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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 나쁜 날
게시물ID : freeboard_20328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택시운전수
추천 : 11
조회수 : 1017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24/09/29 08:24:09

임기사는 지독한 숙취에 눈을 떴다. 전날 일찍 자려고 마신 술이 화근이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새벽 1시도 안 된 시간. 일을 나가려면 아직 두 시간 이상은 더 잘 수 있는 시간이었다. 냉장고에서 찬 물을 꺼내 컵에 따라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자 띵한 통증이 머리를 강타했다. 숙취때문인지 찬 물때문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내와 아이들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들과 딸의 얼굴을 번갈아 한 번씩 쓰다듬어 준 후 아내의 옆에 누웠다. 그리고 슬그머니 아내를 끌어 안았다. 잠에서 깬 아내가 뒤척이다가 임기사의 팔을 밀어냈다.


"아이~ 왜 그래?"


"좋으니까 그러지~"


임기사는 부러 더 세게 아내를 끌어 안았다.


"자기는 어제 술 먹고 일찍 자서 모르지? 어제 애들이 늦게까지 안 자는 바람에 나도 좀 전에 겨우 잠들었어. 나 피곤하니까 그만 하고 그냥 자요."


아내는 임기사의 팔을 더 세게 뿌리치며 말했다.


"에이~ 알았어."


임기사는 다시 자리에 누웠지만 통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자는 것을 포기하고 휴대폰을 들고 거실로 나온 임기사는 소파에 앉아 자주 가는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을 했다. 대부문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어서 그런지 새로 올라오는 글은 없었다. 요즘 이 커뮤니티 사이트에 택시운전수라는 사람이 "초보택시 경험담"이라는 글을 올리기 시작했는데 같은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임기사로서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글이어서 요즘 그 글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던 터였다.


"오늘은 새로 올라온 글이 없네."


임기사는 한동안 커뮤니티 사이트에 올라온 글들을 좀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를 타기 시작했다. 아내가 봤다면 커피 좀 그만 마시라고 한 소리 했을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알콜이 휘저어 놓은 뇌를 깨우려면 카페인이 필요했으니까. 커피를 마시면서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있던 임기사는 어느덧 3시가 다 돼가는 시간에 깜짝 놀라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시작했다. 이번 주는 주간 근무라 새벽 4시까지는 출근해야 했다.


임기사는 오늘따라 출근하기가 싫었다. 그냥 집에서 아내 엉덩이나 두드리면서 쉬고 싶었다. 그러나 잘리지 않으려면 출근해야만 했다. 요즘들어 택시 손님이 줄어서 사납금을 못 채우는 날이 많아지자 K부장으로 부터 한 소리를 들은 터였다. 게다가 며칠 전 몸이 안 좋아 하루를 쉬었기 때문에 오는 일요일에도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도 쉬어버린다면 K부장은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하다.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 임기사는 어제 집 앞에 세워둔 공유 자전거를 찾았다. 그런데 누가 이미 타고 갔는지 공유 자전거가 보이질 않았다.


"에이 씨. 누가 타고 간거야?"


다시 공유 자전거가 세워져 있는 곳까지 가려면 한참을 걸어가야했다. 집 앞에 자전거가 있을 줄 알고 느긋하게 준비를 하고 나왔는데 아침부터 재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임기사는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이제 날씨가 제법 선선해져서 걸어도 땀이 안 난다는 점은 좋았다.


공유 자전거가 많이 세워져 있는 공터에 도착한 임기사는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평소같으면 서 너 대의 자전거가 세워져 있어야 할 공터에 오늘따라 자전거가 한 대도 없는 것이었다.


"아니, 오늘 무슨 날인가? 왜 이렇게 재수가 없지?"


임기사는 혹시 킥보드라도 있는 지 공터를 살펴보았다.


"옳지! 저기에 하나 있네."


공터 한 구석에 쓰러져 있는 킥보드를 발견한 임기사는 기뻐했다. 평소 킥보드는 위험해서 쳐다도 안 보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었다. 이거라도 타지 않으면 회사까지 30분 넘게 걷거나 택시를 불러야 하니까. 아직 심야할증 시간이기 때문에 택시를 탄다면 만원 가까운 요금이 나올 것이다. 출근하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임기사가 휴대폰 앱을 켜고 QR을 찍으니 배터리 경고등이 떴다. 그래도 15분이면 도착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싶어 결제를 진행했다. 이윽고 임기사는 한적한 도로를 킥보드를 타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저 언덕만 지나면 회사가 나온다. 그때 타고가던 킥보드가 경고음을 내더니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언덕 중간에서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었다.


"에이 썅!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임기사는 도로 한 구석에 킥보드를 거칠게 세우고는 운행종료 버튼을 눌렀다. 킥보드가 반납처리되고 임기사는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회사까지 가려면 100미터 정도 언덕길을 올라야 했다. 언덕을 오르자 선선한 날씨임에도 어느덧 임기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회사에 도착한 임기사는 출근부를 작성하고 운행할 택시의 시동을 걸어 엔진을 예열시키기 시작했다. 엔진이 예열될 동안 자판기 커피를 한 잔 하는 것이 임기사의 루틴이다.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커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자판기가 동작을 멈추자 임기사는 조심스레 종이컵을 꺼냈다. 그러나 종이컵에는 뜨거운 맹물만 들어있었다. 자판기 관리는 K부장의 소관이다. 아무래도 커피 채우는 것을 깜박했나보다. 


"에잇! K부장 이 새X는 지 일은 제대로 못하면서 남 갈구기나 하고."


임기사는 물은 바닥에 버리고 빈 종이컵은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저 넣으며 크게 혼잣말을 했다. 어차피 듣는 사람도 없겠다 K부장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고는 차에 올랐다.


임기사는 오늘도 홍대 쪽으로 가 볼 요량이었다. 어제 홍대에 갔다가 새벽시간에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모습을 봤고 그 곳에서 쏠쏠하게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홍대로 가는 도중에 콜이 오거나 길빵손님(길에서 손을 들어 택시를 잡는 손님)이라도 있으면 태우고 없으면 홍대에서 손님을 기다려 보기로 했다.


택시는 차도 없고 사람도 없는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다. 앞에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길래 임기사는 속도를 줄여 택시를 멈췄다, 횡단보도에 서있던 젊은 남자가 길을 건너려다 임기사의 택시를 보더니 택시를 향해 걸어와 뒷문을 열고 물었다.


"아저씨 이거 타도 돼요??


"그럼요, 어서 오세요. 어디로 모실까요?"


임기사는 반색하며 말했다. 택시 운행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첫손님을 태우게 된 것은 그동안 있었던 재수없던 일들이 액땜이 된 것일까? 그러나 손님은 임기사의 말은 들은 척 만 척 하며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임기사는 다시 한 번 물어야 했다.


"손님, 어디로 모실까요?"


"어, 직진이요."


손님은 여전히 전화통화를 하며 건성으로 말했다.


'어린 노무 자식이 싸가지 없게..'


임기사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며 엑셀을 밟았다. 택시가 달리는 동안 차 안에는 손님의 통화소리만 들렸다. 조용한 차 안, 간혹 수화기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봐서 아마 여자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리라. 두번째 교차로를 지날 때였다. 통화를 하던 손님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저씨! 여기서 좌회전이요!"


그러나 이미 택시는 교차로를 통과한 뒤였다.


"아저씨, 택시를 너무 빨리 모는 거 아녜요?"


임기사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지가 전화통화하느라 정신이 팔려 어디로 가야할 지 알려주지도 않고서 규정속도 지켜가며 운행하고 있는 나에게 뭐? 과속한다고?'


임기사는 한 마디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마음 속으로 참을 인(忍)자 하나를 새기고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턴해서 돌아가 드릴까요?"


"당연하죠."


손님은 퉁명스럽게 말하고 다시 통화를 이어갔다. 그 뒤로도 손님은 가끔 우회전이요, 좌회전이요, 이런 식으로 방향만 말할 뿐이었다.


"저기 저 아파트로 가주세요."


손님이 길 건너편에 있는 아파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임기사는 좌회전을 조금 크게 돌아 유턴하듯이 아파트 입구에 정차를 했다. 그리고 미터기를 중지시켰다. 그러자 손님이 짜증내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 달라고요."


임기사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후진을 해서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아파트 안에 들어가서도 방향만 말하던 손님이 세워달라는 곳에 택시를 세우자 손님은 계산을 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미터기에 찍힌 요금은 아까 아파트 입구에서 정지시킨 그대로였다. 정지를 시키지 않았다면 2~300원은 더 나왔을 터라 임기사는 짜증이 났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택시에서 내리는 손님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손님은 대꾸도 없이 택시가 흔들릴 정도로 문을 세게 닫고는 가버렸다.


"아니! 저 새X가!"


임기사가 한 마디 하기 위해 안전벨트를 풀고 차 문을 여는 동안 손님은 이미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 버렸다. 임기사는 혼자서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어휴~ 참을 인 자 두 개째라서 넌 산거다. 세 개였으면 넌 뒤졌어."


첫 손님부터 심상치가 않다. 임기사는 오늘 일진이 사나우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택시운행을 시작했다.


홍대 클럽거리로 가니 젊은 남녀들이 자신을 뽐내기 위해 저마다 화려한 차림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어떤 여성은 속옷인지 겉옷인지 구분도 안 되는 옷을 입고 몸매를 다 드러내고 있기도 했다. 홍대 클럽거리를 한 바퀴 다 돌 무렵 콜이 들어왔다. 임기사는 기왕이면 젊은 여자 손님이 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손님위치로 택시를 몰았다. 손님위치에 도착하니 남자손님 세 명이 택시 뒷자리와 옆자리에 올랐다. 손님들이 택시에 타는 순간 술냄새와 담배냄새가 진동을 했다. 임기사는 순간적으로 코를 틀어 막고 싶었지만 손님 앞에서 내색하지 않고 택시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편도 1차선 도로를 천천히 운행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택시가 클락션을 울리면서 상향등을 여러 번 켜길래 왜 그러나 싶어 봤더니 빨리 가라는 듯이 임기사의 택시 뒤에 바짝 붙어있었다. 도로가 2차선으로 넓어지길래 오른쪽 차로로 비켜줬는데 횡단보도에 보행신호가 들어와서 임기사는 차를 멈췄지만 뒤의 택시는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달려나갔다.


"어휴, 뭐가 그렇게 급하다고 저러는지.. 저런 놈들 때문에 다른 택시기사들까지 싸잡아서 욕을 먹는다니까요."


임기사는 옆에 앉은 손님에게 말을 걸어 봤지만 손님은 대꾸도 안하고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머쓱해진 임기사는 묵묵히 운전만 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하자 손님들은 택시비를 계산하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또 문을 세게 닫았다.


"아니, 택시 문짝하고 무슨 원수가 졌나? 왜들 이렇게 문을 세게 닫는대?"


차 안에 진동하는 술냄새와 담배냄새를 빼기 위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면서 달리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비가 들이치자 임기사는 급하게 창문을 올려야 했다. 이렇게 갑자기 비가 오는 날은 길빵손님도 많기에 임기사는 길에 서 있는 사람들을 주의해서 보며 운행을 했다. 잠시 후 버스 정류장에서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드는 손님이 보였다. 


그런데 짧은 반팔과 반바지로 드러난 팔뚝과 허벅지에 문신이 잔뜩 새겨진 남자였다. 쎄한 기분을 느낀 임기사는 빈차로 되어있는 표시등을 얼른 예약으로 바꾸고 그 손님을 지나쳤다. 사이드미러로 보니 흔들던 손을 내리고 허탈한 표정으로 택시를 처다보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임기사는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 이미 험한 꼴을 많이 당한 터라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다시 운행을 했다.


그때 콜이 들어왔다. 임기사는 수락버튼을 누르고 손님위치가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손님위치로 네비가 안내를 하는데, 좀 전에 지나친 남자가 서있던 곳이었다. 손님위치에 도착하니 아니나 다를까 아까 그 문신한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임기사가 그 손님 앞에 택시를 세우자 차에 타면서 손님이 물었다.


"사장님, 좀 전에 여기 지나가지 않으셨어요?"


임기사는 등에 식은 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대답했다.


"예, 맞아요. 콜 받고 가고 있었는데 손님이 콜을 취소하는 바람에 다시 콜을 받았더니 여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손님 지나치면서 예약을 안 키고 있다가 손님한테 혼란을 드린 것 같아서 죄송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네요."


임기사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변명거리를 생각해 내고는 대답했다. 거짓말을 한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우선은 살고 봐야 할 일이었다.


"아, 그래요? 전 또 제 문신을 보고 승차를 거부당한 건가 생각했어요."


애써 준비한 변명이 먹힌 것 같자 임기사는 속으로 안도하며 말했다.


"왜요? 문신 멋있으신데요."


"어휴~ 멋은요 무슨~ 철없던 시절에 했던 건데 지금은 후회만 돼요."


"하긴, 우리 나라에서는 아직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긴 하죠."


손님과 대화를 해보니 의외로 괜찮은 사람 같았다. 임기사는 괜히 겉모습만 보고 안 좋게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젔다.


"저, 사장님 제가 좀 늦어서 그러는데 조금 빠른 길로 가주실 수 있나요?"


뒷자리의 손님이 임기사에게 부탁하자 임기사는 흔쾌히 말했다.


"어휴 그럼요, 네비가 안내하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이니까 조금 속도를 내겠습니다."


그리고 임기사는 네비의 안내에 따라 운행을 하되 속도위반 카메라가 있는 곳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그 구간을 지나면 다시 속도를 올리는 식으로 운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신호대기에 걸려 임기사가 차를 멈추자 뒷자리의 손님이 작게 중얼거렸다.


"신호 X나 많네."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자 임기사는 다시 속도를 내서 달리기 시작했다. 여러 개의 신호등이 있었지만 그 신호등들이 파란 불일 동안 서 너 개의 신호등을 지나고 신호등이 빨간 불로 바뀌자 차를 세우는 임기사의 귀에 다시 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X발, 신호 X나 많네."


그 뒤로도 임기사가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울 때마다 손님은 욕을 하며 불평을 했다. 임기사는 계속 듣고 있기가 불편해서 손님에게 한 마디 했다.


"손님 지금 저 들으라고 일부러 그러는 겁니까?"


"사장님, 제가 빠른 길로 가달라고 부탁했잖아요. 근데 이렇게 신호가 많은 길로 오면 어떻게 합니까?"


임기사는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그래서 빨리 가드리고 있잖아요? 그럼 신호위반이라도 하라는 말입니까?"


"애초에 신호가 없는 골목길같은 곳으로 가셨어야죠."


"그런 골목길은 속도를 못 내잖아요."


그러자 손님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속도를 못 내도 신호에 걸려서 서있는 것 보다는 그런 길이 훨씬 빨라요. 이런 건 상식인데 그것도 모르고 어떻게 택시를 하신다고 그러세요?"


임기사는 자신보다 훨씬 어린 손님에게 이런 소리를 듣자 속에서 천불이 났지만 꾹 참고 묵묵히 택시를 운행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을 하자 손님은 결제를 하고 내리면서 문을 세게 쾅 하고 닫았다.


임기사는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택시 운행을 할 수가 없어서 잠시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아침부터 운수가 너무 나빴다. 이대로 택시 운행을 계속 하다가는 더 안 좋은 일을 당할 것만 같았다. 임기사는 택시 회사를 향해 택시를 돌렸다. 이대로 차를 회사에 세워두고 퇴근할 생각이었다. K부장이 이걸로 또 지X을 하면 부장의 얼굴에 사표를 던져주리라 다짐했다. 그런데 아침 출근시간이라서 그런지 회사로 돌아가는 길은 지독한 정체였다. 정말로 마지막까지 운수 나쁜 날이었다.


임기사가 집으로 돌아오니 9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내는 아이들을 등교시키러 나간 모양이었다. 임기사는 냉장고를 열어 캔맥주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맥주 한 캔을 안주도 없이 다 마시고 나니 알딸딸하게 취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서 아내가 들어왔다. 아내는 임기사를 보더니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그럴 일이 있어. 애들은 학교갔어?"


"그럼 학교에 갔지 어디에 갔겠어?"


아내의 퉁명스러운 대꾸에 임기사는 짜증이 확 솟구쳤다.


"진짜 너까지 왜 이러냐? 오늘 왜 다들 날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냐고!"


임기사가 갑자기 화를 내자 아내는 깜짝 놀라며 격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임기사는 애먼 아내에게 화를 낸 것이 미안해서 사과했다.


"미안해, 그냥 그런 일이 좀 있었어."


아내는 식탁에 놓인 빈 맥주캔을 보더니 말했다.


"빈 속에 안주도 없이.. 좀 기다려 안줏거리 만들어 줄게."


아내가 주방에서 안주를 만드는 동안 임기사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에 접속했다. 일하는 동안 새 글이 몇 개 올라와 있었다. 그 중에는 택시운전수의 글도 있었는데 아내가 요리를 잘 한다는 자랑글이었다.


'너만 아내가 있냐? 내 아내도 요리 잘 한다 이거야.'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는 아내를 보면서 임기사는 내심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잠시 후 요리가 끝났는지 아내가 임기사를 향해 말했다.


"다 했으니까 와서 먹어요. 그리고 술 좀 적당히 마시고."


임기사가 식탁에 가서 보니 오징어채를 고추기름에 볶은 요리였다. 맛을 보니 맵단짠이 어우러진 맥주 안주로 제격인 음식이었다. 임기사는 얼른 휴대폰 카메라로 안주와 맥주가 잘 나오게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커뮤니티 사이트에 자랑글을 올리려고 하다가 잠시 망설였다. 아침부터 일은 안 하고 술이나 마시는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택시운전수라는 사람처럼 맛깔나게 글을 쓸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지금 임기사에겐 커뮤니티 사이트에 글을 쓰기보다는 맥주와 맛있는 안주를 먹는 것이 더 급했다. 휴대폰에 저장된 사진은 앞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꺼내 볼 생각이었다. 맥주 한 캔을 또 비울 무렵 아내가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마침 잘 됐네. 그렇잖아도 할 얘기가 있었는데."


"무슨 얘긴데?"


"나 병원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아."


"병원? 왜? 어디 아파?"


임기사는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말없이 뭔가를 임기사 앞에 내밀었다. 아내가 내민 것은 두 줄이 그어진 임신테스트기였다.


"아무래도 셋째가 생겼나봐."


임기사는 기뻐서 아내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뭐? 진짜야? 언제 확인 한 거야?"


"때가 됐는데 소식이 없길래 어제 약국에서 사놓고 오늘 아침에 확인해봤어."


임기사는 평소 아이가 셋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터였다. 그러나 아내는 둘만으로도 힘들다고 셋째는 절대로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관계를 가질 때마다 아내는 피임을 요구했고 임기사도 아내가 원하는대로 콘돔을 사용해왔다. 그러다 언젠가 콘돔이 없길래 '한 번 정도는 괜찮겠지'라는 생각에 그냥 관계를 가졌었는데 그 때 임신이 된 모양이었다.


"둘째 낳고 그냥 바로 묶었어야 했는데 이게 뭐야~"


"알았어~ 셋째 낳으면 바로 묶을게. 근데 셋째는 낳을 거지?"


"생긴 애를 어쩌겠어? 낳아야지. 근데 진짜 큰일이다. 셋째 낳으면 집도 더 큰 집으로 이사가야 할 것 같고, 앞으로 돈 들어갈 일도 더 많아질텐데 벌이는 시원치 않고.."


아내의 걱정스러운 푸념에 임기사는 우선 아내를 안심시키기 위해 큰 소리부터 쳤다.


"내가 더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벌면 되지 뭐가 걱정이야? 설마 처자식 굶길까봐 그래?"


"안 좋은 일 있다고 오늘처럼 일 그만두고 들어와 술이나 마시지나 마세요~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돈을 벌려고 그래?"


아내의 잔소리 섞인 타박에 임기사는 뜨끔했다. 하긴 오늘 일을 일찍 그만둔 탓에 벌이는 5만원도 채 되지 않았다. 사납금이 15만원이니 나머지 금액은 다음달 월급에서 공제될 것이다. 임기사는 앞으로는 어떤 진상 손님을 만나더라도 웃으며 응대하고 기분이 나쁘다고 중간에 일을 그만두고 들어오지도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했다. 그리고는 아내의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쁜 아가야, 네가 아빠한테 오기 전에 아빠 정신차리라고 이런 깜짝 선물을 준비했구나? 아빠가 이제부터는 진짜로 열심히 일할게."


출처 현진건 님의 소설 "운수 좋은 날"을 오마주해 보았습니다.
현진건님의 작품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재밌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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