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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차대전기 사이의 발칸국가들 1. 루마니아
게시물ID : history_2024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역둔토
추천 : 11
조회수 : 1086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5/04/04 04:35:12

이전에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중심으로 쓴 적이 있는데 그 때 부족했던 국가들의 보충을 하고자
써봅니다.
특히 폴란드는 아예 빼먹고 루마니아는 매우 부실해서... 이번에 보충하고자 합니다. 가볍게 읽어주세요!


1차 세계대전 직후 루마니아는 전쟁중에 협상국 중에서 유일하게 동맹국에게 항복한 굴욕을 씻고 승전국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승리의 대가로 루마니아는 전후에 전전에 비하여 영토와 인구가 약 2배로
늘어나게 됩니다. 이후 루마니아의 영토에는 많은 부침이 있었는데, 지도로 간략하게 대체하겠습니다.
map-of-jewish-communities-in-romania.jpg
이 지도가 전쟁 전의 루마니아 입니다. 옅은 초록색이 루마니아 왕국의 영토입니다.
ㄴ의 형태로 비교적 자연적인 국경으로 이루어진 편이었습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와의 북쪽 국경은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산맥이 경계였고 
다운로드.jpg매우 험준한 산맥으로 지도에서 찾기도 수월합니다.
불가리아와 러시아의 국경은 다뉴브강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전쟁전의 국경의 문제는
Romania_1930_ethnic_map_EN.png
저 국경 밖에 루마니아인이 다수인 지역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밖의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지배아래에 있었고 러시아가 지배하던 베사라비아 지방에서도
루마니아인이 다수인 지역이 꽤 있었습니다. 불가리아 영토에서도 -밑에 분홍색과 베이지색 부분-
루마니아인이 유의미한 수치를 차지하는 지방 -남 도브루자-있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아싸리(?) 루마니아인만 살면 문제가 될 것이 없는데 트란실바니아 지방에는 
헝가리인, 독일인 일부지역에서는 유태인이 일정 부분 이상 살고 있었고 베사라비아에서도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불가리아인,터키인, 타타르인등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남도브루자에서도 불가리아인이 다수였고 일부지역은 오히려 터키인이 최대민족인 지역도 있었씁니다.
-분홍색 지역-
협상국에게 트란실바니아-베사라비아-남도브루자를 약속받고 참전한 루마니아는
루마니아 민족의 통합이라는 기치를 달성했습니다. 


1. 정치적 흐름

이런 영향때문인지, 루마니아는 1930년대에 발칸 국가에서 유대인 배척 운동을 가장 격심하게 일으켰으며
유일하게도 대중적인 파시스트 운동이 벌어진 나라였습니다. 이런 혼동 속에서 카롤 왕은 
야심과 조작으로 독재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난맥 속에서 루마니아는 양차대전 사이에서
농촌의 저생산성, 농촌인구 과잉, 저개발된 농촌, 낮은 산업화 수준의 경제적 문제 또한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쟁 직후인1922~1928년까지는 기만적인 자유주의적 통치가 행해진 짧은 시기로 이시기의
실패가 궁극적으로 루마니아의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루마니아 왕국의 전신인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 공국인 성립된 1865년 직후인 1866년에
채택된 헌법은 서유럽의 정치 제도를 본따서 만든 것이었으며, 의회의 권한이 비교적 강하지만,
군주의 독자적인 영역도 분명히 인정하던 벨기에의 것을 참고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 1922년까지는 이 헌법은 그저 장식에 불과했으며 루마니아의 정치에서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정부와 의회는 전통적인 대귀족들에게 장악되었으며 
선거는 부패된 기관에 의해 감독되어 손쉽게 조작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내각은 민중의 염원에
의하여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대귀족가문 같은 상층계급의 비밀스런 정치적 타협에 의하여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귀족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루마니아 보수당은 1차대전 이후 큰 타격을 받았는데,
이는 보수당을 이루던 귀족-지주들이 친독일적 경향을 견지하였기 때문이며, 이런 정치적 입장으로
인하여 종전후에 대영지의 분할에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런 귀족-지주층의 타격에 힘입은 민족 농민당의 탄생은 루마니아 정치에 있어서 두드러진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결과로 1922년부터 1928년 기간동안 보수당을 대체한 자유주의자들이 득세하게 되었는데
이는 루마니아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가 아니라, 이들이 대전기동안 협상국을 지지했고, 루마니아 왕
-페르디난트 1세-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할 야당이 분열 되었고 
선거조작(..)과  탄압적인 경찰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의 신정부는 1923년에 새로운 헌법을 채택하고 루마니아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런 자유주의자들의 획책은 이들의 선민주의나 혹은 강력한 민족주의 사상에서
근원하였습니다. 전쟁 후 병합된 지역 -소수민족들이 존재하는-에서는 이런 헌법에 강력하게
반발하였고 이런 반발에 저항하기 위해 루마니아 민족주의 정당들이 탄생하였습니다. 또한 지방의 농민들 
또한 도시의 자유주의자들에 반대하였는데 이 두개의 정치적 흐름이 하나로 합쳐진 결과가
민족 농민당 이었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을 후원하던 페르디난트 왕이 사망하자 민족 농민당은 전국적인 저항을 이끌어내어
어린 왕 -미하이 1세-의 섭정인을 굴복시켜 새 정부를 구성하게 됩니다. 
1928~1930년간 이어지는 민족농민당의 집권은 루마니아의 다수를 구성하던
농업인구.jpg

농민들의 기대를 받았으나 농업 문제 해결에 실패함으로써 실망을 안겨주게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들은 농산물 수출에 부과되던 중과세를 철폐하여 농산물의 수출을 장려함으로써 
국내 곡가를 올리는 정책과 더불어 농민조합의 운용을 장려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재분배된 토지 매매를 허락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이러한 정책들은 
토지 집중 현상을 다시 일으켰고 부농 계층을 탄생시켰습니다.
하지만 대다수 농민들은 몰락하여 농업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하였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1930년의 대공황은 루마니아의 농산물 수출을 급감시켰고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여 농민에게 지급할 농업 보조금을 충당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유럽에서 대규모 외자를 도입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는 부분적으로
농민의 부담을 겸강시켰을 뿐이며 루마니아와 같이 부패하고 후진적인 정치체제 하에서는
필연적으로 부패를 조장하였습니다. 정부의 상당수가 서유럽 정부, 자본가, 은행들과 결탁하였고
민족 농민당은 급속도로 부패하여 민중의 지지를 상실하였습니다.

또한 민족농민당 내부에서 민족주의자와 농민당 출신 간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정쟁이 심각해졌는데,
이것은 민족주의자들이 민족주의적 색채가 농민당 출신에 비하여 강했으며, 이들의 주된 적은
트란실바니아에 거주하는 헝가리인 지주층에게 적대적이었으나 농민당 출신들은 이런 민족주의적
문제 보다는 도시내 자본가, 자유주의자들을 대귀족과 결탁한 가장 주된 적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농민당이 내부에서 비교적 평등한 횡적인 집단이었던 것에 반하여
민족주의자들은 매우 종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었고 이러한 두 집단의 상이함은 분열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난국 속에서 미하이 1세의 아버지 카롤이 왕위를 요구하였습니다.
http://ko.wikipedia.org/wiki/%EC%B9%B4%EB%A1%A4_2%EC%84%B8
-위키피디아 카롤 2세 참조, 이런 상황이 어째서 벌어졌는지..-

카롤은 정치적 책략에 매우 능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독재에 방해가 될 정당들의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민족농민당과 자유당의 젊은 지도자들을 포섭하여 분열을 일으켰고 이들과의 대립을 위해
민족주의자, 파시스트 조직을 후원하였습니다. 경제적 어려움과 루마니아가 처한 외교적 고립
-소련, 헝가리, 불가리아 모두 루마니아에 적대적-, 특히 소련의 팽창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가중된 극우주의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강력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행정적 부패를 없애고 유태인들을 제거하며 모든 농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할 것을 약속하였는데
많은 루마니아인들이 이런 약속에 현혹되었고 특히 과격한 젊은 학생 조직이 파시스트 확산에
크게 일조하였습니다.

 이런 혼란이 지속되자 카롤은 의회 정치의 무능함을 핑계삼아 군주 독재를 선언하였습니다.
1923년 헌법이 의회가 아닌 군주의 계엄령과 칙령에 의하여 폐지되었고 
1938년 군주독재와 조합주의에 기초한 헌법을 선포하였습니다. 이런 군주 독재하에서
카롤은 민족농민당, 자유당, 파시스트 들을 모두 배재하였고 그에게 예속된 
'민족 재건 전선'이라는 조직을 구축하였습니다. 카롤의 정치적 음모에 의해 구성된
이 조직은 전통적인 대귀족부터 그에게 충성하는 파시스트까지 다양한 구성원들로 이루어졌으나
매우 무능하였고 어떤 리더십이나 정치적 조언을 국왕에게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2차대전기 동안 루마니아의 국가적 위기동안 국민들을 응집하거나 이끌지 못했고 
1945년 소련군이 루마니아로 진주할 때까지 무능과 부패로 루마니아를 절단내었습니다.


경제적 흐름

 1차대전 이전 루마니아는 농업, 임업, 원유 생산에만 국한된 1차 산업위주의 국가였다.
1차대전 말기와 2차대전 시기까지 새로운 산업이 발달되기 시작되었는데 부분적이고 기초적이기는 하나
섬유공업, 제당업, 화화공업, 금속공업 등이 발전하였고 철도 부설이 증가하였다.

 그러나 루마니아의 농업 문제는 다른 발칸 국가들의 경우보다 더욱 심각하였고, 주된 요인은
불평등한 토지 소유와 생산성의 후진성이었습니다.
농업인구.jpg
생산지수.jpg

또한 급격한 인구증가로 농지가 지속적으로 재분할되고 축소되었는데 -상속에 의하여-
1941년 조사에 의하면 58% 농가가 3ha 미만의 경작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1933년 통계에 의하면
농업인구의 44%의 노동력만이 실제로 농업생산에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농인구가 많았던 이유는 루마니아의 토지 개혁이 계획된 것처럼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분배된 토지의 매매가 허용되었고 따로 빈농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토지가 팔려 집적이 재현되었습니다. 또한 빈농들이 매매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토지개혁후 빈농들의 평균 경작지 규모가 2ha에서 2.7ha로 0.7ha 증가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토지 집적도 해결되지 않아 1941년 통계에 의하면 100ha 이상 소유한 대지주의 소유지가 
총 사유지의 20%에 달했다.

토지 분배 방식에서 실패한 루마니아는 토지 생산성을 늘려 빈농의 처지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위 도표에 보듯이 루마니아의 토지 생산성은 매우 낮은 편이었고 재배도 특용작물이나 환금작물
보다는 곡물에 한정되어있었습니다. 
원인은 비료사용이 매우 제한적이었고 -공업의 미비한 발달로- 그로 말미암아 윤작제가 시행되는
토지가 상당수 있었으며 종자개량 또한 미흡하였으며 사료작물 재배 부족과 육종기술의 부족으로
가축 또한 질이 매우 낮았으며 기계화가 부진하여 이런 질 낮은 가축에 의존하여 했습니다.
더불어 공업 발전의 미비로 양질의 농기구와 농기계가 매우 부족하였고 조밀하게 나눠진 토지제도
때문에 저수지 또한 매우 부족한 총체적 난국이었습니다.
더욱이 수출을 장려하여 곡가를 높이려는 정책이 대공황에 의해 실패하게 되면서
폭락한 곡가은 농민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런 농업위주의 국가, 미발전된 공업 때문에 루마니아의 은행업은 국영 은행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국영 은행의 자금 지원은 상공업 부분에 집중되었고 농민층에게는 자금 부족, 의도적인 외면 등이
겹치면서 농민은 높은 이자의 사채에 예속되었습니다.

여기에 더불어........
루마니아의 세입은 직접세, 소득세 징수보다는 간접세 위주로 편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루마니아의 국가 수입은 대다수 농민에 의해 지탱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루마니아는 히틀러의 독일 경제에 예속되었습니다. 
독일은 루마니아에 곡물생산과 광물, 원유생산을 장려하여 이를 독일 산업, 군사 발전을 지탱하는
용도로 사용하였고 루마니아 산업발전을 이런 1차 생산품을 독일로 반출하기 위해 가공하는
식품가공업, 기초적인 제련공업 정도로 한정시킬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3. 사회적 흐름

 영토적 확장이후 루마니아인구의 73%만이 루마니아인이었고 헝가리인 약 8%,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독일인들이 각각 4~5%정도 였습니다. 루마니아는 영토를 획득하는 대신 국제사회에
소수민족 대우 정책에 조인했지만, 양차대전 사이에 소수 민족들은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1930년대부터 유태인들은 파시스트들에 의해 가혹한 탄압을 받았고, 자유주의자들과 농민들에게는
외면받았으며 우크라이나인들은 루마니아의 차별적인 행정 조치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독일인들은 히틀러 집권 이후 나치즘의 선동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헝가리인들은 트란실바니아의 지배층으로 지역 루마니아인들의
증오를 받고 있었으나 인종적인 탄압은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이는 루마니아 지배층이 이들의
협조를 얻기 위한 정책이었습니다.

양차대전 사이 루마니아에서 계층 분화와 불평등한 상태는 발칸 국가 사이에서도 심각한 편이었습니다.
빈곤한 농촌에 대비하여 도시는 비교적 부유한 것을 비롯하여 루마니아 인구의 50% 이상이 
문맹이었고 -농촌에서는 그 비율이 80% 이상되기도 하였다.-
신생아의 20%가 1세 미만에 사망하였다. 
특히 농촌은 대공황 시기 경제적 어려움으로 생활 수준의 후퇴가 매우 현저하여 
부족한 식량과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질병과 사망율이 급증하였다.
고등교육을 받는 비율이 인구의 10%에 미치지 못하였으나 고등교육을 이수하는 대부분의 학생이
루마니아에서 천시받던 농업에 관련된 농학이나 루마니아에서 미발달되어 낮은 대우를 받는 기술, 공학
보다는 정부의 관료직으로 진출하였다. 이것으로 루마니아의 산업발달은 매우 저해받았으며
관료의 숫자가 많아짐으로 하여 국가의 재정수지가 악화되었고 많은 하급 공직자들의 임금 수준이
전쟁 전 수준으로 후퇴하여 하급 공직자들을 저소득층으로 전락시켰다.
하급공직자들의 저소득층화는 자연적으로 부패를 낳았고 취약한 경제구조에 일익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현상으로 루마니아의 공직자들이 파시스트 운동과 유태인 배척 운동에 더욱
쉽게 물드는 원인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혼자 정리하다가 올려봅니다.
굳나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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