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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암군 & 폭군 열전 - 1. 만력제
게시물ID : history_199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로여행러
추천 : 19
조회수 : 3957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5/03/09 00:13:44
안녕하세요

요즘따라 어떤 분을 보면서 역사속 암군과 폭군에 대해 다룬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주어 음슴)

오늘은 첫번째로 만력제에 대해서 써보려고 합니다(반응이 별로면 마지막이 될지도...?)

1. 만력제의 간략 설명
유왕 주재후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큰형과 둘째 형이 모두 죽자 유왕세자(裕王世子)에 봉해졌다. 1567년 아버지가 황위에 오르자 황태자에 책봉되었고 1572년에는 10살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다. 만력제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재상 장거정(張居正)에게 맡겼다. 오랫동안 그의 스승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장거정의 교육 방식은 너무 엄격해 어린 만력제의 숨통을 조이기 일쑤였다. 공론을 줄이고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을 중시한 그는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국사를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덕분에 명나라는 그런대로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만력제가 제위에 오른 지 10년째 되던 해 장거정이 세상을 떠났다. 그동안 기를 펴지 못했던 반대파들은 입을 모아 장거정의 비리를 들추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거정을 편들었던 만력제도 그의 재산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장거정의 가산을 몰수했다. 이후 그는 30년 간 여러가지 구실을 대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나라가 깊은 수렁에 빠져갔고, 나라에 아무리 위급한 일이 생겨도 동전 한 닢 내놓지 않는 지독한 구두쇠가 되어 갔다. 반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다. 황제의 재산은 날이 갈수록 늘어 갔으나 국고는 점점 줄어들었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되어갔고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만력제는 아부하는 자를 재상에 앉혀 놓고 오로지 치부에만 열성을 보였다. 거기다 술과 여자까지 밝혔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으나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이자성의 난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명나라는 멸망을 맞이하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썼다.

평판이 매우 좋지 못한 군주이지만, 임진왜란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책을 펼친 편이다. 그래서 당대와 후대 중국인들에게서는 만력제를 가리켜 ‘고려의 천자(天子)’ 또는 ‘조선의 황제’라고 일컫기까지 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대한 호감이 생겨난 배경도 이때 만력제가 보여준 적극적인 우호 정책 탓이 매우 크다.

그런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송시열이 제자인 권상하에게 만력제와 숭정제의 제사를 지낼 사당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만동묘(萬東廟)이다.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함께 조선의 4대 서원으로 명성을 떨쳤으나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를 지시할 때 헐려버리고 지금은 묘정비만 존재하고 있다.(출처 위키백과 만력제)


2. 악행 스토리

만력제는 암군이냐 폭군이냐를 따지자면 암군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뭐 어떤 암군이나 그렇듯 폭군의 기질도 있긴 합니다(사실 일반 백성들 쥐어짜면서 지들 배때지 불리면 폭군이죠.)

만력제의 가장 큰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위의 설명에도 나와있지만 만력제는 30여년이나 병을 핑계로 국사를 돌보지 않았으며(심지어 그 전에도 스승이었던 장거정이 캐리)
이로인해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오죽하면 신하들이 황제의 얼굴을 본적이 없었다고 할정도로(...)

삼국지를 잘 아시는 분들은 유선과 제갈량의 관계가 만력제와 장거정의 관계랑 유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두 명재상이 죽고 나서 나라가 개판이 된다는것 까지도 비슷합니다.

다만 차이점은 촉나라에 비해 명나라는 극도로 황제 중심주의의 국가였기 때문에 재상이 먼짓을 해도 힘을 크게 못쓴다는 점입니다.
물론 장거정의 개혁(토지측량, 일조편법, 낭비 철폐 등)은 분명 효과가 있었지만 본인이 죽고 뒤를 이어 해줄 재상이 없자 그대로 묻혀버립니다.

장거정 사후, 명나라는 그럭저럭 나라의 명맥은 유지하였지만 속은 개판이 됩니다

정치는 아무것도 안한 
만력제 본인은 무엇을 했느냐 하면 돈을 폭풍같이 낭비하게 됩니다.

우선은 장거정의 피땀어린 노력으로 인해 당시 명나라는 국고에는 10년 분의 식료와 4백만냥의 잉여금을 축적할 수 있을 정도로 재정적으로 빵빵했습니다. 그런데 이 돈을 본인이 황제로 있는기간에 싹다 날려버립니다. 물론 세금도 무지하게 걷어 댑니다

이 돈들이 간 1차적인 곳은 전쟁이었습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7년동안에 전비로 쏟아붓고, 오르도스의 난, 사천반란 등 유독 큰 전쟁이 많기도 했습니다만....

이 세번의 전쟁에 들어간 전비보다 본인의 무덤을 만든 비용이 더 컸다고 합니다(800여만 냥, 당시 2년간 전국 토지세 총 수입에 맞먹는수치)

자식들에게 쓰는 돈 역시 아끼지 않아서 아들인 복왕 주상순을 장가 보내는데 은자 2,400만 냥을 쓴 적도 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누르하치를 대비하기 위한 군비가 모자라 황제 개인계좌인 내탕금에서 이를 충당하자는 신하들의 의견까지도 거부할 정도로 정치에 관련해서는 돈을 쓰려 하지 않았습니다.(참고로 당시 명나라 국가 예산<만력제 개인재산)

3. 결과

이런짓거리를 5년을 해도 나라가 개판이 될텐데 무려 48년간(명나라황제 재임기간 1위...)했으니 명나라는 대놓고 골로가기 시작합니다.

만력제 말년에 나타난 누르하치가 요동에 청나라를 세웠고, 명나라는 결국 수많은 민란을 겪고,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멸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뒤 이자성은 청나라에게 패배. 중국은 청나라 시대로 넘어가게 되죠.

어느 후대 역사학자건 다들 목소리를 모아 말하는건 '명나라 멸망은 순전히 이 ㅅㅋ때문이다'라고 할정도로 4명의 명나라 암군 중에서도 탑을 달리는 암군입니다.

요약하자면,

전대에 똑똑한 재상이 피땀흘려 일궈낸 명나라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돈을 낭비함으로 인해 망친 아주 좋은 사례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4. 번외이야기

임진왜란의 역사를 잘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선조는 임란직후에 '임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명나라의 공이며, 그것을 해낸 대신들이 진정한 공신이다(실제 했던 말)'이라고 할정도로 명나라에 대해 고마워 했습니다.(실제로 호성공신에 수많은 문인들이 들어간 반면, 선무공신에 의병장들이 대부분 없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결국 이 사대가 지나쳐서
만력제의 사당을 조선에 지어서 제사를 지내주는(....)짓거리 까지 하게 됩니다.
본국에서는 나라를 망친 암군으로 욕먹는 작자를 타국에서 명복빈답시고 제사까지 지내준 셈인거죠.

만동묘는 조선 여느 서원들 처럼 부정부패로 물들다가 흥선대원군 집권하고 나서야 겨우 없어지게 됩니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 만력제, 장거정
위키백과 만력제

역사란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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