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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정권에대하여
게시물ID : history_20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하이얀바람
추천 : 2
조회수 : 1042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7/09 06:02:51
상당히 기분이 얹짢습니다.
아니 한단고기의 대륙백제설때문에 일방적으로 까시는거라고밖에 안보이거든요
근데
나도 대륙백제설은 좀 터무니없다고 보는사람인데
아니 일본신봉자들입니까
고고학이나 역사 공부좀하시분들이라면서요
근데
불과 6,7세기의 야마토정권을 문화적으로나 군사적 모든면에서 강대국으로 생각하십니까?
자고일어나니까 아유사태님이랑 조그마한 언쟁이있었던거같은데
저도 아유사태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리고 야마토정권이라든지 고대 일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계시길래 저렇게 자신감있게 그러시는지모르겠는데 
엘레사르씨 봉건제와 중앙집권체제의 차이를 모른다구요?
그런 개소리는 처음듣는다구요?
그럼 야마토정권이 중앙집권국이라는건가요?
호족세력들의 연합국이라는게 더 정설이라고생각되는데요?
하지만 4세기에서  5세기 6세기초중반의 야마토정권이 중앙집권국이었나요?
그리고 근초고왕때도 전라도에 마한계 부족국가들이 존재하고있었다고하셨죠
일본은그러지않았을까요
아니 그때당시의 일본은 더했습니다. 심지어 백국이라고 불릴정도라고요
그뿐만아니라 전역에 흩어져있던 부족체제의 국가들은 더많았구요 
그때당시 야마토정권은 일본을 다 통일하셨다고 생각하나요?
규슈에서 중앙으로 진출하는시기이고 이즈모를 겨우 누른시기입니다.
더구나 규슈역시 모두 통일한 시점도아니고 

뿐만아니라 야마토정권을 중앙집권국이라기보다 연합국이라는게 맞는 표현아닙니까?
실질적으로 왕이 권력을 확보하게되는 중앙집권체제는 헤이안시대가 맞다고생각되는데요
엘레사르씨 

아유사태// 백제가 피크에 달했을때에 야마토 정권이 일본을 통일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왜는 백제 식민지였뜸ㅋㅋ)도 환단고기가 대중에게 잘팔리니 그것에 부응하여 생겨난 일종의 역사왜곡이지요. 그리고 왜국을 부족국가라 하시면 신라 말기나 고려는 어찌 되는 건지

당신이 말하는 백제의 전성기와 피크가 언제라고생각하시죠
그리고 야마토정권의 전성기와 피크 그리고 규슈진출이 어디쯤이라고보고계시는겁니까
백제의 전성기라고 보면 근초고왕때 4세기에서 4세기 말까지아닙니까
야마토정권이 일본을 통일하게된 시점은 6세기 초중반입니다. 하지만 이 통일이 일본전역 통일이라고생각하나요?
다이카 개혁이후 임신의 난을 거친 6세기말에 중앙집권체제를 확립 했다는게
당신들이 좋아하는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부정하시렵니까? 이때 정비한 다이호 율령반포 역시 부정하셔야합니다.
당신마음대로 그냥 역사책을 만드시지그려십니까
당신이야말로 되도않는 근거없는 주장을 펼치고있지않습니까
전공자와 학도 학자라면 정확한 근거를가지고 문제점만 짚어주세요 엘레사르씨는 그냥 비아냥 거리는 말투로밖에 보이지않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알고들계십시오.
주류를 이루는 문제는 야마토정권은 호족연합국가라고 하지 중앙집권국가라고하지않습니다.
교과서나 주류에서는 4세기 중엽 중앙집권을 형성하였다고하지만 야마토정권이좀 커진 시기라고보지 실질적인 중앙집권국은 헤이안시대부터라고 하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북쪽의 아이누족에 대하여 아시는분이없는 거같은데 아이누족을 논하지않고는 야마토정권을 논할수없다고생각하는데요 진짜 일본의 토착민과 이민족 도래인들에 대하여 제대로 알지못하면서 일본의 전역을 초기 통일한 야마토는 엄청난 강국이라는 주장은 장님이 코끼리 다리만지는 격입니다.

또 한가지 짚고넘어가겠습니다.
야마토국이 백제보다 농업생산량 인구가 훨신많은 대국이었다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말이죠
어디서 이런 주장이 나오는겁니까
일본서기보고 이런주장하시는겁니까
아니 한단고기는 철저히 위서이기때문에 논할수없다고하시는분들이
왜 일본서기는 인정하는거죠?
아 일본서기가아닌가요?
그럼 어디서 그런주장을 펼치시는건가요
일본의 고대사 수수께기라고할수있는
기록이 남아있지않는 이때를 확신하시면서 이야기하고계시는거보면말이죠

고대 농경사회의 농업의 생산량 증대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아시죠
철제농기구의 사용입니다.
맞지않습니까
고대일본의 경우 야요이 시대 대규모 농경을 시작했다고하죠
여기서 쟁점입니다.
4세기5세기초기까지의 고분에서출토되는건 청동입니다.
5세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 금은 철제 갑옷과 철제무기가 나옵니다.
3세기의 일본은 60만명의 인구였지만
8세기에 들어서 일본은 500만명의 인구수라는 추산이나옵니다.
의심스러우면 찾아보세요
즉 철제 농기구의 사용과 농업기술의 전파입니다.
몇몇분들은 백제와 가야 유민의 이주라고 하실텐데 제가 보기엔 넘어간 적정인구는 정말많이 봐야 오륙십만
이는 농업의 생산량의 차이라고봐야겠죠
그래도 너무 짧은시기에 너무폭발적으로 증가했다고보여지십니까
원래인구 60만 도래인구 10만 출생가능 여성인구 25만 남성 25만 으로 보면
25-50-100-200-400-800
하지만 이정도의 인구를 배출 유지하려면 먹고살아야합니다.
이 200년사이의 농업의 엄청난 발전이있었다고봐야하고 우리나라 삼국시대처럼 피터지는 싸움역시 없어야합니다.
물론 저렇게 인구변화가있었다는건 아니고 제가드는 예일 뿐입니다.
즉 이말은 이 3세기에서 5세기 사이 일본의 야마토정권은 백제 또는 가야의 지원과 문물을 받아들였다고보여지는데요
또 이인구수를 유지하기위해선 큰전쟁도일어나선 안됐습니다.
즉 야마토정권은 물론 피튀기는 싸움도했겠지만 호족들의 연합체제라고 보는 근거이기도하지요
다시말해 야마토정권은 백제와가야에 도움을 많이받았고 이런 문물을 받아들이기위해선 몇일의 수업이아닌 유민들을 생각해볼수있고 중앙집권국가보다는 호족연맹국가로 발전했다라는것입니다.

여기서 문제 과연 야마토정권은 백제보다 더 많은 농업생산량과 인구를 보유하고있었냐입니다.
7세기말의 일본이 400만명.(하지만 이것도 오바라는 이야기가 많던데 실질적으로 200~300만명안밖에었다고 하는)
이때가 야마토정권의 절정기 실제 일본의 삼분의 일을 통일

백제는..
여기도 또 문제네요...ㅡㅡ 몇명으로 셈해놔야할지참....
일단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의자왕 20년 76만호를 인용하겠습니다.
약 400만명의 인구(150~200만명정도로 추산된다고하시는분들도많구요)
충청권과 전라권

엄청난 차이죠 
하지만 한가지 야마토정권이 얼마나 많은 인구를 갖고있었냐입니다.
일본전역을 통일한 야마토정권이아닙니다. 누누히 이야기하지만 그리고 영향력을 뻗고있는 지역이라고해도
실질적 통치가 닿지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뭐..알아서들 판단하시겠지만
제가봤을때는 일본전역이라면 모를까 야마토정권자체만으로는 백제에게 안되었습니다.
그리고 왜 300만명밖에 안되냐 라는 이야기를 하실텐데요
선진문물 즉 철제농기구와 농업기술을 받아들여 활용하는 지방은 일본전역이아닙니다.
대규모 농업이 이루어졌지만 그냥 씨뿌려서 농사짓는것과 도랑과 농기구를 사용하는것은 엄청난 차이가있습니다.
백제가 야마토보다 농업 기술이 우위라는건 인정하시죠
그리고 본토와 거리가 있는 시코쿠같은경우에는 10세기까지 부족연맹체제였고 농업이아닌 수렵생활이 주가되었습니다.
일본의 외곽이나 중앙에서 떨어져있던 낙후된지역들은 실제 원주민이라고 불리는게 맞습니다.
그리고 야마토정권의 절정기와 백제의 절정기는 2세기후에 나타납니다.
백제의 절정기때의 야마토정권은 어떨까요 그럼
비교가되겠습니까

아유사태님
게다가 농업생산량이 백제보다 많았다..?
여기가 웃음 코드인가 봅니다..
당시 야마토인들은 농업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수렵과 사냥으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기본 상식은 가지고 주장을 합시다..
깔려고 해도 뭐 기본 상식은 가지고 해야 되는데 무조건
이 사람 의견을 까야 자신이 똑똑해 지는 줄 착각하는
위인들이 디씨에서 오유에 많이 유입된 모양입니다..
그런 분들은 좀 제발 디씨로 가서 노시길..

이부분에 대해서도 저도 문제가있다고생각합니다.
모든 야마토인들은 농업에 문제가 있지않았다고생각이듭니다.
폭발적인 인구증가의 원인을 농업이라고 생각하는 만큼이죠
하지만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한 대부분 일본지역은 씨뿌리기 농업이나 수렵으로생활을 했다는건
동감입니다.

그럼 또 고분을 갖고 들어오시는분들이있겠죠?

그 대규모고분은 설명할길이없어요
저는
몰라요
어찌 알아요 제가 100만명을 동원해서 엄청난 노동을 해야하는 그런 고분을 
100년 200년 300년 정도 걸린 노동의 결과라고밖에 전 말못해요
그냥 제생각이라구요
그렇다고 고분만드는데 100만명의 노동인구가 드니까 하층민이 최하 백만명이상인데
그러면서 인구트집잡기않길바래요

고분을 보면 백제 가야 고구려 등등 영향을 받았다는걸 알수있어요
유물 들을 보면요
그렇지않나요
야마토정권이
백제의 속국이었다라는건 저도 믿지않습니다.
왜냐 중앙집권국도아닌 야마토국을 속국으로 다스린다는건 좀 어불성설같거든요
호족연합국가를 속국으로 둘바에는 차라리 쓸만한 소국하나골라서 정벌전쟁으로 도움을 주어 속국삼는게 편할테니까
하지만 그때의 야마토정권을 일본서기같은 사서로 판단 강대국을 만드는건
더욱 못참겠습니다.
가야와 긴밀한 관계이고
백제역시 많은 문물을 전파해준나라입니다.
그리고 속국이라는 표현보다는
제가봤을때 아랫나라 정도로 백제는 야마토를 보고있었다고 보여지구요
실제로 야마토의 호족들은 백제의 옷 무기 불교적인 양식까지 빼다 박았으니까요

그리고 야마토의 한계를 한번더 설명해보자면
광개토대왕의 원정군이 백제 가야 야마토국의 삼국연합군을 가볍게 물리친 사건이있죠
그리고
백제부흥운동에서 백강구전투
왜 야마토에서 세번에 걸쳐 4만명이나 병력을 파병하였을까요
일본은 백제를 후견국으로 생각하네 임나일본부를 회복하네 어쩌네 라는 식으 미화를 적용합니다.
하지만
6세기중엽 정권을 잡고있던 모노노배씨와 대립구도를 형성한 소가씨는 백제계 도래인과 결탁모노노배노씨를 멸망 정권을 잡는 모습을보여줍니다. 백제계 도래인들은 이미 야마토정권에서 큰 힘을 갖고있는걸로 판단되는데요 이는 야마토정권은 백제에 적지않는 영향을 받고 또 친 백제계가 자리를 잡고있다는겁니다. 

야마토에서 백강구전투에 병력을 파병하는데 지휘권이라든지 굳이 신라 본토보다 백제부흥군을 지원했던 사실까지 한반도 침공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부흥군이 있고 잔존세력이 판치고있다지만 나당연합군이 있던 백강구로 진출 할필요가있었을까 하는 고찰입니다.
경상도나 전라도 남부지방이 오히려 더이익으로 보이는데 말입니다.
또한 가야멸망과는 또다른 모습을 백제멸망에는 보여주는다는점 역시 야마토정권이 친백제계 성향이 강했다는건 공부좀하신분들이라면 부정할수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친백제계의 야마토정권이 불과 4만의 병력을 파병으로 끝을 낼수밖에없는
야마토의 한계를 시사한다고생각하지는않으십니까?

당신들 말대로라면
임나일본부역시
일본의 개소리가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가될수도있습니다.
엘레사르씨야말로 말도안되는 억지성 발언이 아닌 공부좀하고 이야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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