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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신백일장] 유진기행
게시물ID : readers_1998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청새치.
추천 : 2
조회수 : 3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5/29 18: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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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그러니까, 어느 이른 여름날이었다. 제대로 된 대학도 진학 못하고 전문학교에서 공부 중이던 나는 재학생 입영연기라는 혜택도 못 받고 꼼짝없이 끌려갈 상황에 처하자 공부 따위는 포기하고 놀아 재끼던 어느 이른 여름날이었다.

 

정확히는 날씨가 이른 여름이었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6월 상순으로, 이따위로 더우면 훈련받을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걱정이 머리를 스쳤지만 귀찮음보다는 무언가 해야한다는 강박에 이끌려 배낭을 싸들고 집을 나왔다.

 

나는 코레일이 남긴 이 시대 마지막 마법 스크롤인 내일로 티켓으로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내일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참 이놈의 나라가 넓긴 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결코 학생이라 벌어놓은 돈도 없고 태어날 때 가지고 나온 수저가 동수저라 입대전 여행인대 해외로 나가지 못한 회한이 일으킨 인지부조화가 아니다. 정말 넓긴 넓었다. 그렇게 전국 곳곳을 싸돌아 다니며 6일째 내가 발을 디딘곳은 유진이라는 곳이었다.

 

그렇다. 내가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무대는 유진이다. 이 글의 제목을 짓자면 유진기행인 샘이다. 정확히는 이 유진의 어느 5일장 이야기이다.

 

그곳은 도시도 시골도 아닌 어정쩡한 동내였다. 사실 그간은 도시와 시골만 다니다보니 내 무의식이 선택한 중도의 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찜질방에서 새벽같이 기어나와 아침 열차를 타고 도착한 유진의 장터에서 나는 실패의 향기를 느꼈다. 정확히 4일전에 장이 섰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다음 5일장은 내일이다. 이 분노를 가라앉히고 싶었으나, 배가 고프니 가라앉힐 힘도 없고, 엄밀히는 가라앉힐 분노도 샘솟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나절에 국밥집 하나는 열어주어서 주린 양 한 마리가 먹을 구멍이 보였다.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이다.

 

그렇게 소머리국밥을 신나게 말아먹고 있자니 슬슬 시야가 넓어지기 시작했다. 아까는 몰랐던 어느 아저씨가 돗자리 펴놓고는 앉아있는 것이다. 나같은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게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학생은 외지서 왔나봐, 저 아저씨는 장날이 아닌날도 와서 앉어있어. 몇 년 됬지 벌써.” 아주머니가 깍두기를 더 담아주시며 말씀하셨다. “처음에는 장날도 못맞추는 병맛장사꾼인줄 알았지 뭐요.”

 

장날이 아닌날의 아침풍경은 지금에서야 묘사하는거지만 삭막하기가 그지 없는곳이다. 지금 열린 이 국밥집도 따지자면 인근 인력사무소 사람들이 주 손님으로, 고개를 둘러봐도 아저씨밖에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아주머니가 좀 더 살갑게 대해주신게 이유가 있긴 한것같다.

 

이 아저씨들도 일 하러 자리를 뜨면 아주머니도 셔터를 내리고 돌아가고, 이 장터에는 오직 한 사람밖에 남지 않는다. 아까 그 병맛장사꾼. 다음 열차시간까지 제법 남았던지라, 그 아저씨에게 다가가기로 결심했다.

 

아저씨 뭐 파세요?” 그는 힐끗 나를 처다보더니만 그대로 고개를 내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튕기는 맛이 아주 소싯적에 여자 여럿 후렸을것만 같다. “... 빨랫방망이.” 한참이 지나야 기는 입을 열었다. 빨랫방망이라, 그거 요즘 쓰기는 하나? 아직 기념품이랄 것도 못챙긴 나로써는 부모님의 , 우리때는 이런거 쓰고 살았다. 느그들은 편한기라!’ 같은 국제시장 아이템을 사가기로 결심하고 아저씨에게 빨랫방망이 하나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가 품속에서 꺼낸 것은 무슨 통나무였다. 그러더니 주머니에서 칼을 하나 더 꺼내서는 깍아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애초애 이 소설이 이따구로 흘러갈지 몰랐던 나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됬습니다. 기차시간이 다 와가니 그만 주십시오.” “내 대답은 잘 알고 있지 않나.” 그렇다 나는 사실 이 노인의 대답을 알고 있다.


나는 분명 기차를 놓칠것이고, 다음 기차를 알아보고 나서야 완성이 될 몽둥이었던 것이다. 아마 집에가면 어머니는 나의 선물 센스를 칭찬하실 것이다. 비록 깍기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속에서 완벽하게 비율을 갖춘 방망이가 보였다. “비록 작은 몽둥이지만, 훗날 크게 쓰일걸세.” 염병.

 

무언가 유체이탈을 한듯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거스름돈과 방망이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대로 중립국으로 갈텐가. 역무원이 내게 행선지를 물었다. ... 아니, 중구로 가는 표 주세요. 대전시 중구요.

 

그렇게 나는 조금 일찍 집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역시 집은 떠나는게 아니었다. 한참이 지나 도착한 대전역에서 나는 어떤 노인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능동형이 아닌 수동형인데 그가 내 앞에 선 것이다. 허리는 굽어가지고 얼굴도 잘 보이지 않는, 거기다 차림새로는 거지같은 노인이었는데 불현 듯 내게 무언가를 쥔 손을 내밀며 말을 걸었다.

 

"황송하지만 이 돈이 못쓰는 것이나 아닌지 좀 보아 주십시오." 맞다. 유진에서 만난 노인의 말이 맞았다. 내 몽둥이가 크게 쓰일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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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장날이 아닌데도 돗자리를 펼치신 분게 바칩니다.(너무 노여워 마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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