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1. 4일 월요일
활명수, 박카스, 소화제 10,700원
놀이공원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는 7시면 집에 온다.
요즘 부쩍 속이 불편한지 소화제를 한아름 사왔다.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르겠다.
11.6일
싱크대마개 2,000원
순대국 8,000원
라면, 우유, 소세지 4,270원
반지하방 싱크대에서 역한 냄새가 올라온다.
9년째 살고 있는 이 집의 냄새는 아직도 어렵다.
동네 재래시장의 어귀에는 착한가격업소가 있다.
순대국이 싸고 푸짐해서 2인분을 포장했다.
근처 마트에 들러 5개들이 라면과 소세지, 또 우유를 샀다.
당뇨로 몸이 불편한 언니는 우유를 좋아한다.
하얀 우유를 마시면 몸 속이 깨끗해진다고 믿는다.
내일모레 마흔인데.
11.7일
식빵 1,950원 잉크 8,000원
오뎅 2,200원 떡 3,000원
천원짜리 우유식빵을 살까 하다가
밤이 송송 박힌 밤식빵을 샀다.
오뎅 한봉지와 엄마가 좋아하는 바람떡도 샀다.
몇몇 동인지에 만화를 그리고 있다.
잉크가 떨어져 며칠이나 그림을 못그렸다.
11.8일 금요일
프리마 3,140원
바지락 6,000원
저녁은 조개탕을 끓일까 해서 바지락을 한바구니 샀다.
봄이 제철인 바지락이 너무 잘아서 괜히 산 듯 싶었다.
오늘은 웬일인지 커피믹스를 할인하지 않아
프리마만 따로 샀다.
언니가 알려준 다방커피의 황금률은
커피1 프리마2 설탕1.5
11.9일
음식물쓰레기 봉투 1,300원
식빵 1,000원 우유 1,050원
꽁치 1,900원 쥬스 2,450원
미역 1,550원 마요네즈 2,180원
콜라 900원 상추 1,740원
깻잎 500원 햄 2,110원
내일은 엄마생신, 어제 먹다남은 바지락이 냉동실에 있다.
조갯살을 넣고 미역국을 끓여드려야겠다.
과일값이 너무 비싸 비타민은 쥬스로 대체한다
독일산 삼겹살이 두 근에 만원밖에 안했지만 쌈만 담았다.
정육코너는 지나가지 말아야한다. 속만 쓰리다.
입이 심심할때 우유식빵에 마요네즈를 발라먹으면
맛이 꽤 좋다. 꽁치는 오랜만에 먹는 생선,
비록 캔이지만.
11. 20일
우유 700원 쑥갓 930원
콜라 1,800원 호빵 4,000원
상추 1,850원 깻잎 500원
잘아서 욕했던 바지락이 아직도 남았다
쑥갓을 넣고 칼국수를 해먹을 생각에 행복했다.
요즘 쌀쌀해진 날씨 탓인지
동네 편의점마다 호빵을 팔기 시작했다.
충동구매는 오랜만이다.
쌈 하나면 반찬 필요없다는 엄마는
전생에 토끼였나보다. 풀이 좋단다.
11. 21일
족발 19,000원
오늘은 엄마의 월급날.
고기를 한달에 한번 먹으면
음식 앞에서 사람이 겸손해진다.
소자 19,000원. 중자 24,000원. 대자 30,000원
가격 앞에서도 그렇다
11. 22일
왕뚜껑 2,040원 소세지 1,000원 후랑크 1,000원
밥생각이 없다는 엄마는 이내 잠드셨다.
언니와 동네 편의점에 들러 라면을 먹었다
우리의 저녁이 전자렌지 안에서 빙글빙글 돌아갔다.
11.23일
우유 2,140원 소주 4,400원
참치 1,880원 요구르트 990원
참치를 넣고 김치찌개를 끓였다.
소주가 쓰다 해도 세상보다는 아니다.
아빠 그렇게 보내고
우리 셋은 술이 세졌다
여자 셋이 네 병이나 마셨다.
이틀전 들어온 엄마 월급은
집세 38만원 공과금 20만원
언니 약값에 쌀 한포대 김치 몇포기
사고나니 남는게 없다
석달 뒤 2014년 2월.
엄마는 팔을 다쳐 깁스를 했고 일을 그만두었다.
9년째 38만원이었던 월세가
지난달부터 50만원이 되었다.
십년을 내리 써 온 가계부를 보니 코 끝이 찡하다.
2014년 2월 20일의 영수증
번개탄 2개 1,200원
참숯 1,500원
편지봉투 20원
엄마가 죽자고 했다.
나는 울었고, 언니는 번개탄을 사왔다.
그날 밤, 세 모녀는 세 선녀가 되었고
우리 시체는 일주일 뒤에 발견되었다.
마지막 월세 70만원과 함께
추신.
십년을 기록한 가계부중 언론에 공개된 두 장의 사진을 토대로
그들의 일상을 상상해봅니다. 본문은 픽션입니다.
만성 소화불량과 퇴행성 관절염으로 늘 약을 달고 사는 엄마
당뇨와 고혈압으로 거동이 불편한 큰딸.
몇권의 토익책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취업이 간절했을 둘째딸.
언니를 간병하며 줄곧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계를 도왔고, 프로급의 드로잉 실력으로 동인지에 연재도 했으며,
수많은 습작노트를 유품으로 남겼다는데...
한번도 밀린 적 없다는 월세와 주변 이웃들의 따뜻한 평판이 그들의 죽음을 더 슬프게 합니다
늙은 엄마의 월급은 십년동안 고작 30만원 올랐습니다.
시장을 볼때는 2만원 이상 써본 적이 없었으며
월급의 반은 방세와 공과금. 나머지 반은 약값과 식비.
저금이나 여행이나 연애는 남들 하는거만 보았겠지요.
외식은 한달에 한번.
한달 외식비보다 더 비싼 고양이사료,
고양이를 얼마나 예뻐했을지 모릅니다
장바구니에 돼지고기 한번 담기가 그렇게 어려웠는지
상추랑 깻잎만 사는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지
한참동안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가슴이 미어져 눈물이 흐릅니다.
옷 한 벌, 영화 한 편, 치킨 한 마리도
사치인 이웃들이 여전히 우리 곁에서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2천만 노동자중 절반은 월급이 200이 안됩니다.
천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이 못배우고 무능하고 게을러서 그럴까요?
긴 글을 읽어주신 고마운 여러분,
실천하지도 못할 공약을 내세우는 늙은 여우들에게 표를 주지 마세요.
결정은 우리가 하되 결과도 우리 몫입니다.
만화가가 꿈이었던 둘째딸의 넋을 기리며...
그들의 슬픈 죽음을 잊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