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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및 생각해볼 꺼리)백제의 건국에는 왜 신화적인 설화가 없을까요??
게시물ID : history_2008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량011
추천 : 4/8
조회수 : 171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5/03/20 23:3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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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 부터 가졌던 궁금증이 하나 있답니다.
세계 어느 나라건 간에 대부분의 고대의 국가들은 신화적인 건국설화를 가지고 있고 심지어 고대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기록이 잘 남아 있는 중국의 한나라의 경우도 유방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남아 있질 않나요? 아직 까지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나 교육이 보편화 되지 않았을 시기이다 보니 이런 식의 국가 시조에 대한 홍보(?) 혹은 프로파간다가 무척이나 효과적이었을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일본의 경우 근대 국가로의 시작이었던 메이지유신 이후에도 천황에 대한 신격화나 아마테라스 신화가 전국가적으로 홍보되고 공인되기도 했다는 점이 함정이지요 ㅋㅋ)

그런데..

왜 백제에는 신화적인 설화가 없을까요??

솔직히 관련해서 이런 저런 논문도 좀 찾아 보긴 했습니다만 명확하게 설명한 것은 없더군요.
학교 다닐적에 교수님한테 술자리에서 여쭈어 보긴 했는데...
교수님 曰 "아마도 다른 나라와 다르게 선주민 세력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이다" 라고 답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그 압도적으로 강했다는 기준이 애매한데다 백제 시조 온조왕의 기록에서도 선주민 세력과의 갈등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관계로 뭐랄까 딱 하고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더구나 백제의 건국기록은 크게 봐서 2가지의 패턴이 존재하는데 각각의 기록이 백제를 구성했던 소국들의 건국에 관한 설화라면 이후에 집권을 하게된 세력(하다못해 부자상속을 한것이 근초고왕이니 초고왕 고이왕 시기에는 단일 세력이 집권한 것은 틀림 없는데..? 물론 중간에 온조계vs고이계 충돌이 있었던것 같긴 하지만..)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시조 혹은 조상을 포장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이 3가지 패턴 모두가 신화적인 요소가 전혀 없단 말이죠? 당장 신라의 경우만 봐도 흉노의 김알제랑 막 엮기 까지 하는데 왜 백제는 유난히도 이런 면이 안보이는 걸까요?

아래는 백제의 건국 기록들 입니다.

패턴1. 북방유래
1.구태, 위구태

<북사 백제열전>
백제라는 나라는 대개 마한의 속국으로 색리국에서 나왔다.색리국왕이 행차를 나갔을때 그를 시중들던 아이가 후궁에서 임신하였는데, (중략) 뒷날 아들을 낳으매 (중략)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중략) 동명이 마침내 남쪽으로 도망하여 (중략) 부여에 이르러 왕이 되었다. 동명의 후손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매우 어질고 신의가 두터웠다. 그는 대방의 옛 땅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탁이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는데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 당초에 백가가 건너왔다고 해서 나라이름을 백제라고 불렀다.

<주서 이역열전 백제>
백제는 그 선대가 대개 마한의 속국이며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대방에 나라를 세웠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
한나라 말에 공손탁이 해동으로 세력을 크게 넓혀 외이를 위엄으로 복속시키자 부여왕 위구태가 소속을 바꿔 요동에 복속하였다. 이 때 고구려와 선비가 강성했으므로 공손탁을 두 나라 틈에 끼어있는 부여와 더욱 가까이 지내려고 위구태에게 일족의 딸을 시집보냈다.

2.비류

<삼국사기 백제본기>
어떤 이들은 이르기를 "시조는 비류왕으로서 아버지는 우태니 북부여 해부루의 庶孫이며, 어머니는 소서노 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이다. (중략) 소서노를 취하여 왕비로 삼았는데 기초를 닦아 나라를 세우는데 자못 내조한 공이 있으므로 (중략) 자기 친아들 처럼 대우하였다. 주몽이 부여이 있을때 예씨에게서 낳은 아들인 孺留가 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중략) 비류가 아우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浿水와 帶水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이르러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3. 온조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가 추모 혹은 주몽이라고 하는데 북부여에서 재난을 피해 졸본부여로 왔다. (중략) 두 아들을 낳아 장자를 비류라 하고 둘째를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때 낳은 아들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않을까 두려워 오간 마려등 열명의 신화와 함께 남쪽으로 떠나매 이들을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가히 살만한 땅을 바라보았는데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다. (중략) 비류는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십신으로 보익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니 이때가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매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뉘우치고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서 귀부하였다. 올 때 백성들이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라고 고쳤다.

4. 시조 언급 없음.
<위서 백제열전>
백제국은 그 선조가 부여로부터 나왔다.

<수서 동이열전>
백제의 선조는 고구려국 출신이다.

<구당서 동이열전>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

<신당서 동이열전>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패턴2. 남방유래
<양서 동이열전>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한국인데 하나는 마한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이요, 또 다른 하나는 변한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국이 있었고 마한은 54국이 있었다. 대국은 1만여가 소국은 수십가로서 모두 10여만호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남서 동이열전>
백제는 그 시초가 동이의 삼한국인데 하나는 마한이요, 다른 하나는 진한이요, 또 다른 하나는 변한이었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12국이 있었고 마한은 54국이 있었다. 대국은 1만여가 소국은 수십가로서 모두 10여만호가 되었는데 백제는 곧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저의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2가지의 패턴중에 북방유래에 관한 설화는 이주민계통(부여족)이고 남방유래는 선주민(마한)의 기록인거 같네요.
그렇다면 최소한 북방유래의 기록에는 신화적인 설화가 가미되어져 있는데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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