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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호선 끝자락에 있는 정왕역 근처에서 살았다. 나는 자주 가던 카페에서 일했다. 퇴근하면 밤 열 시쯤 되었다. 4호선은 항상 사람이 많았는데 내가 내리는 정왕역쯤 되면 한산해졌다.
한 번은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는데, 엄마가 여자친구는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난 그런 생물은 키우지 않았기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럼 전철에서 서로 기대 자던 여자는 누구냐고 엄마가 되물었다. 나도 낙엽 지고 해도 홍시처럼 익었던 그해 가을, 서로의 온기로 피로를 달래던 그 여자의 얼굴이 몹시 궁금했다.
2010년은 혼자서 영화를 처음 본 해이기도 했다. 카페에 출근하려 옷을 입으며 티브이 화면을 보고 있었다. 영화 ‘인셉션’의 예고편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아, 저건 꼭 보고 싶은데? 개봉이 언제지? 그때까지 같이 볼 아리따운 사람이 생겼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인셉션은 차질 없이 개봉했고, 아리따운 사람도 내 곁에 생기지 않았다.
여담이라면, 봄이었던 같은 해 4월에 주말에만 카페에 일하러 오는 무용과 여대생에게 “나랑 아이언맨 2 보러 갈래?”라고 문자 한 적이 있다. 답장이 없어 하루이틀 조마조마했는데, 그 아이 번호로 저음의 남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 아이의 남자친구였다.
결국 인셉션은 퇴근한 뒤 심야영화로 혼자 봤다. 예매는 했는데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남았기에 무얼 할까 고민하다 중국집에 들어갔다. 짜장면 곱빼기에 탕수육 소자와 이과두주를 주문해 먹고 마셨다. 혼자 중국집에서 식사한 것도 술을 마신 것도 처음이었다. 혼자 보는 내 첫 영화를 기념하고 싶었거나 아니면, 그냥 배가 몹시 고팠기 때문은 아니고 쓸쓸했다.
인셉션은 당시 나로 돌아가 말하자면 가히 어마어마하게 재밌었다. 극장 안엔 열 명 남짓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좋은 자리를 선점한 것인지 내 양 옆자리엔 모두 여자분이 앉아 있었다. 난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와, 진짜, 겁나 재밌지 않아요?”라고 손이나 팔꿈치로 툭툭치고 싶어 살짝 고개를 돌리기도 했는데, 난 조금 외롭고 영화는 너무 재밌고 지금 이 기분을 누군가와 공감하고 싶은 마음이 딱딱하고 맨질맨질한 극장 팔걸이를 넘어서고 싶었을 뿐, 미친 건 아니었기에 실제 행동에 옮기진 않았다.
그렇게 술기운에 올라 비척비척 걸으며 아마 Can't take my eyes off you나 Close to you 같은 노랠 붉게 부르며 집에 돌아갔던 7월의 인셉션은 지나가고, 다시 전철에서 모르는 여성과 온기를 나눴던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평소 “전지현의 다리를 만질 수 있다면 난 천만 원도 낼 수 있어.”라거나, 갑자기 “아, 저 색기가?” 하며 이차선 도로를 서둘러 건너려 해서 “뭔데, 아는 애야?”하면, “아니, 저 색기가 컨버스 하이를 신었는데 복숭아뼈가 보이잖아.”라고 말하는 녀석에게 전화가 왔다.
“뭐 해? 뭐 해? 퇴근했어? 지금 보자. 아, 그리고 너한테 꼭 해줄 말이 있어.” “어? 지금? 올 거야? 올 거면 빨리 와라. 할 말은 뭔데?”
“아, 내가 꿈을 꿨는데 너가 나왔거든? 근데. 아... 진짜 이상해.” “꿈? 내가? 니 꿈에? 뭔데.”
“아, 니가 나왔는데, 참 이상하단 말이야, 이따 얘기해주께.” “아씨, 뭔데.” 전화는 끊어졌다.
친구는 만났고, 친한 한국 남자 친구끼리의 어색한 일 초가 지나가고, 왔냐? 잘 지냈냐? 어 넌, 뭐 먹냐? 그리고 우린 고깃집을 향해 걸었다. 날은 급격히 어두워지고 바람은 조금 차고 상점들의 간판은 촌스럽고 드문드문 자비 없는 차가 경적을 울렸다.
“그래서 무슨 꿈인데?” “새애끼, 궁금하지?”
광기 어린 친구의 살짝 반달진 눈과 찌그러진 물풍선 같은 얼굴이 바닥에 자작자작 밟히는 은행 똥내처럼 상당히 구렸다. 사실 서로, 여자친구 생겼냐? 아니? 연락하는 사람은? 없어. 너는? 하하, 일은 어때? 그러고는 할 말이 곧 없어질 예정이기에 간만에 하나 나눌 썰을 아끼려는 듯 친구는 자꾸만 뜸을 들였다.
“아, 그래서 뭐냐고, 꿈.” “아, 맞다, 꿈.”
“아 맞다는 색기야, 군대에서 니가 선임한테 맞기 전에 주로 했던 말이고, 빨랑.” “어, 내가 꿈을 꿨는데 말이지. 너가 나왔어. 근데 그걸 했어.”
“그거?” “어, 그거.”
“그거 뭐?” “아 색기야, 그거 인마 그거.”
친구는 차이나카라가 달린 코드에 찔러 넣었던 양손을 꺼내 손바닥과 엄지 쪽의 주먹 옆면을 빠르게 탁탁 두 번 쳤다.
“누구랑? 연예인?” “아니?”
“그럼?” “남자랑.”
나는 고등학생들에게 둘러싸였을 때처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기 시작했지만,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처럼 차분하게 다시 물었다.
“남자 누구?” “우리 친구, 현성.”
나는 잠시 이성을 잃었다. 평소 서너 명의 친구가 아니면 평생 욕을 하지 않고 지냈다고 자부할 수 있는데, 입에 담기 힘든 욕을 쉬지 않고 방언처럼 쏟아냈다. 친구는 내가 신내림 받은 소설가의 타자기처럼 신박한 욕을 쏟아내는 게 신기하지만, 상처는커녕 일말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나는 띵 소리를 내며 엉킨 타자기 글자쇠처럼 갑자기 욕을 멈췄고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미안.”
골목으로 방향을 꺾고, 적당히 더러운 창문을 가진 고깃집의 미닫이 문을 열었다. 고개 숙여 가게를 들어갈 때, 불판소리와 자욱한 연기와 왁자한 이야기소리와 웃음소리가 우리를 확 덮쳤다. 춥진 않은데 왠지 겨울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친구와 나는 골목에 들어설 때부터 고깃집 테이블에 앉기까지, 싸웠는데 헤어질 정도는 아닌 커플처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친구는 화해의 제스처라는 듯 십오 년 경력의 고깃집 사장님처럼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앞치마를 내게 건넸다. 바텐더와 같은 손놀림으로 소주병을 따고 겹쳐 있던 두 개의 소주잔을 빼내 하나를 내게 주고 술을 따랐다. 나는 한 손으로 술을 받으며 기분을 풀지 않으면 쫌생이 쫌팽이가 될 것만 같은 분위기를 느꼈다. 모아이 같은 표정을 풀고 친구에게 말했다.
“근데.”
친구는 그 말을 듣자마자 토마스 기차 같은 표정을 살짝 내비쳤다가, 자세를 고쳐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더니 여래 같은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누가 공격이냐고?”
나는 감정의 각 단계인 부정과 분노를 한 번에 느꼈다가, 타협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우울과 수용을 동시에 느꼈다. 조심스레 결과지를 펼치는 심정으로 답했다.
“응.”
친구는 그 눈빛에 찬 권력의 맛이 입술로 빠져나감을 아쉬워하는 느린 입모양으로 이제 그럴 때가 되었다는 듯 개운함이 묻은 목소리를 담아 말했다.
“니가, 공격.”
그 순간을 기점으로 우리는 맛있는 고기와 즐거운 술자리와 게임도 하고 노래방고 가고 다 했어 인마의 날이 되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안도했던 마음의 미닫이 문이 닫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