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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라 쓰고 예언가라 읽는다
게시물ID : freeboard_54238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엘스머프녀
추천 : 10
조회수 : 435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10/06 15:16:53
하창수
1960년 포항에서 태어나 영남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1987년 중편 「청산유감」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1991년 장편 『돌아서지 않는 사람들』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했다. 세 권의 중단편집과 아홉 권의 장편소설, 엽편소설집 하나, 직접 그린 만화와 짧은 글이 어우러진 카툰에세이집 두 권, 그리고 일곱 권의 번역서를 출간한, 소설가이며 번역가이자 카툰에세이스트다. 옮긴 책으로 폴라 델솔의 『동양점성학 Oriental Astrology』, 러디어드 키플링의 『킴 KIM』이 있고, 상봉스님의 선화시집 『낮잠 Napping』을 영역하였다.




- 글 하창수 / 시·그림 이외수 - 초판 1997년

p.58 [쥐의 나라]

"이 나라는 본시 기세가 웅장하고 담대하여 만방이 호국이라 불렀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마땅히 호랑이가 앉아야 할 왕좌를 쥐란 놈이 차지하고 앉더니
과연 다산(多産)의 짐승답게 온 나라를 바글거리는 쥐새끼의 나라로 만들었다.
덩치가 커봤자 한 뼘을 넘지 못하고, 창칼을 쥐었다고는 하나 어찌 호랑이의 발톱에 미칠 수 있겠으며,
밤 내 이 집 저 집 돌아다녀 훔쳐 모은 재물이 아무리 많다 해도 그게 어찌 제놈들의 것이더냐.
나는 오랫동안 이 생각들을 모아 궁리하고
재주 없는 글솜씨를 갈고 닦아 임금에게 올릴 상소를 만들었으니, 이제 그걸 전하려는 것이다."

그 말을 제자들에게 남긴 현자는 이른 아침 맑은 햇살이 번지는 길을 꼿꼿이 걸어갔다.
그리고 스승은 돌아오지 않았다.

...(중략)...

현자의 제자 중에 학문이 깊고 심성이 곧은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그림이 뛰어나고 글씨 또한 명필이라 장안에 그 이름이 높았다.
그의 문장은 젊은 축에선 당대의 으뜸이라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조정에서 그를 등용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다.
하지만 그는 서른 번, 마흔 번, 때마다 거절했다.
그의 부모를 설득해보기도 하고 그의 형제에 대한 벼슬자리까지 보장해준다고 해도
그의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어느 날, 창칼로 무장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제법 지위가 높은 자가 그의 집을 찾아왔다.

...(중략)...

"정히 나를 등용하려면 내게 딱 하나만 가져다주시오."

"딱… 하나…?"
장수가 의아한 눈길을 하며 모가지를 쑥 뽑았다.

"그렇소, 딱 하나면 되오."
"그게 뭐냐?"
"서수필(鼠鬚筆)이오."

장수의 퉁방울 같은 눈이 더욱 튀어나왔다.
"서수필이면 쥐수염으로 만든 붓이 아니더냐."

젊은이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지고 있었다.

"네 녀석이 글씨로 이름이 났다는 건 알고 있다만, 아무리 그래도
천금을 마다하고 붓 한 자루를……"
장수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입맛을 쩝하고 다시는 품이 영 찜찜하다는 듯했다.

그런데 그때 젊은이가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하나의 떨림도 없었다.

"단, 이 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서수필이어야 하오."
"……?"
"댁이 말했듯 서수필이란 쥐수염으로 만든 붓이지요. 하여
이 나라에서 가장 질 좋은 서수필을 만들자면,
이 나라 쥐들 중에 제일 가는 쥐의 수염이 필요한 건 당연하겠지요.
말하자면 쥐새끼들 중에서 임금쯤 되는 쥐라야 한다 이 말입죠."

젊은이의 말을 듣고 있던 장수의 얼굴에 완연히 당황하는 빛이 어리고 있었다.
뭔가 뼈 있는 소리인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무엇인지 확연히 짚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젊은이를 찾아왔던 장수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돌아갔다.

그 다음 날 새벽.
동이 트려면 아직 이른 시각, 젊은이의 누옥(陋屋)이 있는 동네에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였다.
전날의 그 장수가 시퍼런 군도를 쳐들고 젊은이의 방으로 뛰어들어갔고,
늦은 가을날 떨어지는 낙엽처럼 젊은이의 목이 떨어졌다.
훗날, 사람들은 그의 유작이 된 어떤 시를 대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세상에 버글거리는 게 쥐새끼들인데,
어찌 나는 제대로 된 서수필 한자루
마련하지 못하였을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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