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신연의 [구타유발자들] 중반엔, 홍일점 캐릭터 인정이 강원도 시골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통수단을 선택해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는 얼마 전에 자길 겁탈하려 했던 느끼한 성악교수의 벤츠이고 다른 하나는 분명 자길 겁탈하거나 그보다 더 심한 짓을 할 게 분명한 동네 건달의 오토바이입니다. 미치겠죠?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몽땅 이 모양 이꼴입니다. 그나마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 유일한 남자는 기절해 자루 안에 갇혀 있지요.
[구타유발자들]은 경멸과 혐오에 의해 지탱되는 영화입니다. 그 대상이, 자기에게 주어진 하찮은 권력이 여자들을 후려도 되는 자격증 쯤 된다고 착각하는 스노브 대학교수이건,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두들겨 패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는 골빈 깡패들이건 상관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어리석고 더럽고 불쾌하며 재수없습니다.
영화는 성악교수 영선이 뮤지컬 오디션에 참가한 옛 제자를 꼬시기 위해 강원도의 산골로 드라이브를 떠나면서 시작됩니다. 교수는 인적이 드문 개울가에 차를 세워놓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가지만 겁탈 당할 위기에 처한 제자는 중간에 달아나죠. 이들이 그냥 서울로 돌아갔다면 'A모 음대 교수, 제자 성추행 혐의로 기소'라는 제목이 난 기사가 나는 정도로 끝났을 텐데, 그게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죠. 그 뒤로 몇 시간 동안 두 사람은 친절한 척 하는 동네 건달들에게 사로 잡혀 온갖 끔찍한 고초를 당하게 되거든요.
그렇다고 이 영화의 폭력이 비슷한 구도를 다룬 [지푸라기 개]에서처럼 명확한 구도로 진행되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도 어렵고요. 일단 그런 구도를 짜기엔 도회지 문명 세계의 대표자인 교수님이 너무 재수 없잖아요. 그나마 견딜만한 인물은 특별히 나쁜 구석을 보여주지 않은 인정과 왕따 희생자 학생 뿐인데, 이들의 역할은 비교적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남은 건 원래부터 더러운 것들의 난장판뿐이죠. 이 영화 속에서 그려지는 모든 폭력은 혐오스럽고 지저분하며 우스꽝스럽습니다.
이런 혐오의 감정을 극으로 밀어붙여도 재미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는 그 이상을 원하고 있어요. 후반부에 이르면 [구타유발자들]은 끊임없이 희생자들과 가해자들을 만들어내는 폭력의 악순환에 대한 비판이 됩니다.
옳은 선택이었을까요? 가치있는 주제이긴 하죠. 하지만 전 이게 그렇게까지 올바른 선택인 것 같지 않습니다. 일단 한참 막 나가다가 갑자기 감상적인 멜로드라마로 떨어지는 한국 코미디 영화의 도식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아요. 캐릭터들의 행동에 토를 달고 설명을 늘어놓다보니 도입부에 비교적 잘 구축해 놓은 긴장관계가 깨지고요. 이야기가 지나치게 이치에 맞다보니 오히려 맥이 풀리는 경향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정말로 막 나가기엔 지나치게 사람이 좋습니다.
강원도 산골의 개울가를 배경으로 삼일치가 완벽하게 지켜지는 영화를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영화에 고유의 개성을 부여하기도 하지만 드라마를 제한하기도 합니다. 전체적으로 영화는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길고, 빈 구석을 채우고 제한된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 종종 억지로 에피소드를 만들어낸다는 듯한 인상도 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첫 번째 편집본이 2시간 50분이나 되었답니다.) 몇몇 복선들은 지나치게 노골적이거나 믿기가 어렵고 DI로 깔끔하게 다듬은 화면이 진행되는 이야기의 거친 폭력성을 담아내기엔 지나치게 세련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영화는 배우들에게 자기 능력을 화끈하게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줍니다. 앙상블이 좋은 영화지만, 전 일단 두 사람을 지적하고 싶어요. 일단 동네 깡패로 나오는 이문식은 지금까지 그가 출연한 영화들 중 가장 폭이 넓고 화끈한 연기를 보여줍니다. [공필두]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이 영화로 그 때의 실패는 충분히 커버될 테니 말입니다. 두 번째 배우는 느끼 성악과 교수로 나오는 이병준입니다. 그는 영화 내내 느끼하고 재수없는 인텔리의 일차원적인 캐리커처로 일관하는데, 그 캐리커처의 힘이 엄청납니다. 영화를 보고 나면 필사적으로 김치를 찾고 싶을 지경이에요. 특히 이 영화에서 그는 영화 사상 가장 느끼한 키스 신을 선보이는데... 직접 보시길. 제가 왜 이런 소릴 하는지 아실 겁니다. (06/05/16)
DJ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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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등등
요새 관객들은 용각산 광고를 모르나 봐요? 적어도 기자시사회 때는 아무도 안 웃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