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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받은 돈 액수가 밝혀졌네요
게시물ID : history_1996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열린사고
추천 : 10
조회수 : 2868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3/10 18:07:09



친일파, 나라 팔아·일왕에 최고 166억 ‘은사금’

출처
[서울신문 나우뉴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친일재산조사위)가 14일 한일병합 등에 협조한 대가로 일왕에게 수만엔씩의 은사금(恩賜金)을 받은 친일파 귀족들의 이름과 액수를 공개했다.

친일재산조사위는 최근 역사 단행본 '친일재산에서 역사를 배우다'를 발간, 일제 강점 직후 '공로자'로 인정받은 조선귀족 등이 지위에 따라 수만엔씩 은사금을 받았으며 당시 1엔은 요즘 돈 가치로 환산하면 약 2만원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최고액 수령자는 궁내부 대신 이재면으로 한일 병합조약 체결에 참가해 무려 83만엔(166억원)을 받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어 순종의 장인인 후작 윤택영도 50만4천엔(100억8천만원)을 받았고 신궁봉경회 총재로 활동한 이준용은 16만3천엔(32억6천만원), 대표적인 친일파인 백작 이완용은 15만엔(30억원), 이지용은 10만엔(20억원)을 챙겼다.

또 왕족 출신으로 후작이 된 이재각·이재완 등은 16만8천엔(33억6천만원), 조선귀족회 회장이면서 중추원 부의장을 지낸 박영효는 28만엔(56억원)을 받았다.

백작보다 한 단계 낮은 작위인 자작 중에서는 송병준과 고영희 등이 일제를 도운 공이 커 10만엔(20억원)의 거금을 받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대한제국 병합에 일조한 이용구도 10만엔(20억원)의 은사금을 받았다.

용서받지 못할 매국노들 총독부 은사금 76명이 900억…

- 치부(致富)발판 전국 땅 사재기 -

일제의 작위를 받은 조정의 고위 대신과 각종 매국조약 가담자는 64명이다. 이지용· 송병준· 이완용· 박영효· 민영린· 윤덕영· 이윤용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았더라도 이를 반납한 유길준이나, 해외로 망명해 항일운동에 참가한 김기진 3· 1운동 등을 지지해 작위 자격을 박탈당한 김윤식 등도 있다.

매국형 친일파들은 ‘어차피 조선의 독립은 불가능하고 러시아나 일본의 식민지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해 병탄 조약에 가담했다’ 는 논리를 갖고 있다.

또 "조선은 독립할 능력이 없으니 일본과 합병한 뒤 나중에 실력을 키워 독립을 꾀한다" 는 '실력양성론' 도 등장했다. 늑대의 뱃속에 스스로 들어갔다가 우량아가 되어서 나오자는 궤변이라 하겠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은사금과 조선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대부분 조선총독부의 최고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찬의· 부찬의로 참여했다.

조선 백성은 망국의 대가로 모든 것을 빼앗겼지만 이들은 매국의 대가로 돈과 명예, 권력을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매국이 출세의 기회가 된 것', 이것만이 그들의 진실이다.

이들이 받은 은사금 총액은 당시 605만 4천원이다. 반납자를 포함해 모두 76명이 받았다. 현재의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900 억 원 안팎이다. 원금의 5%를 연이자로 받았으니 매년 이들의 이자 수입 총액은 대략 45억 원이다.

이완용의 경우 은사금 원금이 10만원이므로 대략 지금의 15 억 원에 해당한다. 연 5% 이자를 적용하면 1년에 7천 500만 원 정도의 이자 수입을 앉아서 번 셈이다.

여기에다 대한제국 관리를 역임한 대가로 받은 거액의 퇴직금에 중추원 부의장 회의 수당 등을 합하면 졸지에 돈벼락을 맞은 셈이다. 그들은 나라를 판 대가로 받은 이 돈으로 재산 늘리기에 나섰다.

약삭빠른 이들은 은행에 투자하거나 기업 설립에 참가했고, 일부는 탕진했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손쉬운 치부책은 땅투기였다. 이들은 전국적으로 땅 사재기에 나섰다.

때마침 진행된 토지조사 사업과 발맞춰, 이완용만 하더라도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송병준의 소유로 밝혀져 관심을 불러일으킨 부평의 미군기지 43만㎡(13만평)도 바로 매국의 대가로 치부한 것이다.

더구나 그 은사금이란 것도 일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총독이 주는 것이었다. 바로 헐벗은 망국의 백성의 세금이었다.

반면 항일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실상은 비참했다. 2004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충청도 지역 항일운동가 후손 가운데 60%가 고졸 이하의 학력에다 직업도 없이 사회의 밑바닥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해외 망명으로 자손들을 건사할 수 없었거니와 대부분 재산을 독립운동에 다 써버렸다. 또 독립 운동가들이 옥사· 병사· 타살되면서 그 자손이 고아로 자란 탓이었다.

조선귀족 일부가 일본 도쿄 관광길에 기념촬영한 모습(1910. 11. 3) 이 사진은 『병합기념 조선사진첩(倂合紀念朝鮮寫眞帖)』에 <조선귀족의 내지관광기념(전원)>이라는 제목으로 명치 43년(1910년) 11월 3일 동경에서 찍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진집에는 부인들만 따로 모여 찍은 사진도 함께 실려 있다.

1910년 8월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식민지 조선사회의 최상위 계층에 대한 친일화에 착수했다. 1910년 10월 7일 76명의 조선인들에게 작위를 수여했는데 이를 거부한 이는 한규설 등 소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미 일제의 조선 침략 과정에서 적극적이거나 우호적인 인사들이었다. 조선의 귀족들은 일왕의 ‘성은에 감읍’하고 ‘사회의 모범’이 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는데 그 중 하나가 조선 귀족회의 설립이다.

조선 귀족회는 조선 귀족관광단을 조직하면서 표면에 떠올랐다. 조선귀족관광단(朝鮮貴族觀光團)은 수작 당사자들로 구성된 사은사(謝恩使)와 이옥향(이지용의 부인)을 위시한 이완용, 조민희, 조중흥 등의 부인 30여명이 ‘觀光 및 日本 貴婦人間의 親睦을 圖’를 목적으로 조직한 관광단과 합쳐진 것이다.

귀족 20명과 동부인 10여명, 종자 등 60명으로 구성된 귀족관광단은 1910년 10월 23일 조선을 출발 17박 18일의 일정으로 일본을 시찰했다. 일제는 귀족 관광단에 지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조선귀족’들은 일제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했다.

그들은 일제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수많은 일본왕실의 중요 행사 때마다 대표를 파견했다. 또 일본의 식민지 지배 기구 및 행사에 소속, 참여해 지배체제에 순응하며 내선일체를 위해 

[출처] 용서받지 못할 매국노들 총독부 은사금 76명이 900억…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이들은 조선총독부의 은사금과 조선 귀족의 작위를 받았다. |작성자 시골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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