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경 아고라등 많은 광우병 관련 토론과 논쟁을 거치면서 난 오늘날 일베 성향의 님들이 탄생할 걸 예고한바 있다. 그 전의 우익과 오늘날 우익, 즉 광우병 이전의 우익과 오늘날의 우익은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한다고 주장 해 왔다. 그래야 제대로 된 전선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유나 이런 분들은(이 양반들이 좌빨이라는 건 일베 분들 특유의 억지나 마찮가지인데 ㅋ) 그런 의미에서 관점의 전환을 취할 필요가 있다. 뭐냐면 오늘날 우익이나 일베 성향 인간들을 비판하는 것은 더이상 옛 지만원같은 수꼴을 비난하는, 2002년경 레토릭, 예를들면 친일파등등의 수식어로는 힘들다는 이야기다.
그 당시의 수꼴(2000년대 초반)은 시민프티적 사고로 비난하기에 딱 좋은 대상이었지만, 광우병 그리고 촛불 후 우익들은 더이상 그런 사고로 비난하기엔 녹녹치 않은 대상이다. 외려 시민프티적 사고 즉 질서와 법치에 대한 상식적 사고를 우익들이 선점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보게 된다.
진중권은 그런면에서 탁월한 편이다. 그가 반 이명박 진영에 메스를 들이대는 건, 이런 한계와 문제들, 그러니까 옛 수꼴까는 레토릭들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김어준류의 무조건적 이명박까지, 그리고 정념적 사고(쫄지마? 오글 오글..)는 냉소주의적 우익들에게 딱 욕먹기 좋은 먹잇감이었을 뿐이다.
촛불이 어째서 이런 기점이 되었을까?
생각 해 보면 간단한 일이다. 촛불 좀비라는 단어를 들여 다 보면 알 수 있다. 이 말을 내뱉는 우익들의 프레임은 촛불이 합리적인 근거에 의해서 타오르지 않았으며, 무조건적이고 일방적 믿음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공포, 그러니까 촛불에 대한 우익들의 공포는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파시스트적 억압이 아니라, 사실은 자유주의자의 공포로 합리적 이유가 없이 타오른 전체주의적 형상에 대한 상식적 공포로 셋팅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시민프티들에게 합리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주장은 명백히 우익들의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촛불 후 조중동이나 정부의 미묘한 이데올로기 변화를 통해서 이런 발언을 할 종자들이 생길 것이라고 계속 경고 해 왔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오늘날 우익들의 문제는 지들이 합리적이라고 착각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프래그머티즘(실용주의)적 비판들이 좌파진영에게 스스로 갈고닦는 기회를 제공하기도하지만, 그런 소수의 우익성향 네티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들은 착각 속에 빠져있다고 생각한다.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촛불은 고작 0.0001%라는 광우병 창발에 대한 불안 때문에 불이 지펴졌다. 일견 이런 비판으로 보면 침소붕대 혹은 확대해석으로,촛불이 과도한 행위를 한 것처럼 보인다. 허나 이들이 사고하지 못하는 건, 사회란 꼭 강박증자의 논리처럼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빵 한 조각으로도 혁명이 날 수 있는 게 이 역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87년 서울의 봄이나 4.19 혁명을 보자. 소수가 전체주의적 권력에 의해 희생되었고, 그것을 촉매로해서 저항이 불타올랐다는 것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하는가? 우리는 전형적인 우익 냉소주의자의 시선으로 이렇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수의 희생, 즉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보면 아주 미미한 사람들의 피값으로, 전체 사회의 질서를 흩으려 놓는다는 건 타당하지 못하는 계산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이것이 오늘날 광우병이나 촛불을 비하하는 인간들의 프레임이다.
허나 종종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말하자면 그 소수의 희생은 정치적 상징이 되면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광우병 소가 우리에게 끼칠 영향이 극히 미미하다? 그것만 따지고들면서 자신들 스스로 자위하는 부류가 있는데, 그것은 명백히 표피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촛불이 광우병을 통해서 본 것은 주권과 국가의 불일치로, 국민들의 건강이라는 당연히 국가가 해야 할 의무를 저버린 사실에 대한 분노였고, 광우병은 그 정치적 불일치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빵 한 조각이 잘 못 돌아가서 혁명이 날 수도 있는 게 정치다.
즉 정치적 긴급성에 따라 어떤 대상이 저항의 상징이 되는 건, 계산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정치 철학자 라클라우의 주장처럼 정치적인 것의 귀환의 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과도하다고 강박증자의 시선으로 비웃는 건, 명백히 모순적 태도에 속한다. 왜냐면..
하나 이것이 과도하다면 과도하지 않는 태도는 과연 어떤 것인가? 되려 법치나 질서에 대한 우익들의 강박이야 말로 탁월하게 과도한 리비도 투사가 아닌가?
둘 박원순 아들의 허리에 집착했던 우익들을 보라. 과연 우익들의 사고방식은 절대적으로 객관적인가? 자신들 또한 정치 상징(환상)이 없다고 변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셋 냉소주의자의 입장이 모순인 것은, 마치 자신들은 믿지 않는다는 착각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예를들면 기독교를 비난하는 냉소주의자의 입장을 보자. 물론 기독교를 까는 건 매우 쉬운 일이다. 허나 기독교를 까기 위해서 동원 된 논리들, 즉 독실한 신자와 이성적 주체의 대립 관계는 명백히 허위적이다. 무신론자야 말로 사고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을 제단하고, 증명할 수 없는 일을 절대적인 것인양 팩트로 인식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 자본주의에 대한 순진한 믿음들을 보라. 과연 누가 신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오늘날 우익들의 순진한 냉소주의는, 즉 강박증자의 시선은, 자신이 법치와 사회 질서와 기계적 원인 결과론에 매몰된 결과지, 정치가 만들어내는 우발성과 그것을 만들어 내는 상징들을 읽을 수 있는 이론의 부재, 자신들을 돌아 볼 수 있는 개념의 부재에서 나온 무지의 소치라고 할 수 있다.
광우병을 퍼센트지로 환원하는 건, 주권과 국가, 그리고 그에 딸린 정치적 위기를 가십적인 대립 구도로 만들기 위한 개념일 뿐, 광우병이 보여주는 사태들을 근본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즉 광우병은 정치적 위기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p.s 오늘날 우익들에 대한 내 인상은 가십적인 논쟁, 그러니까 상대의 주장을 쉽게 환원해버리는 기술은 탁월하지만, 그 외에는 별 거 없는 수준이다. 쫄지 마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