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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암군 & 폭군 열전 - 2. 선조
게시물ID : history_199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로여행러
추천 : 20
조회수 : 2841회
댓글수 : 30개
등록시간 : 2015/03/10 14:50:17
안녕하세요

저번글이 베스트까지 가면서 계속해서 써보겠습니다.
요즘따라 어떤 분을 보면서 역사속 암군과 폭군에 대해 다룬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주어 음슴)

오늘은 저번 만력제의 영혼의 파트너 선조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1. 선조란 누구인가

선조(宣祖, 1552년 11월 26일 (음력 11월 11일) ~ 1608년 3월 16일 (음력 2월 1일)는 조선의 제14대 임금(재위 1567년~1608년)이다. 은 이(李)는 연(昖),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첫 작위는 하성군이었고, 사후 시호는 선종소경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宣宗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며 이후 광해군 때 묘호를 선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 올려서 최종시호는 선조소경정륜립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경명신력홍공융업현문의무성예달효대왕 (宣祖昭敬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景命神曆弘功隆業顯文毅武聖睿達孝大王)이다.

중종의 서손이며 조선 명종의 이복 조카이고,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岹)와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아들로서, 비는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계비는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이다.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서자 출신이라는 점과 방계 승통이라는 점이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개인적으로는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시문과 서화에도 뛰어났다.

1567년 8월부터 1608년 3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1567년 8월부터 이듬해 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가 섭정을 하였고 1568년부터 1608년까지 친정하였으며 같은 해 1608년 3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왕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출처 위키백과)


2. 악행스토리
사실 위키의 내용을 보면 그닥 암군인지 모르겠지만 하나하나 보면 정말 안구에 습기가 찹니다.

우선적으로 선조가 왕이 된 과정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선조는 전대 명종의 아들도 아니고, 전전대 인종의 아들도 아닙니다.

위에 써있다 시피 중종의 서손이자 명종의 이복조카. 즉 정상적인 상황에서 왕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선조가 왕이 된 과정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확실한건 덕분에 제위 내내 컴플렉스에 시달리게됩니다.

자기보다 잘난사람에 대한 경계와 시기, 질투

이것이 바탕이 되어 있어 선조의 최대의 악행은 재능있는 주변사람을 멀리하고, 심하면 죽이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명종의 비였던 인순왕후 심씨가 잠깐동안 섭정을 하는데, 이분이 현명해서 사림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가능한한 친정(국왕이 직접 정치)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갑니다. 결국 짧은 기간만 섭정하고 물러납니다.

하지만 선조가 친정을 하자마자 붕당이 발생하게 되고, 이 붕당은 두고두고 조선의 발전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사실 붕당의 대두야 예견되었던 문제기도 했고, 선조가 막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부터 선조의 악행이 시작됩니다.

 1) 정여립의 난, 그리고 기축옥사
정여립은 호남 지역에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무술 연마를 하며, 1587년에는 왜구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대동계의 조직은 더욱 확대되어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파란을 일으켰다.[2]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2]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2] 이 사건으로 동인들이 서인들, 특히 정철과 배후의 성혼에 원한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도 한다.(위키백과)

이것이 정여립의 난이 일어난 배경인데, 사실상 근거도 빈약한 반란입니다.(물론 지금은 자료도 부족합니다만)
덕분에 학계에서 정여립의 난은 서인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의 처리를 인간 개백정 정철에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정철은 이 사건을 무지하게 확대, 천여명의 사람을 정여립과 단지 알거나 친했다는 이유로 고문하고 죽여버리게 됩니다. 
당시 우의정이었던 정언신이 정여립의 9촌이라는 이유만으로 유배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와병후 사망...(참고로 정언신은 이순신을 처음 천거한 대신이며 그 외에도 이억기, 신립, 김시민 등 왜란때 활약한 인재들을 대거 등용한 분...)

말이 정철이 주도한거지 이 사건의 실제에는 선조가 개입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이 민주주의 국가도 아니고 천명이 넘는 사람을 죽이는데 왕이 개입이 안됬을리가 없죠.

덕분에 동인계 인물들은 씨가 마르고 붕당간의 골이 되돌릴 수 없을정도로 깊어져 임진왜란때 대처를 못하게 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습니다.

 2)왜란의 발생, 그리고 ㅄ짓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전국시대를 끝내고 온 원숭이가 쳐들어 오는데 조선정부에서 대응을 할 수 있을리가 없습니다.

임진왜란에 대해서 잘 아실테니 왜란 당시 선조 뻘짓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1. 수도인 한양을 버리고 튐. 분노한 민중들이 어가에 돌을 던지고 궁궐에 불질러버림(왜군이 불지른게 아닙니다)
2. 의주로 몽진하자마자 한다는 게 명나라로 사신 파견해서 망명의사 전달... 그걸 위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대리청정시킴.
광해군과 유성룡 등 신하들이 뜯어 말리는데도 듣지 않다가 명나라에서 거부의사 보이자 포기
3. 이몽학의 난 때, 거짓고변을 믿고 의병장인 김덕령, 홍계남 등을 붙잡아 고문. 결국 김덕령은 죽고 홍계남은 풀려남.
4. 이순신에 대한 대우. 
이순신이 혹시 일에 게으른게 아닌가?(이순신 옥고 전)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의 목을 들고 온다고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이순신 옥고때)
이게 다 실제 한 말. 그리고 죽을 때까지 이순신에 대해서 좋은 말을 한적이 거의 없음. 
농담이 아니라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지 않았다면, 선조에게 죽었을듯.
5. 7년간의 왜란 중 총사령관. 류성룡을 왜적과 화친하려 했다는 이유만으로 파직. 류성룡은 이후 고향에 머물다 죽음
6. 전란중인데도 7년간 15번이나 선위(왕위를 물려줌)하겠다고 땡깡. 이는 세자면서 일잘하는 광해군 견제용이라고 보여짐
7. 그리고 왜란 후 레전드 발언
“지금 왜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명군 덕분이다. 우리 장사들은 간혹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히 적 잔병의 머리를 얻었을 뿐 일찍이 적 우두머리의 머리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시킨 적이 없었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해상에서의 승리와 권율의 행주대첩이 다소 빛날 뿐이다. 만약 명군이 들어오게 된 이유를 논한다면 그것은 모두 호종했던 여러 신료들이 험한 길에 엎어지면서도 의주까지 나를 따라와 천조에 호소했기 때문에 적을 토벌하여 강토를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1등공신에 원균따위가 이순신, 권율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참사까지 발생(곽재우 등 의병장들은 포함도 안됨)
심지어 호성공신에서도 이항복이 1등공신인데 류성룡이 2등공신으로 책봉되는 어처구니 없는 사태도...

더 있을거 같긴 한데 기억나는게 이정도네요

 3) 광해군에 대한 견제
광해군은 서자라는 것만 빼면 정말 훌륭한 왕의 재목이었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왕세자 책봉 문제가 거론되지 못하였으나, 신성군이 피난길에 죽고 분조해야 할 상황에 부닥치자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광해군의 형인 임해군은 성격이 광포하고 인망이 없다는 이유로 왕세자 책봉에서 제외되었다. 광해군은 전쟁 중에 평양에서 세자로 책봉된 뒤 선조가 피난 가고 없는 궁을 지키면서 전란 수습을 했다. 함경도와 전라도 등지에서 군수품과 의병을 직접 모집하는 한편, 민심을 위무하고 군량미를 모아 민중들의 신망과 지지를 받기도 했다. 또한, 부왕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양자가 되어 세자로서의 위치를 표면상 굳히게 되었다. 그러나 부왕 선조는 그런 세자 광해군을 오히려 경계하며 심하게 견제하였다.(위키백과)

조선 왕 중에서 초기 왕들(이성계, 이방원, 이방과)을 제외하면 전선에서 활동했던 유일했던 왕이었습니다.
분조(쉽게말하면 임시정부)까지 운영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능력은 이미 검증까지 받은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위에서도 밝혔듯이 선조는 왜란중에도 선위하겠다고 땡깡을 부리고, 틈만나면 견제합니다.

거기에 왜란 이후 인목왕후에게 영창대군을 보자, 왕위를 물려주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시도는 본인이 너무 늙어 실패하지만, 3년만 더 살았더라면 광해군 역시 쥐도새도 모르게 죽었을 겁니다.(덕분에 선조 독살설도 있죠)

결국 이문제는 광해군이 떠안아서 나중에 자기 형제들을 죽이는 참극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3. 결과
선조가 벌였던 최악의 악행은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인 전란에 대해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였고
국가의 수장이라는 자가 자국민들을 버리고 외국으로의 도피부터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분명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은 일본이지만, 그 피해를 최소화 시킬 수 있었음에도 그 피해를 커지게 했다는 점에서도 책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왜란 전에도 인재들을 다 죽이고(기축옥사), 왜란 중에도 죽이고(이몽학의 난), 왜란 후에도 숙청작업을 합니다(광해군 관련. 물론 죽이진 않았습니다)

본인의 출생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겠지만 그래도 이건 좀 많이 심하죠.

선조의 제위기간 동안 조선의 인재풀은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초창기에 지폐 콤비(퇴계&율곡)와 남명 조식 등 수많은 재야와 현역 유학자들이 넘쳐났고,
왜란 중에도 류성룡이라는 최고 사령관과 무관으로 이순신, 권율 등의 명장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넘치는 인재들이 있는데 틈만나면 견제를 하고 죽이고해서 씨를 말린건 명백하게 선조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후대에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통해 압박을 줌으로써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나중에 인조반정까지 불러일으키는 단초를 제공했다는 것에도 자유로울수 없습니다.

종합하자면 선조는 자신의 제위 기간에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나쁜 영향을 미친 셈입니다.

본인이 능력이 뛰어난데 주인이 암군이면 어떤일들이 벌어지는지를 선조가 가장 여실히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4. 번외이야기
사실 선조를 두번째로 선정하면서 고민은 많이 했습니다(더한 놈들도 많아서...)

암군이라고 하지만 본인 자체 머리는 똑똑했거든요(이순신, 류성룡 견제한건 머리가 나빠서 그런건 아니죠)

다만
머리가 똑똑한데 그걸 나쁘게 쓰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 선조, 이순신, 광해군, 정여립의 난, 이몽학의 난, 류성룡
위키백과 선조, 광해군

역사란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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