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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암군 & 폭군 열전 - 3. 충혜왕
게시물ID : history_1997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로여행러
추천 : 22
조회수 : 2325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5/03/11 14:45:19
안녕하세요

저번글이 약간 논쟁도 있고, 암군이라는 측면에서 의견이 갈릴만한 인물이라
오늘은 정말 분리수거도 안되는 쓰레기를 가져왔습니다.

오늘의 쓰레기... 아니 암군은 고려 충혜왕입니다.

1. 충혜왕

충숙왕 17년(1330), 충숙왕이 원나라에게 폐위되자 즉위했지만, 충혜왕 2년(1332) 원나라에 의해 폐위되고 충숙왕이 복위되어 다시 원나라로 갔다. 충숙왕 복위 7년(1339) 충숙왕이 죽자 충숙왕의 사촌 심양왕 왕고(王暠)를 왕으로 세우려는 조적(曺頔) 등의 반란이 있었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즉위했다. 즉위 후에 사치와 향락, 사냥을 일삼았으며, 흉흉한 민심과 소문이 돌았다.

충숙왕 복위 7년(1339) 5월에는 부왕의 후비인 수비 권씨(壽妃權氏)를, 8월에는 또 다른 부왕의 후비인 경화공주 백안홀도(伯顔忽都)를 강간하였다. 충혜왕은 서모인 권씨나 경화공주 뿐만 아니라, 외숙 홍융(洪戎)의 처까지 얼굴이 예쁘면 근친관계, 혼인 여부, 신분 등에 상관 없이 닥치는대로 사람을 시켜 빼앗아 강간하는 등 행동에 절제가 전혀 없고 패륜을 일삼았다. 그는 항상 정력이 강해지는 열약을 복용했는데, 강간과 음행을 일삼아 그와 관계를 가지는 여자들은 임질에 걸리는 일이 많았다. 그 때문에 장인인 홍탁의 후처 황씨도 임질에 걸렸는데, 충혜왕은 승려 복산을 시켜 그녀의 임질을 치료토록 하였다.

충혜왕 복위 4년(1343)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 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음탕한 행위를 많이 한 것으로 《고려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는 충혜왕은 결국 원나라에 의해 다시 폐위되어 원나라 게양현으로 유배를 가다가 악양현에서 죽었다.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알려져 있다.


늘 그렇듯 위키백과를 참조했습니다.

특이사항이 있다면 제위기간이 두번으로 나누어져있는데, 그것에 대한 설명 역시 뒤에서 하겠습니다.

악행을 이야기 하기전에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역사적인 이야기를 좀 첨언 하겠습니다.

고려 왕들 중에서 25대 충렬왕 부터 30대 충정왕까지는 충(忠)이 시호앞에 붙는데
이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원 간섭기에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 즉 사위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고려 왕들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했고, 시호에 원나라에 충성한다는 의미에서 충(忠)이 붙은 것입니다.

2. 악행스토리

정말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힘들정도입니다.

첫번째 다뤘던 만력제와 비교하자면, 게으르지는 않습니다. 겁나 성실합니다.
문제는 온갖 쓰레기짓을 하는데 성실하다는 거죠.

기분이 나빠질수도 있는 내용이니 혹시나 비위가 안좋으신 분들은 스킵하셔도 됩니다.







1) 강간
심심하면 나오는게 이 이야기고 대표적 악행이 이거라(...)
멀리 안가시고 위키 백과내용만 봐도 사실 엄청납니다.

5월 병인일,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 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 경화공주(慶華公主)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왕이 배전의 처와 그 동생의 처를 간음하다  | 1343년 3월 13일(음), 1343년 4월 8일(양), 충혜왕(후) 4년
왕이 내시의 처를 강간하다  | 1341년 11월 16일(음), 1341년 12월 24일(양), 충혜왕(후) 2년

위에껀 위키미러에서 갖고 온것이고 밑에건 고려사 출처입니다(...)

뭐 당시에 왕들이야 기본적으로 대를 이을 장손이 필요했으니 어느정도야 눈감아 준다지만
이인간은 정말 심각합니다.

자기 장인의 후처와 아버지의 후처, 즉 새어머니와 장모를 강간하는(....)
일반인으로써는 상상도 못할 짓거리를 하고 다닙니다.(좋은내용이 아니라 글씨체는 작게...)

이런 인간이니 후궁은 물론이고 신하들의 부인, 내시의 부인 가리지 않고 다 건드리고 다닙니다.

 2) 사냥
재위 원년 정월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2월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3월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4월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6월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7월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8월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10월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재위 2년 정월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송명리(宋明理)
등을 데리고 평복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21]
2월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출처 엔하위키미러 충혜왕)

이 사냥 기록이 무려 2년안에 다 이뤄진 일입니다
이러고 나서 폐위당합니다. 사유는 너무 정치를 못해서(그리고 아버지 충숙왕이 복위하지만 사망후 충혜왕이 재복위...)

사냥이라는게 쉽게 말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닌게 왕이 사냥터를 나가면 어마어마한 비용이 소모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냥에 집중하다보면 당연히 국사랑은 멀어지게 됨으로 자제하는게 맞는데 충혜왕은 신나게 사냥다닙니다.

더 황당한건 사냥을 갔는데 일반 백성들 가축들이 약탈당하는 사태가 일어나기도(...)

3) T.O.P

충혜왕에가 사냥이나 강간따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한달에 하루가 멀다하고 잔치판을 벌이는 것 역시 기본입니다.

다음은 고려사에 나와있던 충혜왕의 마지막 해(전체가 아닙니다)에 벌어진 황당한 일들 입니다.

> 왕이 동교에서 탄환으로 사람을 쏘는 장난을 하다  | 1343년 3월 5일(음), 1343년 3월 31일(양), 충혜왕(후) 4년
> 왕이 민천사 누각에서 새를 잡다가 불을 내다  | 1343년 3월 8일(음), 1343년 4월 3일(양), 충혜왕(후) 4년
> 내구를 지으면서 민가와 토지를 강제로 수용하다  | 1343년 3월 9일(음), 1343년 4월 4일(양), 충혜왕(후) 4년
> 왕이 예쁜 처녀를 찾다가 살인하다  | 1343년 4월 24일(음), 1343년 5월 18일(양), 충혜왕(후) 4년
> 맹인과 무녀들을 닦달해 미녀를 구하다  | 1343년 8월 15일(음), 1343년 9월 4일(양), 충혜왕(후) 4년
> 원에 있던 이운 등이 왕의 부도덕한 행실을 고발하자 왕이 그 형을 구타하다  | 1343년 8월 미상(음), 충혜왕(후) 4년
> 밤에 왕이 미행하다가 가노를 때려 거의 죽게 만들다  | 1343년 9월 15일(음), 1343년 10월 3일(양), 충혜왕(후) 4년
> 악소배들이 왕을 사칭하고 유부녀를 욕보이다  | 1343년 9월 28일(음), 1343년 10월 16일(양), 충혜왕(후) 4년

물론 강간이나 잔치나 사냥 등 소소한 내용(???)은 다 뺀 것들입니다(...)

> 원 사신이 왕이 공사판을 마구 벌여 백성을 괴롭힌다고 질책하다  | 1343년 7월 8일(음), 1343년 7월 29일(양), 충혜왕(후) 4년
오죽하면 원나라 사신이 와서 질책하고 갈정도로 막장짓의 향연을 펼칩니다.

4) 잘한 일(?!?!)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이 왕은 상업활동의 진흥과 유통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15] 거기다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16]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17] 왕권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18]이었고 고려정국은 충혜왕파대 친원파로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이같은 정치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세력은 충혜왕의 왕권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정치가 원나라의 고려종속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세력의 정치적 이해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ㅡ 한국사 제19권 고려후기 정치경제편』

엔하위키에서 퍼온 내용입니다.

요점은 권문세족의 권력을 줄이고 왕권을 강화 하려고 했다라는 것인데

이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지 놀려고 한 짓이라고 보여집니다(연산군이 막장으로 가기 직전에 했던 짓이 사화였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3. 결과
처음 2년간도 못해서 원나라로 끌려갔다 4년뒤에 다시 와서는 더 심한 막장짓을 하니 충신들은 물론 간신들 마저도 버텨내지 못합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와 부원배 기철이 원나라 황제에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이 이르렀다. 이 둘이 유명한 간신배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간신배라고 해도 어쨌든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기 때문. (엔하위키펌)

결국 원나라에 끌려갔고, 당시 황제였던 원 순제가 말하길
"네놈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다(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라고 했다고 합니다(근데 죽이진 않고 유배보냄...)

유배중에 충혜왕은 사망합니다. 뭐 원나라에서 독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긴 합니다만

충혜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백성이 만세를 불렀다고 하네요(막장짓의 최후)

마지막으로 고려사를 쓴 사관의 총평입니다.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사람[12]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13]를 챙겼으며 를 도축[14]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죽여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엔하위키미러 펌)

4. 번외이야기

충혜왕 이야기를 하면서 기황후 얘기를 안할수가 없습니다.

고려를 포기하고 나중에 고려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던 기황후에 대한 미화도 미화지만
드라마 만들때 부터 끝날때까지 문제였던건 주진모가 맡은 역할인 '왕유'가 사실상 충혜왕이었다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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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ㄹ도 풍년이다...

저야 드라마를 안봤지만, 이 쓰레기 같은 드라마를 수출까지 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쪽팔림을 금할 수 없습니다.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써 기황후가 성공적으로 끝났다는건 굉장히 우려할만한 일입니다.
이제는 누구를 주인공으로 쓰더라도, 역사왜곡을 하더라도 드라마의 흥행을 보증 할 수 있다는 것이거든요.

지금 기황후가 끝나고 1년정도 지났지만,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것을 아는것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 충혜왕
위키백과 충혜왕
고려사, 고려사절요

역사란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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