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전에 겪은 일입니다.

제가 동네 헬스 센터에 다니는데요.

여기는 구조가 이렇습니다.

헬스장, 에어로빅, 스크린 골프장, 목욕시설 및 사우나, 수영장.

그 중에 저는 헬스장과 수영장 두개를 이용중인데요.

저는 헬스장 이용전에 먼저 발을 한번 씻고, 스포츠 양말로 갈아신은 후 헬스를 하기 때문에...

먼저 목욕시설에 들어가서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데, 한 중학생 정도 되는 남자애 하나가 샤워기를 틀어놓고 물을 맞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음.

가사는 샤워실 안이 울려서 잘 안들렸는데, 여튼 일본어 가사였어요.

그리고 그냥 촉인데, 저도 소싯적에 애니 좀 봤던 덕후라, 왠지 애니 주제가 같다는 느낌의 멜로디였습니다.

여튼, 그걸 보고 헬스장에 가서 약 1시간 정도 헬스를 함,

땀을 쪽 빼고, 샤워실에 들어와서 씻고나서 수영을 하려고 하는데 보니..

아까 그 샤워기 자리에서 그 녀석이 여전히 물을 맞으며 노래를 하고 있었음...

그러니깐 최소 1시간 이상 샤워기 물을 맞으며 노래를 하고 있는 셈..

설마 1시간 내내 저러고 있었겠어? 라고 생각했는데...

마침 샤워실 관리하는 아저씨가 그 녀석에게 걸어가서 한마디 함.

"아니! 학생 도대체 몇 시간째야? 계속 샤워기 틀어놓고 뭐하는거야? 젊은 학생이 물 아까운 줄 몰라?

세상에는 마실 물이 없어서 죽어가는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이하 생략 (여튼 한참 좋은 소리 하셨음)"

그러자 그 녀석,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마치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 따윈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듯...

뭔가 쓸쓸한 표정으로

"오늘은 왠지 비를 맞고 싶은 날이어서 그래요. 하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문명의 이기를 대신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라고 말함...

그때 저는 잠깐 탕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그 얘기 듣고 진짜 현웃 터질 뻔....

여튼 겨우 겨우 참고, 탕에서 나와서 몸을 간단히 씻고 수영복을 입은 후 약 40분간 수영을 하고 다시 샤워실로 입성.

그런데 여전히 그 녀석은 같은 샤워기에서 '비'를 맞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음....

그런데 그때쯤은 직장인들 퇴근 후 러쉬가 이어지는 타임인지라 갑자기 샤워실에 사람들이 엄청 많아졌음.

그래서 의도한 바는 아니었는데 빈 자리가 그 녀석 옆에 자리 밖에 없어서 그 녀석 옆자리에서 몸을 씻는데...

잘 들어보니 부르고 있는 노래가 에반게리온 파 엔딩에서 나왔던 날개를 주세요 라는 곡이었음...

그걸 흥얼거리고 있는데..

사람들은 계속해서 들어오고, 결국엔 어떤 아저씨가 그 녀석 샤워기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가 됨.

그래서 제가 한마디 했어요.

"학생. 아까 우연히 들어서 말인데... 거 뭐 비를 맞고 싶다던가, 그런거 다 좋긴 한데 지금 뒤에 기다리시는 분들 많으니깐

오늘은 그만 하고 자리 좀 비켜주면 안될까?"

그러자 그녀석 진자 아련하고 우수에 찬 눈빛으로 이렇게 말했음

"하아...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의 갈증은 가시지 않은걸요..

입으로는 채울 수 없는 갈증이라, 가슴으로 비를 맞으면, 이 메마른 가슴을 적실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뭐 어쩔 수 없죠. 오늘은 이만하도록 할까요.."

진심... 진짜 손가락 발가락 죄다 파괴되는 느낌이었고, 몸이 베베 꼬이는 걸 느꼈는데...

그 녀석 상처줄까봐 젖먹던 힘을 다해서 참았음..

제가 본것만 거의 2시간 가까이 '비'를 맞고 있었는데...

그나마 거기서 그만해서 다행이네요...

마저 씻고 나오는데 샤워실 유리 문에 이런 경고문이 있었습니다.

'물을 아낍시다. 수도용수의 낭비는 회비 인상의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라고..

어떻게 끝내야 하지...

집에 돌아오면서 혼자 머릿속으로 그녀석 대사 곱씹어 볼때는 진짜 웃겼는데..

막상 써 놓고 보니 별로 안 웃기네요.... 에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