래. 다행이야." 사장 최일환이 부드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현주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살짝 놀란다. 평소 같으면 '작은 문제라도 있어선 안돼!' 라는 식으로 말꼬투리를 잡고 불호령을 내려야 했다. "마지막이라고 대강하지 말고 경비를 철저히 하고 아무 문제없도록 잘 진행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난 이만 일이 있어서 가봐야겠어. 알아서 잘해." 사장은 현주의 어깨를 두어번 토닥이더니 전시회장에 그녀 혼자 놔두고 문쪽으로 걸어갔다. 현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사장의 뒷모습이 문 뒤로 사라질 때까지 쳐다봤다. '죽을 때가 되었나......' 그녀는 전시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박물관 사무실로 걸음을 총총히 옮겼다. 2.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온 미경은 하루종일 교양 철학 교수를 속으로 몇 번이나 욕했는지 모른다. '도대체 철학에 그리스 신화 유물 전시회가 무슨 소용 있다는 거야.' 그녀는 오늘의 바쁜 시간-쇼핑이나 친구들과 놀러 가는-을 쪼개어 고리타분하기 짝이 없는 전시회를 다녀와야 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고지식한 철학교수가 내어준 레포트 탓이다. 미경은 따분한 일이나 깊이 생각하는 걸 지독히도 싫어했다. 전시회 일을 잊으려는 듯 그녀는 외투를 침대 위에 그냥 벗어 던지고 마치 외투가 침대 위에 내팽개쳐지던 것처럼 침대로 곤두박질 쳤다. 기분 좋은 스프링의 반작용. 침대에 파묻혀 이대로 잠들고 싶다. 잠깐 눈을 감아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다시 일어나서 샤워를 해야한다. 밖에서 돌아온 뒤 샤워를 안 하면 온갖 오염물질이 피부에 붙어 있다는 생각에 꺼림칙한 기분을 버릴 수가 없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 옷을 벗고 샤워실에 들어간 미경은 물의 온도가 올라가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 섰다. 잘록한 허리. 적당히 부푼 가슴. 예쁘다고 말하기엔 부족하지만 뚜렷한 이목구비. 그리고 지금은 수건으로 올렸지만 날개뼈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 스스로 대단히 만족할 만큼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자신의 프라이드에 지장을 줄 외모는 아니다. 잠깐 거울 앞에 서있는 동안 틀어 놓은 물이 어느새 온도가 뜨겁게 변해있었다. 자욱한 김이 거울에 생기기 시작했다. '아. 힘든 하루였어.' 기껏 학교 수업을 마치고 전시회에 한번 들렸다온 그녀는 육체적인 피로보다 정신적인 피로가 심하다고 느꼈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면 누구나 쉽게 지치는 법이다. 물 온도를 적당히 조절하고 몸에 물을 뿌린 그녀는 바디샴푸를 노란색 목욕 스펀지 위에 적당히 짜내어 몸에 비비기 시작했다. 기분 좋은 거품이 스믈스믈 일어났다. 하얀 거품이 그녀를 조금씩 잠식 해간다. '샤워를 마친 후에 레포트 정리를 해야겠다.' 미경은 학교 때문에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하고 혼자 멀리 떨어져 자취를 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이 그럴싸한 14평 1층 원룸을 얻어주었기 때문에 별 불편 없는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 물론 생활비와 다른 유흥비도 딱딱 시기에 맞추어 통장으로 입금되어 왔다. 그때! 덜컹!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 소리사이로 둔탁한 소리가 미경의 고막을 두드렸다. 샤워기의 물을 재빨리 줄였다. 끼이익. 돌리는 수도꼭지가 듣기 싫은 마찰음을 내었다. 하지만 그것에 신경쓸 여유가 없다. 쿵. 푸드덕. 샤워실 문밖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육중한 소리. 그리고 짐승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 봐서 작은<것>은 아니다. 미경은 갑자기 몸이 싸늘해짐을 느꼈다. 꼭 옷을 하나도 걸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알 수 없는 <그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오감을 평소보다 몇 배 더 예민하게 해준 까닭이다. '창문을 잠갔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잘 기억나질 않는다. 더군다나 그녀는 창에 설치하는 쇠창살조차도 없다. '아차' 설상가상. 혼자 사는 방이기 때문에 샤워할 때 샤워실 문을 굳이 잠그지 않는다. 잠가야한다. 그녀의 행동이 빨라졌다. 샤워실 문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문을 잠그려는 순간. 덜컹! 그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샤워실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침입자의 소리를 내던 <그것>이 미경의 눈에 들어왔다. "아악!!!" <그것>은 바로 비정상적으로 거대한 박쥐였다. 3. - 신 동아 일보 - 동일 아파트에서 20대 여성 6명 빈혈로 동시사망. 여성들의 빈혈은 희귀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20대 여성 10명중 5-6명은 빈혈을 지병처럼 가지고 있다. 거의 60%에 가까운 보유율을 자랑하는 대중적인 여성병인 셈이다. 하지만 어제 일어난 이 사건은 빈혈이 그렇게 만만한 병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사망자 가족들의 말에 의하면 6명 모두 빈혈을 앓은 적이 없거나 아주 가끔 가벼운 빈혈을 호소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생활에 불편함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의 빈혈이 사망까지 불러일으켰고, 그것도 6명이 같은 아파트에서 동시에 사망했다. 경찰에서는 아파트의 물탱크와 이웃들의 증거를 토대로 원인을 조사해 보고있지만, 아직 이렇다할 결론을 찾지 못하고 있다. 동석은 자신이 쓴 토막기사를 다시 한번 읽어보고 있다. 사건현장에 다녀왔지만 이렇다 할 특이점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모두 20대라는 점과 극심한 빈혈로 6명 모두 동시 사망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더 이상 알아낸 것이 없다. 그는 서랍 안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담배를 원래 잘 피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는데는 니코틴이 최고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김동석. 그는 이제 기자생활을 1년밖에 안한 신참이다. 하지만 신문방송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명석한 두뇌로 항상 신문사 안에서 엘리트 취급을 받아왔다. 그래서 지난 1년 간 주변 사람들의 기대에 부흥하는 무언가를 한번 터뜨려야 한다는 부담감에 적지 않게 시달려 왔었다. 이번 기사도 많은 포부를 안고 사건현장에 달려갔지만 겨우 사람들의 호기심이나 자극하는 토막기사거리만 찾아온 셈이었다. 후우. 동석은 어느덧 필터까지 얼마 남지 않은 담배를 마지막 힘을 다해 쭈우욱 빨아들였다. 폐 저 깊은 곳까지 니코틴이 닿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아.. 또 내 생명이 5분 줄었다.' 그는 길거리에 흔히 붙어있는 플랜카드에 있는 문구를 생각해 내었다. <담배 한 개비에 당신의 수명은 5분이 줄어듭니다.> 동석은 담배를 재떨이에 끄고 의자를 밀치며 일어섰다. 다시 한번 현장에 가볼 심산이었다. 동시에 20대 여인 6명 사망.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쓴 기사에는 중요한 무엇인가가 빠져있었다. "저 취재하러 나갑니다!" 상석에서 치킨을 지저분하게 뜯고 있는 뚱뚱한 편집장에게 대뜸 한마디 던지고 동석은 신문사를 빠져나왔다. 편집장은 이제 슬슬 그에 대한 기대가 사그러 들었기에 그가 무얼 하던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4. 정신과 닥터 민욱은 최근 3일 동안 늘어난 악몽환자 때문에 노심초사했다. 병원에 등록 되어있는 환자만 23명이었다. 겨우 3일 동안 23명이라니. 악몽도 유행이 있단 말인가? 사무실 서랍을 열어 따로 보관해둔 23개의 서류철을 꺼내었다. 이례적인 일이라 민욱의 입장에선 좀더 철저한 조사가 필요했다. 여성, 박쥐, 성교. 이 3가지가 현재 유행하고 있는 악몽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포인트였다. 악몽을 꾸는 환자 23명 모두 여성이었고, 어떤 상황이든 꿈속에서 그녀들은 거대한 박쥐와 애무를 나누고 성교를 한다고 했다. 특이한 점은 처음 박쥐와 대면했을 때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시간이 지남으로서 마치 사랑하는 연인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 속에서 끊임없이 박쥐와 하나가 되기를 원하게 된다. 민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얼굴을 붉히며 악몽 얘기를 하던 여자들의 얼굴을 생각 해내었다. 51세인 자신과는 다르게 모두 한결같이 젊고 아름다웠다. 그래. 연령층도 포인트에 집어넣자. 20대에서 30대 사이. 이 악몽환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면 의학잡지에 나의 이름이 올라갈지도 모른다. 민욱은 이런 특별한 상황-의학잡지에 이름이 날수 있는 상황-이 닥쳐오자 스스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기필코 해결하고 말겠어.' 그는 지독한 명예욕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5. 미경은 교양철학시간에는 교수에게 눈만 맞추어져 있을 뿐 머릿속은 전혀 딴 곳에 가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일전 준비한 전시회에 관련된 레포트를 제출한 뒤로 계속해서 딴 생각에 빠져있는 그녀였다. '왜 하필이면 박쥐야..' 그녀는 3일 밤을 계속해서 거대한 박쥐의 악몽을 꾸었다. 도저히 자신이 생각할 수 없는 지독한 내용의 악몽이었다. 박쥐와의 성교. 단 한번도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해본 적 없는 -이것은 23살이나 먹은 그녀의 작은 콤플렉스이기도 했다.-그녀에겐 충격적인 것이 당연했다. '그리고 더 웃긴 건 나야.' 그랬다. 더욱더 충격적인 사실은 자신에게 있었다. 점점 꿈이 아닌 현실에서도 거대한 박쥐를 그리워한다는 사실이었다. '아......' 미경은 박쥐생각을 하자 또다시 몸이 나른해지며 오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마치 시간이 너무 지루하여 잠이 오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실로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갑자기 찌-잉 하며 뒷골에 큰 충격을 느꼈다. 쿵. 미경은 자신의 이마가 책상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식을 잃었다. "미경아." 그녀의 주변에 앉아있던 학생들이 그녀의 이름을 부르며 몰려들었다. 깐깐해 보이던 철학교수도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병원으로 데리고 가자." 남학생 셋이서 그녀를 부축해서 업었다. 6. 동석은 자신이 아끼는 차. 빨간 티코 안에 자리잡고 앉아 운전에 몰두했다. 다른 것은 남들 이상으로 잘하는 그였지만 신기하게 길눈에 유난히 어두웠다. '이 근처였는데......' 몇 일전에 자신이 왔던 길을 눈짐작으로 더듬으며 온지 벌써 50분이 지났다. 원래 20분이면 도착하는 곳을 30분이나 더 헤매고 있다. "아!" 주위를 계속해서 두리번거리던 동석이 입에서 외마디 탄성이 튀어 나왔다. 현대아파트. 그가 찾고 있는 사건현장이었다. 동석은 차를 그쪽으로 몰아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놓고 수첩을 챙겨 내렸다. 21층짜리 아파트. 그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고층 아파트에서 사는걸 굉장히 꺼렸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안에서 애들 몇 명이 소란스럽게 내려 아파트 밖으로 뛰어 나갔다. 동석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힐까봐 잽싸게 발을 들여놓고 15층 버튼을 누른다. 사망자는 3층, 6층, 9층, 10층, 12층, 15층에서 발생했다. 맨 위부터 차례대로 내려오며 방문할 생각에 15층이 먼저 선택되었다. 부응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위로 올라갔다. 처음 올라가기 시작할 때 중력을 이겨내는 힘 때문에 몸이 순간적으로 무겁게 느껴진다. 15층까지 도착하는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익숙한 엘리베이터 도착 소리가 울렸다. 1501호. 딩동. 초인종을 한번 누르자 넉넉해 보이는 얼굴의 남자 한 명이 문을 열었다. 그 집 사망자는 부인이었다. 결혼한 지 3년 밖에 되지 않았고 2살된 아들 때문에 더욱더 상심이 클 듯 했다. 동석이 집을 조사하도록 허락 받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기자에 대한 존경심에 비례해서 조심스러움도 큰 편이다. 지체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거실과 안방을 꼼꼼히 뒤져나갔다. 침대 밑까지 모두 살펴보았지만 커다란 소득은 없다. 단지 그 집 아들이 잃어버렸던 장난감 몇 가지를 꺼냈을 뿐이었다. 하지만 포기하긴 아직 이르다. 부인이 가장 신경 써서 정리하고 활동했을 부엌을 돌아봐야 한다. "이미 경찰이 다 조사를 했습니다. 필요한 물건은 모두 가지고 갔어요." 사망자의 남편이 이제 슬슬 지겨워 지는지 말을 꺼냈다. "네. 하지만 경찰이라는 게 워낙 형식적인 조사만 하니까 조금만 더 조사해보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폐를 끼쳐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는 수 없다는 듯 사망자의 남편은 머리를 한번 신경질적으로 긁고 아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서 TV를 켰다. 계속된 조사로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동석은 부엌의 냉장고까지 열어보며 이것저것 조사하다가 식탁 위에 있는 보관함에 눈이 갔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통이었는데 뚜껑은 없고 안에 여러 가지 종이쪼가리가 들어있었다. 아마도 사망자는 꼼꼼히 영수증을 모두 챙겨오는 억척스러운 면이 있는 여자였을 것이다. 보관함을 들고 안의 내용물을 하나하나 살펴보던 동석은 병원 진료 영수증을 하나 발견했다. 닷새가 지난 것이었다. "부인께서 병원에 다니셨나 봅니다." "네. 얼마 전에 악몽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경찰은 아마 이 영수증을 그냥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것이다. <성일 종합병원. 담당의-전민욱> 동석은 수첩을 꺼내어 메모했다. 더 이상 찾아볼 곳이 없는지 한번 집안을 휙 둘러보고 남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집밖으로 나왔다. 다음차례는 12층이다. 이곳에서는 하나뿐인 22살짜리 딸이 사망했다. 막 장례를 마치고 온 듯 집안은 일가 친척이 모두 모여 침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대로 된 조사는 힘들 것 같았다. 그냥 대강 대강 이리저리 방안을 열어 보는 수밖에 없었다. "죽기 전에 그렇게도 악몽에 시달려 병원까지 가더니 결국 그렇게 갔구나.." 사망한 여인의 어머니의 넋두리가 동석의 귓가에 들려왔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방금 악몽이라고 하셨지요?" "딸애가 죽기 전에 악몽을 많이 꾸었어요. 자다가 일어나면 온몸에 식은땀 투성이고 잘 때마다 꾸는 통에 정신병원까지 갔었어요." 동석은 이거다! 싶었다. "혹시 그 병원이 성일 종합병원이 아닙니까?" "예. 아마도 그럴거에요. 혜선아.....흑흑......" 딸을 잃은 슬픔이 얼굴에 가득한 이 중년 여인에게 더 이상 질문은 무리였다. 하지만 동석은 더 이상 질문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이건 분명 의료사고가 틀림없어.' 한가지 생각에 정신이 팔리면 원래 다른 일에 신경 쓰지 않는 것이 그의 타입이다. 인사의 예의도 모르는 사람으로 생각하던 말던 인사도 안하고 단숨에 다음 층으로 향했다. 10층. 딩동. 동석은 초인종 소리를 듣고 나온 중년 남자에게 물었다. "신 동아일보 기자 김동석이라고 합니다. 혹시 따님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정신병원에 갔었습니까?" 더 이상 집안을 조사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다. "네. 그렇긴 한데.." 동석은 이번에야말로 신문사 놈들을 모두 놀라게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최고의 의료진을 자랑하는 성일 종합병원. 의료사고로 6명 사망시키다.> 기사의 소제목까지 벌써 정해두는 그였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이구리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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