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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느끼는 절망감을 말해보겠습니다.
게시물ID : medical_201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존그레이
추천 : 22
조회수 : 1846회
댓글수 : 63개
등록시간 : 2017/12/17 19: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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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안녕하세요. 전에 몇 번 글을 썼던, 공공병원에서 일하는 척추외과 의사입니다. 

0. 저는 지금 저의 일에 상당히 만족하고 있고, 병원을 옮길 생각도 없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끼고 있으니, 이만하면 제법 성공한 인생이다 싶기도 합니다. 어려운 환자가 오거나 힘든 수술을 해야만 할 때에는 '어쩌다가 이 일을 골라서 이런 고생을 하고 있나'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지만, 그 때 뿐이고요. 

하지만 의료계가 나아지리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의료 환경이 개선될거라는 기대도 거의 버렸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드릴게요. 

1. 개선되지 않는 수가 문제에 의사들이 깊숙이 개입해 있습니다. 
사례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조금 전문적이지만 제가 직접 겪고 있는 일이라... 
제가 하는 수술 중에 전방 경추간판 절제술 및 유합술(Anterior Cervical Discectomy and Fusion)이라고 하는 수술이 있습니다. 목뼈(경추) 사이의 디스크가(또는 그 주변의 골조직, 후종인대 등) 신경을 눌러서 문제가 생겼을 때, 환자의 목 앞부분에 절개를 넣고 뼈와 디스크를 노출시킨 후 디스크와 문제가 되는 조직을 제거하고 그 자리에 뭔가를 집어넣은 다음 두 목뼈를 붙여주는 수술입니다. 
디스크와 주변조직을 제거한 다음에는 뼈와 뼈 사이가 붕 뜨기 때문에, 그자리에 뭔가를 넣고 뼈를 붙여줍니다. 만약 뼈를 붙이지 못하면, 그 부위에서 문제가 발생해서 신경이 다시 눌리거나 통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렇기 때문에 뼈를 '잘' 붙여주는것이 중요하지요. 

뼈를 붙여주는 세계 표준 술기는(즉, 세계 경추연구학회에서 발행한 교과서에 나오는 술기) 케이지(cage) + 전방 금속판 고정술입니다. 뼈와 뼈 사이에 플라스틱, 세라믹이나 티타늄 지지대를 넣고, 그 뼈 앞에는 금속판을 댄 다음, 금속판과 뼈를 나사로 연결해서 고정하는 수술이지요. 이 수술방법이 가격대 성능비 및 부작용 가능성이 가장 낮은 편입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기의 골반뼈를 일부 채취해서 뼈 사이에 넣는 방법, 다른 사람의 뼈로 만든 보형물을 경추 사이에 넣는 방법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케이지+금속판 수술방법이 가장 적합한 수술이라는 단적인 증거가 있습니다. 전임 정형외과학회 회장님 두분이 목 디스크 수술을 받으셨는데요, 바로 이 방법으로 받으셨어요. 목 수술을 배워서 하는 입장에서, 이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자기 뼈를 채취하는게 유합률(fusion rate)은 가장 좋지만, 골반에서 뼈를 뗀 자리가 아프죠. 수술 시간도 길어지고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 뼈를 써서 수술을 하면, 비용이 최소 +300만원입니다. 다른 사람 뼈로 만든 보형물은 보험 적용이 안되는, 인정 비급여 항목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왜 이야기할 거리인고 하니, 이렇게 수술을 하면 삭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경추 유합술을 할 때, 플라스틱, 세라믹, 티타늄 등의 보형물을 뼈 사이에 넣고, 앞쪽에 금속판을 고정하면 금속판이나 보형물 둘 중 하나의 비용은 삭감이 됩니다. 그렇다면 정형외과학회 회장님들은 어떻게 삭감에도 불구하고 그런 수술을 받으셨느냐? 그냥 한겁니다. 병원이 삭감을 감수하고. 모범 사례로서 외부에 보여줄 만한 명분이 되거든요. 

2. 그런데 이 문제는, 심평원의 갑질이라기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심평의학이라고, 심평원의 심사 기준을 놓고 의사들이 분개하는 경우가 많지요? 이 사례도 사실 황당한 심평의학 사례라고 보면 그만이긴 합니다. 이런 일이 좀 많아야지요. 

좀 지난 예전의 척추외과학회에서 이 건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적으로 된 적이 있었습니다. 세계적으로 보았을 때에도 이 수술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하시는 교수님 한분이 공식적으로 문제제기를 하셨어요. 왜 교과서와 세계적 학회에서 인정한 표준 수술법을 우리나라에서만 인정하지 않느냐? 이러면서요. 
그런데 그 문제제기를 하시는 강연장의 제 옆자리에 심평원 직원 두분이 앉아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우연이었지요. 왜 오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두 분의 대화에서 그분들이 심평원 직원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저는, 마침 궁금했던 터라 그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대체 심평원은 왜 이런 심사기준을 만든건가요?' 

'선생님, 저희들한테 뭐라 하지 마세요. 그 기준 다 학회에서 유명한 의사선생님들이 만드신거예요. 그분들 지금 이자리에 앉아계세요.' 

그 이야기를 듣고, 저는 앞으로 나아질거라는 희망을 거의 다 버렸습니다. 
강연하신 교수님께도 나중에 들었어요. 강연 후에 본인보다 한참 높은 연배의 선생님들에게 '그만 나대라.'는 주의를 들으셨다고... 

3. 이 부분이, 수가 문제에 있어서 의료계가 해결될 수 없는 수렁에 빠져있는 한 원인입니다. 
심평원 직원들은 의사가 아닙니다. 심사 기준은 결국 의사들이 만드는 거예요.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 지출을 줄이길 원하고, 
심평원은 보건복지부의 관리 감독을 받는 기관으로서, 그 의지를 이행하려고 하고, 
심평원과 건보공단에 잘 보여서 나중에 한자리를 받거나 쏠쏠한 자문료가 보장되는 자문 의사 자리를 지키려고 하는 의사들이 있는 한, 
심평의학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심평의학으로 인한 피해는 치료를 받는 환자들과, 병을 치료하는 의사들이 보게 되지요. 
ECMO 급여 기준 같은 황당한 기준도, 결국 의사 손에서 만들어집니다. 모르긴해도 아마 그 기준을 만드신 분이 흉부외과나 순환기내과에서 한 자리 하는 분일거라는데에 500원 걸 수 있습니다. 

4. 심평원은 당연히 필요한 조직입니다. 의사들의 의료행위가 부적절하지 않았는지, 과잉 또는 과소 치료가 아니었는지는 누군가가 감시해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행위별 수가제 하에서는 당연히 과잉진료로 인한 피해가 벌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건보재정 지출을 줄이려고 하는 정부가 있고, 그런 정부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심사 기관이 있으며, 그 심사 기관에 영합해서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는 많은 의사들이 있는 한, 심평의학과 과잉 삭감, 저수가로 인한 문제는 없어질 수가 없습니다. 

정부의 의지가 그대로라면, 저수가 문제를 해결해서, 어찌어찌 수가 현실화를 이뤄낸다고 해도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수가를 현실화 해도 당신이 한 진료가 과잉진료니까 삭감시킨다 하면 어쩌겠습니까.
의사들에게 심평원과 맞설 방밥은 사실상 별로 없거든요. 

5. 그렇다면 심사 기준 자체를 최대한 현실적으로, 세계 학회 표준으로 만들면 될 것 아니냐?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습니다. 

안됩니다. 못합니다. 

정부가 그걸 원치 않고요, 정부 뜻대로 만들어주는 의사들은 널렸거든요. 
여러분도 익히 느끼셨다시피, 공공의 이익보다 사익을 우선시하는 대형병원의 의사들은, 상당수가 있는 것이 현실이고, 그런 사람들을 솎아낼 기준도 없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심평원의 의뢰를 받아 심사 기준을 만든 의사들의 소속과 실명을 공개하자는 주장도 있기는 했습니다만, 그 의사들과 심평원 사람들이 바보입니까? 그걸 공개해서 스스로가 공공의 적이라는걸 광고하게. 
그리고 심평원 직원들에게는 삭감한 비율에 따라서 인센티브를 지급하기도 했었지요? 이러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신가요. 
황당한 기준을 만들어 놓고도, 그 기준에 비춰봤을 때도 황당한 삭감을 마구 때리는 일이 생기는 겁니다. 

6. 일단 삭감이 되어서 병원이 건보공단으로부터 돈을 못 받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세요? 소송? 
천만에 말씀입니다. 담당 지역 심평원에 소송 걸었다가는, 그날부터 병원 폐업 카운트다운 들어가는 겁니다. 보복 삭감이 줄을 있게 되거든요. 

삭감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이 접수, 처리되는 과정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삭감을 맞아요, 그러면 해당 의사는 재심사 청구를 합니다. 소명 자료를 낑낑거리면서 만들어서 추가로 보내며 말이죠. 그러면 한-참 있다가, 반려되었다는 통보가 돌아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재심 청구를 또 할 수도 있어요. 보통 또 반려되지요. 그러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간혹 재심에서 삭감이 취소되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런 경우에도 삭감을 시킨 심평원 직원 또는 부서에는 아무런 불이익이 없어요. 그러니 인센티브(국감에서 지적되어서 지금은 없어지긴 했습니다만...)나 실적을 바탕으로 한 승진에 목숨을 거는 심평원 직원은 무차별 줄삭감을 때리는거죠. 어차피 뒤탈이 없을거라는걸 아니까요. 

7.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안되요. 못해요. 틀렸어요. 못 고쳐요. 
너무나 많은 조직과 개인, 시민들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의료 제도는 그 초안을 잡는 부분부터 극히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물건이예요. 근데 박통과 전통이 황당한 체계를 만들고 굳혀버렸어요. 시간도 너무 많이 흘렀고요. 
힘이 있는 의사들은 식견과 비전이 없거나 개인의 영달만 추구하고, 식견이 있으며 양심도 있는 일부 의사들은 힘이 없어요. 의료계 내에서 목소리를 통일시키는건 고사하고, 또라이 극수구 박사모같은 인간이 대표랍시고 윤서인 따위의 인간과 함께 튀어 나와요. 

8. 이건 어찌 보면, 자신의 지역구에서 한나라-새누리-자유한국당 의원이 계속해서 당선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하는 TK 분들의 절망감과도 비슷한 겁니다. 이 바닥은 글러먹을 바닥이라는거죠. 자기가 이사를 가버려도 예전 그 동네에서는 여전히 자유한국당 의원이 나오는 것 처럼, 의사들이 업종을 바꾸고, 난리를 쳐도 이 바닥은 안 변할 거라는게 제 절망감 및 패배감의 근원에 깔려 있습니다. 

9. 그렇지만 저를 비롯한 젊은 의사들은 완전히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고 있습니다. 의사들이 쉽게 이해할 비유를 들자면, T4, N2, M1b 인 NSCLC 환자가 살아날거라고 기대하는 꼴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사람이 없지는 않습니다. 100만명에 한명도 많은 수준이라 그렇지.
그러니 의사 니들은 대체 뭘 해처먹고 있냐... 라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저희도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긴 글을 쓰는 이유가 바로 글의 목적입니다. 
도와주세요. 
청와대 청원도 좋고, 국민신문고 민원도 좋고, 심평원 민원란에 욕을 하셔도 좋습니다. 
부디 저같은 의사들이 절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적들이 쌓아 올린 성은 강고하나, 그 성을 오르려는 젊은 의사들은(이국종 교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겠지요) 너무 미약합니다. 
깨시민 여러분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의사들의 미래도, 의료의 미래도, 그리고 결국 여러분의 미래도 우울해 질 뿐입니다. 

PS. 그렇지만 도와 주시려는 분들보다 '의사들이 또 밥그릇 타령한다'고 하시는 분들이 더 많지요? 아마 안될겁니다. 우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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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없으신 분들을 위한 요약: 
1. 의료계 적폐의 상당 부분이 이기적인 일부 의사들에게서 기인한다. 
2. 의료계 내부에선 그들을 도려낼 방법이 없다. 
3. 깨시민이 양심적인 의사들을 도와서 일어나지 않는다면, 질 수 밖에 없다. 
4. 근데 이미 지고 있다. 

안될거야 아마 ... 
우린안될거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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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의사분들의 울분에 찬 답글들을 기다립니다. 우리 함께 신세한탄이나 해보죠. 마음이라도 좀 가벼워질지 모르잖아요. 

출처 본인의 우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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