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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백제의 영역
게시물ID : history_201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lvarez
추천 : 10
조회수 : 335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3/26 16:48:00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에서 동북아 역사재단이 추진중인 동북아 역사지도의 내용이 왜곡되었다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셨습니다.

120~300년대 한반도 남부에 백제/신라를 표시하지 않은 것은 일제학자들이 만든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영향임.

그리고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위 대리인 새누리당 김세연 의원은 “과거 학설을 무비판적으로 이어가면서 시각의 근본적인 재정립이 되지 않아 지도 편찬사업에 문제가 불거졌다”면서 “고대사 관련 내용은 반드시 수정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지 않으면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식민사관 극복이 어렵다는 지적이다.

2009082114742.jpg

이번에 제작중인 동북아역사지도는 아마도 4세기에 전남지역을 백제의 영토가 아닌 마한영토로 표시한것으로 보입니다.
( 일부 일본 역사교과서에 나온 것처럼 남부에 임나일본부를 넣지는 않았겠죠. 일본학계에서도 폐기된 학설인데 )

htm_20100324030009a000a010-002.jpg

이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에 따른 백제영역 비정은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원후 8년에 온조왕이 군사를 몰고, 마한의 국읍을 병탄했고 ~ 1년뒤 마침내 마한은 멸망했다" 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기록에 따라 기원후부터 전남지역을 백제영토로 비정하는 것이 아니라, 근초고왕대인 369년부터 백제영토로 비정하는 학설입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과 진서동이전등의 중국기록, 특히 진서에 277~290년까지 마한이 진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때문에 온조왕대의 마한병합기록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죠.

이 학설은 이병도 교수가 중국사료와 일본서기를 차용하여 수립한것으로 오랫동안 고대사 정설의 위치를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동북아 역사지도에서 4세기에 전남지역을 백제영토로 비정안한것은 이병도 교수의 영향때문에 아니라, 최근에 전남지역에서 발견된
일련의 마한 유물때문입니다.  

http://news.kbs.co.kr/news/NewsView.do?SEARCH_NEWS_CODE=1855048
전북 고창에서 5세기 초 마한문화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됐습니다. 
학계는 이번 발굴을 통해 백제시대에도 마한세력이 상당기간 활발하게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https://www.gwangju.go.kr/contents.do?S=S01&M=170306080000(광주시 문화예술진흥과)
매장시설이 석실이면서도 그 구조가 공주, 부여지방의 백제석실과 다를 뿐 아니라 백제 지배세력의 고분에서 발견되지 않는 옹관을 석실 내부에 안치하고 있다는 사실이 주목되는 것이다. 
더구나 복암리 3호분의 분구상에는 10기 이상의 매장시설들이 만들어져 있다. 
이 가족묘적인 다장제(多葬制)야말로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의 독특한 전통이었던 것이다. 

복암리 3호분의 축조연대는 6세기초반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바 이 시기라면 공주의 무령왕릉과 같은 백제 고분들이 축조되던 시기이다. 

이때 광주를 비롯한 영산강유역에 그와 같이 거대고분이 축조되었다는 점은 6세기에 들어선 뒤에도 이 지역이 백제의 중앙에 수직적으로 종속되어 있지는 않았던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셈이다. 

아직 고고학적 증거이고, 추가연구가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에 4세기까지도 백제가 마한을 완전하게 영유하지 못했다라고 단정을 내릴수는 없습니다만,
최근 연구를 감안한다면, 마한이 4세기 이후까지도 전남지역에서 상당히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존재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그 세력이 백제와 완전히 분리된 것인지, 백제 치하의 간접통치인지가 불분명할 따름입니다.

김세연 의원의 주장과는 다르게, 최근의 연구결과를 반영해서 4세기에도 여전히 전남지역의 마한세력이 백제에 완전히 병합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표시한 것이지, 옜날 고리짝 이병도 교수의 이른바 식민사관에 얶애며서 그런게 아니라는 거죠. 

이병도 교수가 한국 고대사에서 독보적이었기 때문에, 그 분 영향력이 지대한건 사실이지만, 그 분의 학설이나 이론이라고 해서 무조건 수용되는 것도 아니고, 논파되거나 무시된것도 상당히 많습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는 그 분의 학설은 사료나 고고학적으로 증명이 되서 살아남은거지, 주류사학이 식민사관을 숭상해서가 아니란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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