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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중편,브금]가끔은 이질적인 세계 - 고양이 무덤 上-
게시물ID : panic_1990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tarDream
추천 : 10
조회수 : 223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9/26 00:06:52
가끔은 이질적인 세계 sometimes strange world 고양이 무덤 새벽 늦은 시간, 나는 정신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을 만큼 형편없이 취한 채로 택시에서 내렸다. 내가 내린 곳은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나는 택시를 타고 오면 항상 이곳에 세워달라고 한다. 그때도 나는 아마 만취한 상태에서 그곳을 말했던 것 같다. 그것은 본능적인 행동이었으리라. 나는 폭이 짧은 횡단보도를 아슬아슬하게 건너가고 있었을 것이다. 반대편엔 문 닫은 제과점과 세븐 일레븐이 보이고 그 길을 따라 우회하다보면 아파트 단지로 이어져있는 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다 보면 단지 내로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아치형 출입문이 나오는데 나는 아마도 그곳을 지나 내가 사는 동으로 들어가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나는 3차까지 가는 과로한 음주로 인해 어느 정도 필름이 끊긴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늘 그래왔듯이 나는 만취한 상태에서도 집까지 잘 찾아가곤 했다. 그것은 마치 꿀벌이 제 집을 찾아가는 것처럼 어떤 신비한 방향감각에 의해서였던 것 같다. 출입문을 지나 보도블록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에 작은 놀이터가 하나 나오는데, 그 놀이터에서 조금 더 가다보면 테니스 코트가 나오고, 그곳에서 30미터 정도 아래쪽에 있는 동이 바로 내가 사는 아파트였다. 나는 그곳 6층 602호에 살고 있다. 그 건물 바로 옆에는 7층 높이만한 작은 산이 하나 있는데, 그 꼭대기에는 쉴 수 있는 정자도 하나있어서 근처 주민들이 산책로로 자주 이용하곤 했다. 하지만 밤에는 젊은 연인들이 요상한 짓거리를 일삼거나 불량스런 학생들이 술을 마시기 위해 산을 오르는 경우가 있어서 밤 9시 이후에는 출입을 금지시켜놓았다. 때때로 늦은 밤, 그러니까 그때처럼 술을 마셨거나 회사에서 야근이 있을 때,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무심코 그 산을 바라보게 되면 나도 모르게 소름끼치는 상상을하게 될 때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가끔 산에서 들리는 기분 나쁜 고양이 울음소리나 희미한 담뱃불 같은 것들을 보게 될 때면 일부러 서둘러 걷곤 했었다. 그만큼 나는 좀 심약한 남자였다. 하지만 취기가 머리끝까지 올라 겁을 상실해버린 상태에서는 그런 공포감마저도 마비되어버리곤 했다. 한번은 술을 먹고 이런 일이 있었다. 온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차갑고 머리가 지끈거려서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눈을 떠보니 글쎄 내가 산꼭대기 정자에서 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전날 밤, 술에 취한 상태에서 출입문을 넘어 이곳 정자까지 걸어 올라와 마치안방에서 자는 것처럼 양말과 양복 상의까지 벗어놓고 잤던 것이다. 밤새 얼어 죽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나는 그날이후로 그 산만 쳐다보면 어떤 불길한 생각에 사로잡히곤했다. ' 내가 만약 그때 저곳에서 얼어 죽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영혼은 자기가 죽은 장소를 떠나지 못한다는데, 나는 어쩌면 저 음침한 산을 떠도는 원귀가 됐을지도....... ’ 그런 불길한 생각이 들자 나는 점점 더 그 산을 멀리하게 되었고, 이제는 쳐다보는 것조차 싫을 정도였다. 하지만 늘 산은 거기에 있었고 그 거대한 크기는 가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좋든 싫든 간에 어쩔 수 없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 산을 또 보게 되는것이다. 그때 만취한 상태에서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게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 음침한 산 아래쪽공터에 두 남녀가 서있는 모습이었다. 남녀는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언성이 높은것으로 봐서는 서로 싸우는 듯 했다. 나는 그들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으면서 아파트 입구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도 아마 나의 존재를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집에 간신히도착한 나는 쓰러지듯 거실 소파에 누워 그대로 오후 늦게까지 잠이 들어버린 것 같다. 오후 늦게 눈을 떴을 때, 난 머리가 깨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꼈고 한동안 숙취로 인해 고생을 좀 해야 했다. 내가 그 날 그렇게 술을 마셔댔던 것은, 굳이 이유를 대자면, 여자문제때문이었다. 3년 동안 사귄 그녀, 희경과 헤어지는 것이 그렇게 힘들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막상 이별통보라는 것을 받고 보니 왠지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그녀를 증오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막상 술이 들어가고 나니 내 입에서 희경에 대한 욕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나쁜 년, 개년, 빌어먹을 년, 나는 그런 욕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더욱 비참해 불이라도 삼켜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숙취가 어느 정도 가시고 나자, 다시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떠나간 것만 있을 뿐. 나는 그렇게 내 자신을 위로하며 지겨운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 던 중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바로 내 아래층에 사는 남자였는데, 여기선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아 그냥 ‘502호 남자’ 라 부르기로 하겠다. 내가 그를 만난 곳은 집근처 싸구려 칵테일 바에서였다. 나는 그곳을 일주일에 한 두 번 정도 들르는데, 항상 마티니만을 마신다. 다른 것은 절대로 입에 대지 않는다. 나는 그런 점에서는 고리타분할 정도로 보수적이다. 그곳은 손님도 별로 없고 장사도 잘 안 되는 집이라서 갈 때마다 늘 기분이 좋았다. 나는 사람이 많고 장사가 잘 되는 집엔 가지 않는 편인데, 그런 곳은 시끌벅적하기만 할 뿐 이야기 거리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곳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감춰둔 속사정이 있기 마련이라서, 그들은 뭔가 말 못할 사정을 들고 들어와서는 이 테이블 바에 앉아 진(GIN)이나 마티니 따위를 마신다. 그리고 걸쭉하게 취할 정도가 되면 바텐더에게 이런 저런 사정들을 털어놓곤 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내가 슬쩍 옆으로 다가가 말이라도 걸게 되면 그들은 물 만난 고기처럼 자신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털어놓곤 한다. 그것이 바로 술의 힘이고 내가 이 허름한 칵테일 바를 찾는 이유였다. 그러다 뜻밖에도 나는 내 이웃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꽤 학식이 있어 보이는 남자였는데, 무슨 근심이 있는지 문을 열고 들어올 때부터 그의 머리 위엔 먹구름이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는 진을 두잔 마실 때 동안 감자 칩을 무려 세 번이나 리필 했다. 그래서 바텐더의 머리위에도 곧 먹구름이 생기려하고 있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감자 칩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류의 인간은 아예 상종조차 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그때 몹시 말동무가 필요했으므로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할 용의가 있었다. 나는 구렁이처럼 그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때 이미 나는 마티니를 세 잔 마신 상태였다. “ 감자 칩 좀 같이 먹읍시다. ” 그는 뿔테 안경 너머로 나를 쳐다봤다. 그런 촌스런 안경을 쓴 사람은 아마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 마음대로 하쇼. ” 나는 넉살 좋게 그의 접시에서 감자 칩을 몇 개 집어먹었다. “ 머리 위에서 비 내리겠수다. ” “ 뭐요? ” “ 비 말이오. 비, 장마, 태풍, 폭우....... ” “ 감자 칩이나 드쇼. 아님 술이나 더 시키던가. ” “ 술을 마셔야겠군. 어이, 바텐더, 여기 술 좀 채워 줘. 이 양반 것도. ” “ 댁이나 드쇼. ” “ 감자 칩 먹은 보답은 해야지. ” 그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 나서 콧방귀를 뀌었다. 하지만 바텐더가 따라주는 술은 마다하지 않았다. 그도 내가 싫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술이 들어가자 더욱 능구렁이 같은 친근감으로 그에게 접근했다. 나는 직접적으로 묻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보다 나이가 약간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말투나 행동, 옷차림 등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었다. 술이 그의 경계심을 느슨하게 만들자 우리의 대화는 기름을 바른 것처럼 매끄럽게 진행되어갔다. 그러다 그가 바로 나의 아래층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나는 이 뜻밖의 우연에대해 신기해하며 즐거워했다. 도시에서는 이 정도의 일에도 놀라게 되는 것이다! “ 뭐해 먹고사쇼? ” 내가 그에게 물었다. “ 프리랜서 작가요. ” “ 히야, 그것 참 대단해 보이는군. 주로 뭘 씁니까? ” “ 쓸데없는 것들. ” “ 소설이나 시나리오? ” “ 아직은........ 지금은 그저 밥 벌어먹는 글을 쓰는 중이요. ” “ 예를 들어? ” “ 여행, 음식, 영화, 음악...... ” “ 그게 왜 쓸데가 없는 글이지? ” “ 내가 보기엔 그렇다 이거지. ” “ 읽는 사람이 있다면 쓸데없는 글이 아니지. ” “ 그런 걸 읽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짓이라오. ” “ 하하하, 당신이 한 말 중에 그게 제일 웃겨. ” “ 이봐 미리 말해두는데, 난 동성엔 관심 없어. ” “ 그것 참 슬프군....... ” 우린 그 외에 몇 마디 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아주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처음에 야구 얘기를 꺼냈다가 그가 야구를 잘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얼른 화제를 축구로 바꿨다. 하지만 그는 별로 스포츠를 좋아하지 않아 우리의 대화는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군대에 대한 얘기는 아마 남자들끼리 죽을 때까지 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허나 오늘만큼은 그 군대에 관한 얘기도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그때 나는 문득, 왜 그런지는 몰라도 머릿속에 그 음침한 산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라 도저히 그것을 지워버릴 수가 없게 되었다. “ 형씨, 혹시 그 산에 올라가 본 적 있소? ” “ 뭐요? ” 나는 그때 취기가 오른 상태에서도 그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아파트 옆에 있는 산 말이요. ” “ 그게 뭐 어떻다는 거요? ” 그는 약간 언짢은 표정으로 말했다. “ 아아, 그냥 가본 적 있는지 궁금해서. ” “ 가 본적 있소. 왜? ” “ 그 산을 보면 뭔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 “ 뭐가 떠오른단 말이요? ” “ 무덤 말입니다 무덤. ” “ 허...... 별 미친 소릴 다 듣겠군. ” “ 전에 어떤 꼬마한테서 들은 얘긴데, 이곳 주민들이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가 죽으면 그곳에 갖다 파묻어 버린다더군. ” “ 그럼 개는? ” “ 여긴 개는 못 키우지 않습니까? 그래도 고양이는 덜 시끄러워서 좀 봐주던데. ” “ 고양이도 밤에 운다오. ” “ 그런데 신기하게도 고양이 때문에 민원 들어 온 건 한 번도 없었죠. ” “ 이곳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하나 보지. ” “ 그러니까 더욱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 “ 왜 사랑하던 애완동물을 그런 곳에 묻어 버리겠소? 재수 없게..... ” “ 살아있을 때나 애완동물이지. 죽으면 쓰레기에 불과하니까. 뭐 아무튼 그런 저런 이유로 그 산은 영 재수가 없단 말씀이야. “ “ 왜? 귀신이라도 나온 답니까? ” 나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얼굴 너머로 무언가 감추고 있는 것이 보였지만 거기에 대해선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 귀신은 사람이 죽어야 나오죠. 거기에 시체가 있다면 또 모를까. ” “ 시체? ........ 흥 ” 그는 비웃음인지 경멸인지 모를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들고 있던 진을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지갑을 꺼내 지폐 몇 장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시간은 이제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 벌써 가는 겁니까? 아직 이른데..... ” “ 한잔 더하고 싶소? ” “ 물론 ” “ 그럼 갑시다. 우리 집에..... ” “ 집? ” “ 왜요? 안 내킵니까? ” “ 뭐, 못 갈 것도 없지. 어차피 아래층이니까. ” “ 집에 버본 위스키가 있을 거요. ” 나는 그와 함께 502호로 향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502호의 집 구조는 나의 집과 똑같았다. 그래서 나는 남의 집에 와있으면서도 전혀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는 술잔에 얼음을 넣고 그위에 버본 위스키를 따라 나에게 주었다. 강렬한 위스키의 맛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 독한 술을 좋아하는군요. ” 내가 그에게 말했다. “ 독하지 않으면 맛이 없거든. ” “ 담배 좀 펴도 될까요? ” “ 베란다에서 피우겠다면 허락하죠. ” “ 야박하네. ” “ 내 집이니까. ” 나는 담배를 꺼내 그냥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 혼자 산지는 얼마나 되셨소? ” “ 3년 ” “ 난 이제 2년인데..... 그런데 우린 오늘 처음 만나는군요. ” “ 이상할 것 없잖소. 옆집에 살아도 모르긴 마찬가지니까. ” “ 풉...... 하긴. ” 나는 담배를 하나 꺼내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도 나처럼 인테리어에 관심이 없긴 마찬가지였다. 벽에 걸린 액자 하나만 빼면 영락없이 내 집에 와있는 기분이었다. “ 글 쓰는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는데. 별거 없군요. 흐흐 ” “ 뭐라도 기대한 거요? ” “ 시체라도 숨기고 사는 줄 알았지. ” “ 시체라면 화장실에 있소. ” “ 하하. 그렇군. 근데 누굴 죽였소? ” “ 전혀 상관없는 사람. ” “ 무엇 때문에? ” “ 그냥 죽이고 싶었으니까. ” “ 뭔가 그럴듯한 이유가 있어야지. 작가로서 상상력을 한번 발휘해 보쇼. ” “ 돈? ” “ 그건 그냥 강도나 다름없지. 뭔가 재미있는 것 없습니까? ” “ 흐음...... ” 그는 자신의 술잔을 바라보며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 사실....... 그녀와는 불륜 관계였소. ” “ 호오. 시체가 여자였군. ” 나는 그의 대답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 그런데 이제 그만 만나자고 하더군. ” “ 뭐 때문에? ” “ 싫증이 난거지. ” 그는 그러면서 잔에 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 그래서 죽였다? ” “ 왜요? 마음에 안 듭니까? ” “ 그런 건 아니지만...... 너무 신파극 같아서. ” “ 그럼 이건 어떻소? ” 그는 이제 본격적으로 나오려는지 잔에 든 위스키를 모두 마시고 입술을 닦았다. 그도 어지간히 재미가 든 모양이었다. “ 난 여자에게 돈을 요구했소. 글 쓰는 것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드니까. 사실 이 집도 그 여 자가 사줬거든. 여자의 남편은 돈이 많은 녀석이지. 그래서 늙은 나이에도 탱탱한 마누라를 데리고 사는 거야. 여자는 늙은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젊은 남자를 만나러 다녔지. 그러다 독신에 건강한 삼류작가를 만나게 된 거야. 우린 뜨겁게 사랑을 했지. 물론 나는 돈도 원했어. 그녀는 돈이 많았고 나는 가진 게 없었으니까. ” “ 흐흐. 그러면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 “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끝까지 들어보던가 아니면 집에 가서 발 닦고 주무시오. ” “ 아아, 알겠습니다. 그래서요? ” 그는 자신의 빈 잔에 다시 위스키를 따르고 나서 얘길 계속했다. “ 나는 그녀에게 내가 문단에 등단할 때까지만 도와달라고 부탁했소. 내가 작가가 될 수 있게 도와만 준다면 함께 살아주겠다고 약속했지. ” “ 정말로 사랑해서? ” “ 글쎄....... 그건 정확히 모르겠군. ” “ 뭐 어차피 지어낸 얘긴데 아무렴 어때. 그래서? ” “ 여자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소. 그래서 혼자 글도 쓸 수 있게 아파트까지 장만해 줬지. 여긴 내 집필 장소이면서 동시에 그녀와의 밀애 장소였소. 우린 아무 눈치 보지 않고 여기서 사랑을 나눴지. 그녀는 몸이 달아오르면 날 찾아왔고 난 그런 그녀의 몸을 식혀주었소. ” “ 오호, 거참 문학적이군. ” “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사건이 터졌소. 그녀가 내 아이를 임신한 거요. ” “ 큭큭큭...... 아, 미안. 웃어서 미안합니다. 계속하세요. ” 그는 약간 언짢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 난 물론 그녀에게 아이를 지우라고 시켰지. 그녀도 순순히 그렇게 할 줄 알았어. 그런데 이 바보 같은 여자가 머리를 너무 굴린 거야. 그녀는 내 애를 낳을 작정이었지. 그래서 남편과 이혼할 때 위자료를 더 뜯어낼 생각이었었던 거야. 게다가 그 애를 빌미로 내 발목을 잡아두려 했던 거지. 이런 게 일석이조가 아니고 뭐겠어? ” “ 여자들은 가끔 이 세 가지 문제 때문에 독하게 변하더군요. 첫 번째는 자기 아이, 두 번째는 자기 남자, 세 번째는 여자들끼리의 질투심. 이럴 때 여자들은 정말 무서운 존재라 할 수 있죠. ” 그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 그녀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고 했던 거야. 욕심이 너무 과했지.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꼬이기 시작했어. 그녀 자신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일어나 버리고 말았던 거야. ” “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그게 뭐죠? ” 그는 나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게 나에게 반말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이미 많이 취했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 그 토끼들이 서로 단합을 해버렸거든. 흐흐. 어때, 재미있지 않나? 인생은 항상 그 뒤에 뭐가 존재할지 모르기 때문에 재미있는 거라고. 사실 그녀의 남편은 불임이었던 거야. 무정자증이었지. 의학적으로 전혀 여성을 임신시킬 수 없는 남자였단 말일세. 이것은 그녀조차도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이었지. 남편은 예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어. 하지만 아내에겐 입도 벙긋하지 않은 거야. 그는 자식을 낳을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그저 아내와 단둘이사는 것만으로 만족을 했지. 그는 그런 남자였어. 헌데 어느 날, 갑자기 아내가 임신을 했다고 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나? 그는 생각했지. 이년이 분명 다른 녀석과 놀아나고 있었던거라고. ” “ 불임이라. 그것 참 말이 되는 군. 그런 경우엔 대부분 늙은 남편이 불임인 경우가 많더군요. 거기엔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겁니까? ” 나는 약간 비꼬는 투로 질문했다. “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그런 법칙을 모른다네. 아무튼 여자의 남편은 나의 존재를 알아챘고, 그 길로 곧장 탐정을 고용해 아내의 뒤를 밟게 한 거야. 남편은 곧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지. 진실을 알게 된 남자는 아내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을 거야. 당연한 얘기지. 늙은 남편이 젊은 아내의 외도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야. 아마 눈이 뒤집혔을 걸? 하지만 늙은 남편은 이제 아내를 닦달하거나 젊은 정부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협박할 만한 열정이 남아있지 않았어. 그의 열정은 이미 다 꺼져버렸단 말씀이야. 다 꺼져버리고 시커먼 재만 남게 된 거지. 그의 분노는 젊은 사람처럼 들끓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웠던 거야. 하지만 그런 분노야 말로 진실로 무섭고 소름끼치는 것이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면서도 복수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어. 그래서 그는 아내에게 자신의 복수심을 눈치 채이지 않고 나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거야. 그는 늙은 여우처럼 움직였지. 아니, 실제로 그는 늙은 여우였어. 자신의손을 더럽히지 않고 일을 처리할 만큼 노련했지. ” “ 그가 먼저 제의를 해온 겁니까? ” “ 그거야 말로 당연한 것 아닌가? ” 그러면서 그는 손에든 위스키를 한 모금 마셨다. “ 그는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왔지. ” “ 그건 대부(Godfather)에 나온 대사 아닌가요? ” “ 크크, 그래, 돈 꼴레오네의 대사를 조금 인용하자면, 그는 나에게 절대로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 온 거야. 만약 내가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는 나를 간통죄로 고소할 생각이었어. 그렇게 된다면 작가로서의 나의 꿈도 산산조각 나버리고 말테니까. 나는 거절할 수 없었다네. 그래서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 거지. 하지만 말야....... 흐흐, 사실 그건 내가 바라던 바이기도 했어. ” “ 당신도 그녀가 죽기를 바란 겁니까? ” “ 물론! 그런 여자 때문에 인생에 발목 잡힐 이유는 없지 않은가? 내 애를 낳아서 평생을 괴롭힐 텐데. 얼마나 끔찍한 일이냔 말이야! 난 그녀가 내 애를 가졌다는 얘길 듣고부터 심각한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어. 당연히 글도 손에 잡히지 않았지. ” 나는 그의 손이 약간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에 감정이입을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의 얘기를 여기서 중단시킬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어서라기보다는 모처럼 사귄 이웃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조금 전부터 잠이 쏟아져 죽을 지경이었다. “ 그가 말했지. 아내를 처리해 주기만 한다면 그녀에게 돌아가는 재산의 몫을 나에게 모두 주겠다고. 그러면서 그는 5천만원 짜리 수표를 써주더군. 계약금이었지. 나는 돈이 탐나서그녀를 죽이려는 게 아니었어. 그저 그녀를 떼어놓고 싶었단 말이야. 하지만 그녀가 살아있는 한 나는 그녀의 손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 그래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야. ” “ 작가가 되기 위해서? ” “ 그래, 작가가 되기 위해서. ” “ 그래서요?........... 음......그러니까..... ”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혀 허공에 손을 휘휘 내저으며 생각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한 최후의 방책이기도 했다. “ 어떻게! 맞아, 어떻게 살인을 한 거죠? 그러니까 내 말은 살인을 한 방식 말입니다. ” “ 어떤 식으로 죽였길 바라나? ” “ 글쎄올시다. 아무래도 자살이나 사고사로 가장해야했겠죠? 차로 드라이브를 시켜준다고 하면서 한적한 시 외곽으로 데리고 나가....에...... 목을 졸라 죽인 후 차와 함께 펑! ” “ 이봐. 지금 헐리웃 영화라도 찍나? ” “ 아니면 한적한 호수 가에서 배를 타고 물놀이를 하다가 방심하는 사이 퐁당 빠뜨려 죽이는 수도 있겠죠. ” “ 갈수록 가관이군. 이것 봐. 시체는 지금 화장실에 있다고 하지 않았나? ” “ 아! 그렇군요. 큭큭..... 엉뚱한 소리만 해댔네. 글쎄..... 뭐가 좋을지 잘 모르겠네요? ” “ 단순해. 살인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어. 일부러 호수가나 낭떠러지로 유인하지 않아도 살인은 충분히 만들어진다네. 이런 평범한 아파트 단지에서도 말이야.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이런 곳에서 살인이 이루어진다니. 생각만 해도 짜릿하지. 안 그래? ” “ 그렇군요, 아무도 이런 곳에서 살인이 이루지리라곤 생각하지 못하겠죠. ” 나는 하품이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 바로 그 점을 노리는 거야. 살인은 아주 단순했어.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시간, 그들이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서 난 그녀의 목을 졸라 질식시켰다네. ” “ 아파트 단지 안에서 말인가요?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 “ 물론이지. 난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어. 바로 이 건물 뒤쪽 공터에서 말이네. ” “ 어떻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을 수 있죠? 여자가 소리를 질렀을 텐데. 이 건물에 사는 누구하나 고개를 내밀지 않았을까요? 아니, 하다못해 수위아저씨라도 들었을 텐데. ” “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네. 그 시간에 소리를 들었다 해도 모두 모른 척 했을 테니까. 다들 남에 일엔 신경 끄고 사는 사람들이지. 어딜 가든 다 마찬가지야. 여기만 특별한 게 아니란 소리지. 도시에선 누구나 다 방관자일 뿐이라네. 수위 일은 걱정하지 말게. 그 노인네는 새벽2시만 되도 곯아떨어지니까. 게다가 약주라도 한잔 걸치면 누가 업어 가도 모르지. ” “ 그럼 우발적 살인이라는 거군요. 사전에 미리 준비했다고 볼 순 없으니까. ” “ 예리하군. 사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네. 이건 조금 변명 같지만, 나는 최후의 최후까지 망설였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순간에도 나는 이 손을 놓아야 할지 놓지 말아야 할지 망설였다네. 그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어. 하지만 차츰 두려움이 사라지더군. 왜 그런 줄 아나? ” “ 글쎄요. ” “ 그녀의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지. 난 그 눈빛을 보고 결정을 내린 거야. 그 눈빛이 마치....... 마치 고양이를 닮았더군. ” “ 고양이? ” “ 고양이의 눈동자처럼 그녀의 동공도 점점 작아지더군. 숨을 쉴 수가 없었을 테니 말이야. 동공이 수축하는 거지. 그 눈빛이 영락없는 고양이를 연상시키더군. 그래서 멈출 수가 없었다네. 참 잔인하지 않은가? ” “ 그.. 그렇군요. ” 나는 어느새 나도 모르게 술잔을 들지 않은 손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마치 그 순간을 직접 보기라도 한 것처럼 나에게 알 수 없는 전율이 일고 있었다. “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 그는 갑자기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 얘기는 거기서 끝일세. 이제 피곤해 지는 군. 난 좀 자야겠어. ” “ 에......? 하지만 아직 이야기가...... ” “ 자네도 그만 가보는 게 어때? ” 그는 막무가내였다. 하품까지 하며 노골적으로 구는데 더 이상 붙어있을 수가 없었다. “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군요. ” 나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기가 이제부터 재미있어지려 하는 찰나에 자기 맘대로 끝을 내버리다니. 나는 그를 한 대 패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 술 잘 마셨습니다. 담에 또 한잔하죠. 못들은 얘기도 마저 듣고. ” “ 맘대로....... ” 그는 쌀쌀맞은 태도로 현관문도 잠그지 않은 채 자기 방으로 향했다. 그가 문을 닫고 방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나는 이상한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화장실 안을 한번 조사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가 한 이야기들이 모두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호기심이 나를 화장실로 잡아끌고 있었다. 혈액 속에 녹아들어간 알코올이 그런 기분을 더욱 충동질했다. 화장실은 현관 바로 옆에 있었다. 나는 천천히 화장실 문고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문이 열리고 어두운 내부가 드러났다. 나는 아직불을 켜지 않았다. 강한 왁스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혹시 이것은 피를 닦을 때 쓴 것이 아닐까? 나의 생각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불을 켜지 않고 욕조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웠지만 그래도 사물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욕조에는 샤워커튼이 쳐져있어 안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 할 수가 없었다. 의혹이 점점 커져갔다. 이제는 실제로 그가 살인을 저질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미친 생각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한동안 그대로 화장실 앞에 서서 나의 미친 짓을 반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집에 들어가 잠을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살며시 화장실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묘한 낌새 때문에 나는 화장실 문을 닫다말고 고개를 돌려 옆을 쳐다봤다. 내가 서있는 곳에서 45도 정도 뒤쪽에 보이는 그의 방문이 아주 살짝 열려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 순간 섬뜩한 기분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금까지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방안에선 아무런 인기척도 느낄 수 없었고 불도 꺼져있었다. 어쩌면 실수로 문이 덜 닫힌 것일 수도 있었다. 나는 30초 정도 꼼짝 않고 있다가 천천히 발길을 돌려 현관 쪽으로 움직였다. 그때까지 방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분명 방문을 덜 닫은 것이리라. 나는 조금 안심이 되어 긴장을 풀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리고 나가면서도 천천히 소리 안 나게 문을 닫으려는 순간, “ 착! ” 하며 안에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현관 문고리를 잡고 있던 나의 손에서 차가운 냉기가 스며 올라왔다. 갑자기 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나는 문을 닫고 서둘러 602호인 나의 집으로 올라왔다. 출처 : 붉은 벽돌 무당집 작가 : RoLLo 님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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