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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 암군 & 폭군 열전 - 4. 진 혜제
게시물ID : history_200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프로여행러
추천 : 13
조회수 : 3162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5/03/15 18:58:15
안녕하세요

요새 여러모로 바빠서 미루고 미루다 오랜만에 글씁니다 ㅎㅎ;;

오늘의 역사속 암군(이번엔 폭군이라고 하긴 좀 애매한)은 진 혜제 입니다.

1. 진 혜제(사마충)

(魏) 황조의 상국이자 서진의 고조 선황제(高祖 宣皇帝)인 사마의의 증손자이면서, 서진을 건국한 사마염의 차남이다. 사마염이 290년에 죽자 나이 28세에 즉위하였다.

사마충은 본디 능력이 떨어지고 학문에 뜻이 없어 사마염의 동생이자 사마충의 숙부인 제왕(齊王) 사마유가 사마충 대신 제위를 이어야 한다는 여론이 있을 정도였다. 즉위한 후에도 황제로서의 능력을 갖추지 못해 국정 운영을 장악하지도 못하고 부인인 가충의 딸 황후 가남풍의 실세만 확대되어 외척의 힘이 거대해졌다. 팔왕의 난까지 벌어져 서진은 통일한 지 반 세기도 되지 않은 기간에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광희(光熙) 원년(30611월 떡을 먹고 체하여 현양전(顯陽殿)에서 붕어하였다. 향년 48세로, 태양릉(太陽陵)에 안장되었다. 일설에는 사마월(司馬越)이 짐살한 것이라고도 한다.(위키백과)


2. 이전 이야기...

흔히들 많이 보시는 삼국지의 엔딩은 조조도, 유비도, 손권도 아닌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염이 통일하는 것입니다(스포...?)

그런데 사마의의 손자이자 똑똑한 아버지(사마소)를 둔 사마염의 통일 후 행적은 왠만한 폭군 뺨칩니다.

그 중에서도 이인간이 가장 빛을(?)발하는 부분은 사치입니다.

1. 당시 인구가 2천만 명 정도인데 1만여 명의 처녀를 잡아와서는 몽땅 후궁으로 만들고 누구를 골라잡아 밤을 즐길지가 애매하니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니들 맘대로 가라'라고 한 뒤 멈추는 데를 골라잡아 지낸 것이 유명(삼천궁녀 따위)
2. 신하를 지방관에 임명할 때 한 사람은 사치벽이 심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임명을 하지마...). 이에 사마염은 '사치가 심하면 좋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라며 사치벽이 심한 신하를 임명했다.(...)
3. 신하들 중 하나가 사마염을 환제와 영제와 대놓고 비교 할정도로(둘다 사치가 심했던 황제). 이 신하의 모가지를 날리는 대신에 '환제와 영제는 이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짐에게는 직언하는 신하가 있으니 내가 그들보다 낫다.'라고 웃어 넘겼다고 한다.

물론 당시 서진이 황제보다는 신권이 강력했다는 주장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 사치가 용서가 되는건 아님...

무엇보다 지 아들의 멍청함을 모르고 다음 황제자리 넘겨준게 가장 큰 실책입니다.(+ 태자비 가남풍...)

3. 악행스토리

음... 사실 진 혜제는 굳이 악행이라고 할껀 별로 없습니다. 어찌보면 굉장히 불쌍한 인생을 살다간...

다만 역사서든 야사든 한 단어로 통일됩니다.

바보

즉 황제의 재목 자체가 아니었습니다.(이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지만 생략하기로...)

대표적인 말도 안되는 발언을 꼽자면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린다는 말을 듣자 "곡식이 없으면 어째서 고기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라고 했다(무려 출처가 진서 혜제기와 자치통감)
-밤에 공부하는데 개구리가 울자 저 개구리들이 공적으로 울까? 사적으로 울까?라고 생각하는 등 엉뚱한 쪽으로 생각을 했다.(이정도면 애교)

오히려 악행이라기 보단 주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1. 문벌 귀족들이 끊임없는 사치레이스를 펼침. 이 정도가 굉장히 심했음

황제부터가 이 모양이니 나라 꼴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당장 문벌귀족들의 사치와 축재, 권력형 부정부패로 나라 말아먹기 선수권 대회(...)를 시작했다. 승상 하증은 하루에 1만 전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을 게 없다며 징징거렸고, 사마염의 사위 왕제는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 고기를 사마염에게 대접하는가 하면 낙양 한복판에 말 기르는 사육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건 새발의 피로, 이 시대 사치의 끝판왕은 역시 왕개와 석숭의 돈지랄 레이스. 왕개는 왕원희의 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고, 석숭은 위에서 이야기한 석포의 막내아들인데,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집을 산초로 칠하면 왕개는 집을 주사로 칠했다.(...) (엔하위키 펌)

2. 지 마누라가 난을 일으킴... 그리고 주지육림 오픈...
 
우선 가남풍은 양준을 꼬드겨서 형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초왕(楚王) 사마위(瑋)와 양주의 군권을 잡고 있던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允)을 불러들인 뒤, 순식간에 양준을 반역자로 선포하고 사마위와 사마윤으로 양준과 양씨 일족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 남은 두 고명대신인 사마량과 위관이 정권을 넘겨받자, 다시 사마위를 꼬드겨서 이들마저 제거한 뒤 그 죄를 물어서 사마위까지 토사구팽해버렸다.

남편인 황제는 어리석은 백치였으므로 정치는 모두 가남풍이 대신했으며, 밤 생활도 황제는 고자처럼 혼자놀이를 시키고 저잣거리의 미소년이나 절륜한 무관, 궁중 의원들과 놀아나며 음란한 사생활을 즐겼다. 미소년들은 밤에 몰래 거리에서 보쌈해와서 침소로 데려와 즐긴뒤 바로 목졸라 죽여서 상자에 넣어 에다 버리곤 했다고 한다.(엔하위키)

3. 그래도 정치는 똘똘한 신하인 장화가 맡아서 그나마 안정은 되었다고...
수년 동안 암군이 즉위해 있는데도 조야가 안정되었으니, 장화 등의 공이었다. 數年之間,雖闇主在上,而朝野安靜,華等之功也。─ 자치통감

4. 가남풍의 미쳐 날뜀을 보다 못해 왕족들이 난을 일으킴(팔왕의 난인데, 복잡해서 밑에 설명으로 대신...)
그러니까, 291년 이래로 대략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엔하위키펌... 이게 제일 정리가 잘됬더군요)

결론적으로 사마충은 한게 없습니다.
다만 황제의 자격이 없는 사람이 황제자리에 올라가니 당연하게도 나라는 개막장화...

4. 결과

가남풍의 난과 이후에 팔왕의 난까지 겹치면서 당연히 나라꼬라지는 개판이 됩니다.

이런 상황이니 이민족들이 만만히 보기 시작합니다.(사마충 사후)

결국 흉노의 족장인 유연이 쳐들어와서 진나라를 털어버립니다(영가의 난)
참고로 유연은 성도왕 사마영 휘하였는데 이런 장수가 무려 중국 통일국가를 털정도면...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유연은 진나라를 점령하고 전조를 건국하지만....

이후 개판이 되어 5호 16국 시대라는 긴 혼란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5. 번외 이야기

위에서도 썼다시피...

사마충에게 폭군이란 타이틀은 매우 과분한(???) 타이틀입니다.
암군 of 암군에 가까운 인물이지요.

거기에 어찌보면 본인은 한것도 없으니(사치를 즐기기를 해... 권력을 휘둘러보기를 해...)
어찌보면 불쌍하긴 합니다.

다만 사마충 사례에서의 교훈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자격이 없을 정도로 멍청한 사람이 된다면
그 여파는 나라 전체에 미치게 되고 심한 경우 나라가 멸망한다는 점

이라고 생각됩니다.

출처
엔하위키 미러 - 서진, 사마염, 사마충, 가남풍, 팔왕의 난, 영가의 난
위키백과 서진 혜제
자치통감

역사란 현재와 과거 간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E.H. Car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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