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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잡아 족치기, 그 열두째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990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미봤다
추천 : 7
조회수 : 967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3/07 17:16:07
흐흐흐흐흐..

요즘 새식구가 새로 생기는 바람에 하루하루를 흐흐흐 대며 살아가고 있는 견리사의입니다... 흐흐흐

지난번 중양이 얘기를 하다가 이 색히가 살아온 이력이 하도 찬란하여 도저히 한편의 이야기론 끝을 낼 수 없어

2부를 연재하기로 했죠.

이 좋은 기분에 갑자기 또 똥을 씹으며 기억을 유추하고 책을 뒤적이자니 기분이 살풋 나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친일한 색기들이 죽어서도 호강하며 잘 살고 있기에

친일파 잡아 족치기는 계속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끝까지. 괴롭혀 주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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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jpg



1925년 52살 5월 조선불교단(불교계의 친일단체) 대구지부 고문
                      동민회의(독립사상 배척) 경상북도지부 멤버

1927년 54살 2월 중추원의 참의로 임명된 뒤 1931년 5월까지 네 차례 연임(연봉 5천만원) 

1931년 58살 9월 원숭이들이 주는 훈장 수상

1933년 60살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위원 

1934년 61살 11월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새로운 생활을 통해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고자 했던 시중회의 멤버로 활동

1935년 62살 10월 조선총독부 25주년 기념표창 수상

1941년 68살 5월 중추원 고문에 임명, 1943년 10월까지 매년 5천만원의 연봉을 받음

1941년 68살 10월 조선임전보국단(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하기 위해 조직된 친일단체) 고문

1942년 69살 11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943년 70살 4월 천황의 만세무궁을 기원하기 위해 조선신궁에서 열린 천장절제에 참석해 "텐노 반자이" 하며 원숭이들의 똥꼬를 핥아줌

1943년 70살 9월 국민총력조선연맹(전시 최대 관변통제기구)의 멤버

1943년 70살 10월 중추원 부의장. 19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재임. 매년 6천만원의 연봉을 받음

1943년 70살 11월 쪽바리의 전쟁에 조선인 학생들을 내보내기 위해 중추원 격려대원으로 경상남도에서 활동

1944년 71살 6월 국민총력조선연맹(전시 최대 관변통제기구) 고문

1944년 71살 8월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여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수품 제조에 적극 협력

1945년 72살 4월 일본이 똥꼬 잘 핥아주는 순으로 조선인 귀족 7명을 뽑았는데 그중 한명으로 선출됨...
                      1위 김명준, 2위 박상준, 3위 박중양, 4위 송종헌, 5위 윤치호, 6위 이진용, 7위 한상룡
                      기타 나머지 색히들은 혀가 짧아서 떨어짐
                      
1945년 72살 6월 국민의용대 고문

1945년 72살 8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뉴클리어 밤이 팡팡....
                      중양이 ZO땜

1949년 76살 1월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바로 풀려남

1959년 86살 4월 23일 천수를 누리고 대구에서 뒈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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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에 걸쳐서 연재해야 할 만큼 중양이는 고관대작을 지냈으며 출세가도를 달렸던 친일파입니다.

중양이는 쪽바리에게도 총애를 받을만큼 유명했던 놈으로, 

쪽바리에 의해 쓰여진 <조선공로자명감>에 따르면

"역량과 수완이 탁월하고 일본인에게 진실로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조선인 중에 박중양밖에 없다.”라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완용 사후에 쪽바리들이 이완용을 평한 대목

"이완용은 잔나비같은 색히로, 기회주의자이며, 처음에 청나라에 붙었다가 나중에 일본으로 돌아선 전형적인 보신주의자이다."
와 비교하면...

그가 쪽바리에게 얼마나 혼신을 다했는지...(얼마나 빨아 제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양이 이색히는 해방이 된 후에도 정신을 못차리고 원숭이들의 똥꼬를 쪽쪽 빨아 제꼈는데...

그가 한 발언들을 잠깐 살펴 보겠습니다.



해방 직후 그를 비난하는 여론과 시민들을 향해 중양이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비록 친일은 했지만, 민족 반역자는 아니다. 나는 내 한 몸 잘 살아보기 위해 발버둥쳤던 시대의 희생양이다."

"조선시대보다 일제시대가 살기엔 편했다. 일본의 앞선 문물과 문화는 조선을 발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완용은 국난을 당하여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구한 사람이다."

"조선이 과연 해방될 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냐. 조선의 독립은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의해서가 아닌 미군의 손에 의해 이루어진것이다."

라는 망언을 하고 돌아다닙니다.



이색히의 말은 조선은 하등민족이며, 조선의 독립도 조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힘에 의해서 이루어진것이다.

조선은 일본을 이길 수 없으며, 조선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라는.... 조선민족하등설을 끝까지 주장했던 놈입니다.




이 색히는 반민특위에 잡혀가면서도 
반민특위가 있던 제일은행 정문을 들어서며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아, 고꼬가 무까시노 다이이치 긴꼬 다네. 소~ 소~"
(아, 이곳이 옛날의 제일은행이구나. 그래! 그래!)




누군가는 이 색히를 두고 신념의 친일파이니, 지조있는 친일파이니 라는 헛소리를 지껄입니다.


즉, 이색히가 주장한 조선민족하등설은

이 색히의 신념에서 나온 말이니... 그를 민족반역자나 배신자로 몰지는 말자는 논리입니다.

게다가 이색히가 살아오면서 했던 조선인들에게 유리한(일본 순사를 혼낸 사건이 몇개 있음) 짓을 몇 건 했기때문에..

그를 높게 사자.. 라는 취지에서 나오는 말 같은데..

개뿔... 친일파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죠.....




조선민족하등설을 주장했던 중양이에게 아래와 같은 사진을 보여주며....

마무리하고 싶네요....



















zz.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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