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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아버지와 아들 : 4. 꼭뚝각시
게시물ID : readers_201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아카스_네팔
추천 : 0
조회수 : 3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6/11 14:4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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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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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모든 내용은 허구임을 미리 밝힙니다.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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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와 아들]

                                                   아카스_네팔


4. 꼭뚝각시
 
 
김씨는 평상시와 똑같은 일상을 시작한다.

"다녀올게."
"네. 일찍 들어와요."
 
둘째 녀석이 학교에서 무슨 발표회가 있다면서 아침밥도 거르고 나간 뒤였다.
 
"큰놈이 말년 휴가를 나온다고?"
 
구두주걱을 능숙하게 발뒤꿈치께로 찔러 넣으며 김씨가 물었다.
 
"네, 한 일주일 남았나?"
"그렇구먼. 그땐 오랜만에 식구들 모여서 외식이나 하자구."
"어이구, 당신이 웬일이에요?"
 
아내는 김씨의 뒷모습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문을 닫지 않고 있었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자신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대견스러웠으리라.
엘리베이터 안은 아무도 없었다. 문이 닫히자 김씨는 축축하게 젖은 콧잔등을 훔쳐냈다.
 
박과장.

벌써 일주일째, 매일 이 시간만 되면 그 아귀 같은 입을 비죽거리며 엘리베이터 저 거울속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새끼.
 
"미안하네. 최대한 노력했네만 위에서 내린 결정인데 내가 무슨 힘이 있겠나?"
"개새끼!"
 
유들유들한 성격의 김씨 입에서 험한 악다구니가 나올 법도 했다.
생각만 해도 가슴 저 안에서 핏덩이 같은 게 울컥하고 나올 것만 같다. 김씨는 도무지 소주 한잔이라도 들이붓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박과장님!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마지막으로 대차게 들이댄다고 들이댄 게 '이러실 수 있습니까?'라니. 김씨는 보란듯이 싸대기나 한대 올리지 못하고 나온 것이 못내
분했다. 아니, 더 더욱 분한 것은 박과장의 마지막 말이었다.
 
"참 답답한 사람일세. 아, 위에서 말이야. 자네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거지. 일하기엔 너무 늙었고, 직원들한테 신임도 없고...말이야. 그러니까 진즉에 신경 좀 쓰지 내 뭐랬어?"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박과장의 느끼한 상판때기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김씨가 신들린 것처럼 공장 담벼락을 따라 걷고 있었던 건 어쩌면 회귀본능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담벼락 끝에는 30년 가까이 매일마다 들락거리던 정문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지만 그것마저도 이젠 김씨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멍하니 땅바닥만 바라보다가 낮술이라도 한잔해야겠다고 걸음을 떼려던 찰라, 김씨의 귓전에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왔다.
 
"힘차게 출근하시는 한국자동차 노동형제 여러분!.."
 
정문 쪽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다.
 
"이군 목소린데?"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오늘은 지난 5월 폭력진압 책임자 처벌과 구속노동자 석방, 정리
해고 철회를 위한 출정식"이 있는 날입니다! 오늘 오후 2시, 이곳 정문에 모두 모여서 우리의 권리를 되찾고 악독한 자본과 정부의 탄압을 분쇄합시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오늘 오후 2시..."
 
벌써 수요일인가?
김씨는 더이상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돌리면서 담장 옆으로 주욱 자리를 잡고 있는 나무벤치 하나를 골라 털썩 주저앉았다.
이군의 목소리가 계속 웅웅거리며 들려왔다.
 
"지난 5월 무참히 공권력의 폭력적 진압에 의해 피를 흘리면서 잡혀간 우리 노동형제들의 석방과 유혈진압의 책임자 처벌, 그리고 전체 노동자의 1/3에 달하는 인원을 하루아침에 거리에 내몬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투쟁이 오늘 오후 두시 이곳에서 있습니다. 형제여러분! 단결합시다! 단결투쟁만이 우리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는 길입니다..."
 
그리고는 노래가 나왔다.
노조라든가, 무슨 집회 같은 데엔 근처도 가보지 않은 김씨였지만 워낙에 귀동냥으로 자주 들어서 이제는 다 외워버린 '단결투쟁가'였다.
전형적인 군가풍의 비트와 딱딱 끊어지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더 날이 서 있었다.
 
...동트는 새벽 밝아오면 붉은 태양 솟아온다 피맺힌 가슴 분노가 되어 거대한 파도가 되었다 백골단 구사대 몰아쳐도 꺾어버리고 하나되어 나간다...노동자는 노동자다... 살아 움직이며 행동하는 진짜 노동자...
 
쿵쾅거리는 박자 속에 시간이 야금야금 흘러가고 있을 때, 김씨는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이 움찔했다. 평소에 혀를 끌끌차며 빨갱이 물이 단단히 씌었다고 상종도 안하던 저들의 노래를 흥얼거리다니!
김씨는 당혹감에 휩싸였다.
노래 한 곡이 다 끝나자 이군은 목청을 몇 번 다듬더니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한국자동차 노동형제 여러분! 여러분의 주위에서 함께 일하던 수많은 형제들이 회사측의 부실 경영과 비리경영의 제물이 되어 억울하게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많은 노동형제가 길바닥에 나앉게 될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도 정리해고의 칼날에서자유롭지 못합니다! 여러분! 단결합시다! 끝까지 싸웁시다!"
 
김씨는 더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마치 저 소리는 날 들으라고 하는 소리 같지 않은가?
자신과는 조금의 관련도 없을 줄 알았던 생소한 세계가 현실이 되어 다가와 버린 지금, 김씨는 마치 자신을 조종하던 주인이 사라졌을 때 아무런 존재의 의미도 갖지 못하는 꼭뚝각시 인형처럼 세상속에 아무렇게나 쳐 박혀 있는 느낌이었다.
짧은 시간에 들이닥친 너무나 갑작스런 피곤함.
김씨는 벤치에 비스듬히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과거 속으로 보낸 불면의 밤들이 수면제처럼 눈꺼풀을 덮어왔고, 김씨는 벌써 잠꼬대처럼 입술을 실룩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꼭뚝각시.....꼭뚝...각..시라.....'
 
해가 섣불리 중천에 오른 티를 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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