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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정원에서 산책하기
게시물ID : freeboard_200656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께레
추천 : 11
조회수 : 878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23/04/30 00:3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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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항암차 27일 입원을 했습니다.

지난 1,3차 때와 같은 방 이번엔 창가쪽

마른 가지 사이로 신록이 가끔 보이던 창밖 구덕산은

온통 녹음으로 뒤덮인데다 안개 목도리까지 둘러 보기 좋습니다.

 

 

11층은 산책할 공간이 없어 복도를 뱅뱅 돌고 있습니다.

휠체어에 탄 할배는 표정이 없고

밤송이 머리 젊은 여환우는 씩씩하게 빠른 걸음을 걷고

각시와 동행하는 나는 그 중에서 제일 행복한 산책을 하죠.

 

 

입원실이 부족한 2차 항암 때 10층에 입원했었는데

거기엔 복도 끝에 하늘정원이 있어 산책하기 좋았어요.

오늘은 비상계단을 통해서 한층 아래 10층으로 살금 내려가

하늘정원에서 산책합니다. 사위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넓고도 기인 목도리를 숄처럼 목을 감싸 양 어깨에 두르고

 

 

나는 딸이 빌려준 헤드폰으로 옛날 팝송을 듣고

아내는 묵주를 손에 쥐고 로사리오를 바치면서

목재 데크로 만들어진 작은 산책로를 걷습니다.

데크 옆으로는 작은 소나무도 있고 망개도 보이네요.

 

 

아내는 아마도 나를 위해, 곧 서울가서 수술받을

큰 딸을 위해 간절히 기도를 바치며 걷고 있을테지만,

나는 여전히 옆 화단에 무슨 꽃과 풀이 자라는지 궁금하고

제비꽃은 이미 져버렸지만 빨갛게 돋아난 삐삐를 보고

한 대롱 뽑아 하얀 속살을 까서 아내에게 보여줍니다.

 

 

우리 말고 한쌍의 부부가 산책을 하러 왔군요.

우리와 반대로 아내가 환자고 남편분이 보호자네요.

조금 걷다가 데크옆 돌 벤치에 앉아 맨손체조를 합니다.

나도 무릎이 아파와 걸음이 점점 느려지지만 나보다 20센치나 작은

우리 꼬마 각시는 잘도 걷습니다 빠르게 토박토박......

 

 

반환점을 돌아 내 곁을 지나치는 각시 까만 구두코가 까진 것이

눈에 스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핑 돕니다.

저 조그만 체구에 저 조그만 발로 ....환자인 나보다 기운없는

내 꼬마 각시가 얼마나 얼마나 간절하게 살아 보려고 종종걸음을 ....

나는 저에게 아무것도 해준 것 없이 받기만 하고 살았는데

 

 

갚아 나갈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무엇으로 이 큰 사랑과 희생을 갚을 수 있을지,

나는 알맹이 없는 수수깡같고

각시는 속이 꽉찬 완두콩같은데

어떻게 우리가 평생을 같이 살아왔는지.....

참 인생은 오묘하고 슬프지만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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