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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년전 NYT 충격보도 "中황제, 美가 韓침공해도 좋아"
게시물ID : history_2007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보물창고
추천 : 3
조회수 : 145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5/03/20 06:3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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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1년 6월14일엔 월터 그린넬(Walter Grinnell)의 흥미로운 여행담이 게재됐다. 국제교역 상인이자 자선가인 헨리 그린넬의 아들 월터는 1870년 겨울 만주 동쪽과 코리아(Korea)를 여행하고 돌아와 이야기를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들려주었다. 기사에선 한국의 면적과 인구, 온돌문화까지 소개한 최초의 코리아 정보였다.

"월터 그린넬은 러시아 최남단 블라디보스토크 항에 도착해 관리들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곳에서 가장 가까운 한국인(Korean) 마을을 갈 수 있었는데 이곳 사람들은 근검절약했다. 집은 대나무를 엮어서 만들었고 2~3개의 방이 있었다. 땔감에 불을 붙여 방바닥을 따뜻하게 데웠다. 그들은 '온돌(heated platform)'에 매트를 깔고 그 위에서 먹고 자고 일을 한다. 코리아는 약 8만1000 에이커의 면적에 600만명이 살고 있다. 독립된 왕국이지만 매년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있다. 8개 지방으로 나뉘었고 각각의 지방에 별개의 정부기관이 있다. 기후는 아름답고 삼과 아마를 재배하며 담배도 경작한다. 쌀은 북쪽 지방에서 발견되고 종이는 나무껍질로 만든다. 금속으로 된 연장을 쓰고 목수 등 기술자들은 대단히 영리하다. 국민들이 입는 옷은 흰색이며 여성들은 머리를 틀어 올려 금색과 은색의 방울이 달린 커다란 비녀를 꽂는다. 여자들은 열세 살에 결혼하는 데 아주 예쁘고 내성적이면서도 애교를 잘 부린다. 교육 수준은 높고 모든 사람이 글을 읽을 수 있다."

◇ 美·佛 등 조선침공과 中 황제의 비밀약속

열흘 뒤인 1871년 6월24일 뉴욕타임스는 '한국에 관한 사실들(Facts about Corea)'이라는 장문의 기사를 게재한다. 이번엔 Corea라는 옛 이름을 사용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서구 열강들이 Corea를 은둔의 왕국으로 '방임'한 주된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 중국의 속국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Corea를 잘못 건드리면 중국에 대한 도전이 될 것이라고 눈치 보던 서구 열강에 중국의 통치자가 한반도를 바람 앞의 등불로 만드는 충격적인 비밀약조를 한 사실이 뉴욕타임스에 의해 공개된 것이다.

당시 중국(청나라)의 통치자는 공친왕(恭親王)이었다. 도광제의 6남인 그는 바로 위 형인 함풍제가 왕위를 물려받았으나 두 명의 태후와 손잡고 정변을 일으켜 섭정 체제를 구축했다. 그는 1867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평양 군민에 의해 불타고 선원들이 죽임을 당한 것과 관련, 'Corea는 중국의 속국이 아니므로 우리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미국이 자유롭게 응징해도 좋다'는 비밀 전갈을 미국에 보냈다.

뉴욕타임스는 미국의 콜톤 솔터 전 중국주재 영사의 육성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Corea는 중국의 속국이므로 Corea와 전쟁하면 중국이 보복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었다. 중국의 섭정왕자 쿵(공친왕)은 1867년 영사업무로 베이징을 방문한 동안 미스터 벌링게임에게 미국 상선 제네럴 셔먼호 선원들의 학살에 유감을 표하고 '한국은 중국제국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독립된 나라이지만 옛날관습에 따라 명목상 조공을 바칠 뿐이다. 미국은 그들을 자유롭게 응징할 수 있다'며 전혀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상하이의 미국 총영사가 이처럼 대단히 중요한 전갈을 무시한 것은 커다란 실수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은 미국의 일방적인 도발이었다. 셔먼호는 1866년 8월21일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했다. 서양선박의 내항과 통상요구가 국법으로 금지된 것을 들어 출국을 요구했으나 도리어 관리를 감금해 폭행을 가했고 사람들이 몰려들자 대포와 총을 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분개한 평양 군민들이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처형했다.

미국은 5년 후인 1871년 6월10일 프랑스 신부 리델을 길잡이로 5척의 군함을 강화도와 김포에 파병해 무력으로 개항을 시도했다. 이른바 '신미양요(辛未洋擾)'다. 불과 8시간의 전투에서 아군은 어재연 등 240여 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으며 20여 명이 포로로 잡혔다. 반면 미군은 장교 1명과 사병 2명이 전사하고 10여 명이 부상당하는 데 그쳤다.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 이후 바로 보복에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해 지금까지 알려진 바는 1865년 링컨 대통령의 암살 이후 권력을 승계받은 앤드루 존슨 대통령이 탄핵을 받는 등 어수선한 국내 정세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뉴시스가 발굴한 뉴욕타임스의 보도를 통해 중국의 황제가 미국 등 열강의 유린을 묵인하겠다고 약속한 사실이 침공의 빌미가 된 것으로 드러났다. 셔먼호 사건과 관련, 중국 황제의 입장을 베이징 주재 미국 총영사가 간과하는 바람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기사 상세 읽기 : 뉴시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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