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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정경유착 일화
게시물ID : sisa_20030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rlqnswhgek
추천 : 0/2
조회수 : 887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2/04/28 19:10:41
1970년대 초 어느 날. 청와대에 정주영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앉아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오래 동안 흘렀다. 박 대통령이 담배를 하나 피워 물고 정주영에게도 하나를 권했다. 정주영은 원래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배도 안 부르는 담배를 왜 피우느냐’고 생각한 ‘근검절약’ 정주영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정주영에게 크게 화를 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박 대통령이 불을 붙여준 담배를 뻐끔뻐끔 피웠다. 
 
박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경제 총수 부총리가 적극 지원하겠다는데, 그거 하나 못하겠다고 여기서 체념하고 포기해요? 어떻게 하든 해내야지. 그저 한번 해보고는 안 되니까 못하겠다니 그런 게 있을 수 있소?”
정주영도 1960년대 말 조선소를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건 몇 년쯤 뒤였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에게 압박 아닌 압박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는 있었다. 포항제철이 완성되는 시기였다. 포항제철에서 생산하는 철을 대량으로 소비해줄 산업이 필요했다. 당시 김학렬 경제부총리는 정주영에게 조선 사업을 권유했다. 정주영은 삼성 이병철에게 거절당한 뒤 정주영에게 튕겨왔다는 얘기도 들었다.
 
결국 정주영은 결심한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못할 것도 없지. 그까짓 철판으로 만든 큰 덩치의 탱크가 바다에 떠 동력으로 달리는 게 배지, 뭐. 배가 별거냐.”
어렵고 힘든 일을 부딪치면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정주영의 주특기가 발휘된다. 정주영은 조선업자로 조선소 건설을 생각한 게 아니라 건설업자로서 조선소 건설을 생각했다. 배를 큰 탱크로 생각하고 정유공장 세울 때처럼 도면대로 철판을 잘라서 용접을 하면 되고, 배의 내부 기계는 건물에 장치를 설계대로 앉히듯이 도면대로 제자리에 설치하면 된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에는 우리나라는 조선소를 지을만한 돈이 없었다. 대형 조선소를 지으려면 차관을 들여와야 했다. 정주영도 나름 이곳저곳 뛰어다녔다. 일본에도 가고 미국에서 갔다. 그렇지만 아무도 정주영을 상대해주지 않았다.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 “너희 같은 후진국에서 무슨 몇십만톤의 조선소를 지을 수 있냐?”는 식이었다.
 
그리고 정주영의 모험은 시작된다. 3번에 걸친 관문을 뛰어 넘어야 했다.
당장 필요한 건, 돈이었다. 일본과 미국에서 외면을 당한 정주영은 영국 은행의 문을 두드렸다. 영국은행 버클레이즈와 협상을 벌였으나, 신통한 반응이 없었다. 돈을 빌리기 위해선 영국식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필요했다.
정주영은 1971년 영국 선박 컨설턴트 기업인 A&P 애플도어에 사업계획서와 추천서를 의뢰했다. 타당성 있는 사업계획서와 추천서가 있어야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주영은 차관 도입이라는 난제와 승부를 내기 위해 런던으로 날아갔다. 정주영에게는 조선소를 지을 울산 미포만의 소나무가 서 있는 황량한 모래사장을 찍은 흑백 사진이 전부였다.
  
그는 A&P 애플도어의 찰스 롱바톰 회장을 만났다. 롱바톰 회장 역시 상황이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했다. “아직 배를 사려는 사람도 나타나지 않고 한국의 상환능력과 잠재력도 믿음직스럽지 않아 힘들 것 같다.”
정주영은 문득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500원짜리 지폐가 생각이 났다. 지폐 그림은 바로 거북선이었다. 주머니에 꺼내 거북선 그림의 지폐를 테이블에 펴놓았다.
“이걸 보세요. 우리의 거북선이오. 당신네 영국의 조선 역사는 1800년대부터라고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우리가 당신네보다 3백년이나 조선 역사가 앞서 있었소.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우리의 잠재력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소.”
롱바톰 회장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현대건설이 고리원자력 발전소를 시공하고 있고 발전계통이나 정유공장 건설에 풍부한 경험도 있어 대형 조선소를 지어 큰 배를 만들 능력이 충분하다는 추천서를 버클레이즈 은행에 보내주었다.
첫 번째 관문의 통과였다.
 
며칠 안 돼,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 담당 부총재가 점심을 하자는 연락이 왔다. 점심 약속 하루 전 정주영은 호텔에서 초조와 불안 속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만사 제쳐놓고 관광이나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는 현대건설 사람들과 셰익스피어 생가와 옥스퍼드대를 둘러보고, 낙조 무렵에는 윈저궁을 보았다.
이튿날, 정주영은 우아한 은행의 중역 식당으로 안내됐다. 자리에 앉자마자 버클레이즈 은행의 해외담당 부총재가 물었다.
“정 회장의 전공은 경영학입니까? 공학입니까?”
소학교만을 졸업한 정주영은 짧은 순간 아찔했다. 그러나 태연하게 되물었다.
“우리가 당신네 은행에 낸 사업 계획서를 보았습니까?”
“봤습니다.”
정주영은 순간적으로 전날 관광하다가 옥스퍼드대 졸업식을 본 생각이 났다. 
“어제 내가 그 사업계획서를 들고 옥스퍼드대에 갔더니, 한번 척 들쳐보고 바로 그 자리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주더군요.”
정주영은 구질구질하게 자신이 학력을 짧지만 사업경험은 누구보다 많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배포를 보여주는 유머를 내던졌다.
부총재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옥스퍼드대 경영학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도 그런 사업계획서는 못 만들 거요. 당신은 그들보다 훌륭합니다. 당신의 전공은 유머 같소. 우리 은행은 당신의 유머와 함께 당신의 사업계획서를 수출보증국으로 보내겠소. 행운을 빌겠소.”
물론 정주영의 유머 한 마디가 차관을 이끌어 낸 건 아니다. 부총재가 정주영을 만나자고 한 건, 자신들이 빌려줄 돈으로 조선소를 만들려는 CEO의 됨됨이를 보기 위해서였다. 부총재는 그런 식의 만만한 자신감을 갖고 있는 CEO라면 대출을 해도 될 것이라고 최종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정주영이 은행 쪽으로부터 오케이 사인을 받은 건, 치밀한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재로 현대건설은 치밀한 사업계획서를 만들었고, 그 치밀함을 인정한 은행이 대출을 해주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은행 쪽은 관계자들을 우리나라에 보내 현대가 건설한 화력 발전소,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두 번째 관문의 통과였다.
 
그러나 마지막 관문이 남아 있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가장 어렵고 힘든 관문이었다.
현대건설은 마지막 심사를 받아야 했다. 영국은행이 외국에 차관을 주려면 영국 수출신용보증국(ECGD)의 보증을 받아야 했다.
수출신용보증국 총재는 배를 살 사람의 계약서를 갖고 와야 승인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만약 당신네한테 배를 주문할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되는 거요? 내가 배를 살 사람이라면, 작은 배도 아니고, 4~5천달러 짜리 배를 세계 유수의 조선소들을 다 제치고 선박 건조 경험도 전혀 없는 당신네 배를 사지는 않을 거요. 당신네가 배를 만들 수 있다 해도 사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원리금을 갚을 거요? 그러니까 배를 살 사람이 있다는 확실한 증명을 내놓지 않는 이상 나는 이 차관을 승인할 수 없소.”
정확한 지적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너무나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 가난한 나라에서 배를 만든다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배를 만든다고 해서 그 배를 믿고 사갈 사람은 없어보였다.
 

 
정주영은 울산 미포만의 황량한 바닷가의 사진을 꺼내 보았다. 자신처럼 정신 나간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날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조선소에서 만들 배를 사줄 선주를 찾아 나섰다.
“당신이 이런 배를 사준다고만 하면 내가 영국에서 돈을 빌려 이 백사장에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주겠다.”
미친 사람 취급당하기 딱 좋은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다. 선박왕 오나시스의 처남이었던 그리스의 리바노스였다. 리바노스가 미포만 백사장 사진만 보고 계약했다. 리바노스는 파격적으로 정주영과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정주영 역시 그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었다.
“틀림없이 좋은 배를 만들어 주겠다. 배값을 싸게 해주겠다. 만약 약속을 못 지키면 계약금에 이자를 얹어주겠다. 계약금은 조금만 받겠다. 우리가 배를 만드는 진척상황을 봐서 조금씩 배값을 내라. 우리가 만든 배에 하자가 있으면 인수를 안 해도 좋고 원금은 다 돌려주겠다.”
정주영은 리바노스가 보낸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에 있는 그 사람의 별장에 가서 유조선 2척을 주문받았다.
마지막 관문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준비 작업이었다. 앞으로 배를 만드는 조선소를 짓고, 그 조선소에 다시 배를 만들어야 했다. 정주영은 다시 창의력을 발휘한다.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드는 게 아니라 조선소와 배를 동시에 만들기로 한 것이다.
“조선소는 조선소이고 선박건조는 선박건조다. 반드시 다 지어진 조선소에서 선박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법 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
정주영은 처음부터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병행해서 진행시켰다.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 2척을 만들면서 동시에 방파제를 쌓고, 바다를 준설하고, 안벽을 만들고, 도크를 파고, 14만평의 공장을 지었다.
거의 모든 직원들이 새벽에 일어나서 여기저기 고인 웅덩이 물에 대출 얼굴을 씻고는 일터로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구두끈도 못 푼 채 자고 배를 만들었다.
 
정주영도 거의 울산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 어김없이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갔다. 이른 새벽 집을 나서 남대문 근처를 지날 때면, 부부가 그날 팔 물건을 리어카에 싣고 남편은 앞에서 끌고 아내는 뒤에서 밀며 길을 지나가는 것을 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정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목이 뜨끈해졌다. 불과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에도 그렇게 열심히 일해야만 생계를 꾸려갈 수 있고 자식을 키울 수 있는 것이 그 사람들의 엄숙한 현실이고 삶이었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이들의 삶이 다 그 자리에서 나름대로 진지하고 엄숙한 것이다. 얼마 안 되는 하루벌이를 위해서도 저토록 필사적으로 열심인데…….”
정주영은 그들에게 마음에서 우러나는 유대감과 존경심을 많이 느꼈다고 했다. 그때마다 ‘그래 다 같이 노력해서 하루빨리 잘사는 나라를 만들어야지’하는 생각으로 불끈 힘을 얻고는 했다.
 
건조 능력 70만톤, 부지 60만평, 70만톤급 드라이 도크 2기를 갖춘 국제 규모의 조선소 준공을 본 것이 1974년 6월. 기공식을 한 1972부터 2년3개월만이었다.
 
현대조선은 그렇게 세워졌다. 그리고 한창 잘나가는 듯 했다. 하지만 곧바로 위기가 찾아왔다. 1973년 불어 닥친 오일쇼크였다. 오일쇼크로 배를 주문했던 사람들이 배를 가져가지 않겠다는 취소가 잇따랐다. 현대조선이 만든 배 가운데 세척이 울산 앞바다에 떠 있었다. 그 중 한 배는 리바노스가 주문한 배였다.
현대조선이 휘청할 수도 있는 위기였다. 정주영은 또 다시 역발상을 한다. “만들어 놓은 배를 가져가지 않으면, 우리가 그 배를 갖고 새로운 사업을 하면 된다.”
정주영은 1976년 3월 골칫거리였던 해약당한 초대형 유조선 3척을 갖고 아세아상선을 설립해 해운업에 진출했다. 우리나라에 수입해 쓰는 기름을 우리가 우리 유조선으로 운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우리나라에 기름을 실어 날렸던 외국 선박회사들은 수송 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1400만달러를 요구했다. 정주영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야 자기네들 사정이지. 그 동안은 우리한테 유조선이 없어 자기네 배를 돈 주고 빌려 쓴 것이지. 이제부턴 우리나라 배로 우리나라 기름을 운반해다 쓰겠다는데 그런 요구는 받아들일 수 없다.”
정주영은 버텼다. 8개월을 버텼더니 3백만달러로 떨어졌다. 그래도 버텼다. 결국에는 10원도 건네주지 않고 기름을 운송할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했던 아세아상선은 지금 현대상선이 되었다. 오일쇼크로 몹시도 정주영을 힘들게 했던 현대조선은 요즘 잘 나가는 현대중공업이다.
다 만들어진 배를 안 찾아가려고 떼를 썼던 리바노스. 그러나 정주영은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했다. 어쨌든 황량한 모래벌판 사진 한 장을 보고 배를 주문해 난감했던 차관 도입의 물꼬를 터주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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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겨레 블로그

http://b1og.hani.co.kr/june/32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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