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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충복 4인방 " 라프렌티 베리야 (上)
게시물ID : history_20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8
조회수 : 1960회
댓글수 : 11개
등록시간 : 2011/07/10 16:07:29
스탈린 이야기를 꺼낸 김에 그의 최측근 4인방의 일생에 대해서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어떨까 싶어서..

우선 스탈린 사후 가장 먼저 부상했다 가장 먼저 염라대왕 알현하러 가신 분입니다.

"라프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베리야는 그루지아 지역의 소수민족인 밍그렐리아족 출신입니다.그는 고향 근처의 기술학교를 다니다가 학

업 문제로 바쿠로 이사하였고, 여기서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혁명가의 길을 걷게 됩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보위부장 직을 거쳐 1920년경 체카에 들어가 본격적인 경력을 시작하게 되지요. 다들 아시다시피 체카는 이

후 NKVD의 전신이 됩니다. 당시 그루지아는 멘세비키 정부에 대항해 볼셰비키들이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는

데, 러시아는 볼셰비키 반군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했습니다.결국 멘세비키 정부는 붉은 군대를 

등에 업은 볼셰비키들에 의해 붕괴되고 말았고, 베리야는 이 새로운 정부의 비밀경찰(OGPU)의 총 책임자로 

지명되어 자신의 악마성을 처음으로 보여주게 되지요. 1924년 이미 베리야에 의해 처형된 그루지아 민족주의

자들의 수가 1 만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후 승진을 거듭하던 베리야는 1926년 동향 출신의 소비에트 서기

장 이오시프 스탈린의 눈에 들어 이후 평생을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후 중앙정계로 진출한 베리

야는 그루지아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일에 큰 공을 세웠고, 대숙청이 한창이었

던 1935년 남 카프카스 지역에서 피바람을 일으킨 주역으로 악명을 떨쳤습니다.이때의 활약(?)으로 1938년 

내부인민위원회(NKVD)의 부부장으로 발탁되었고, 전임자들의 선례를 따라 상관이었던 예조프를 반혁명분자

로 몰아 사형시키면서 NKVD의 수장 자리에 올랐습니다.한가지 베리야를 위한 변호을 하자면 그가 NKVD 수장

에 있는 동안 연방 주민들에 대한 체포, 고문, 처형은 많이 줄어들었고, 십만명에 달하는 죄수가 석방되기

도 했습니다. 하지만 변호받을수 있는 부분은 여기까지입니다. 폴란드가 병합되고, 발트 3국이 소련에 흡수

되자 이 지역에서의 학살과 가혹행위는 모두 베리야의 지시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1940년 폴

란드 지역의 지식인과 장교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카틴숲의 학살"사건은 베리야가 기획하여 스탈린에게 건

의함으로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해 국가보안총장에 임명되어 군대의 원수급 대우와 소련내 손꼽

히는 실력자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됩니다. 베리야는 독일과의 동맹이 유지되던 시절부터 스탈린에게 히틀러

의 소련 침공 계획을 간파하고 여러차례 그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건의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묵살했습니

다. 결국 대숙청의 후유증에 시달리던 소련군은 독일군의 공세에 연전 연패했고, 베리야는 이 국가적 위기

의 순간에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함께 강제노동소용소 복역자들을 데리고 군용 비행기 생산 임무를 맡게 됩니

다. 이 인연으로 말렌코프와 베리야가 서로 손을 잡게 되지요.(나중에 말렌코프가 배신하긴 하지만...) 1944

년, 독일군이 소련 영내에서 쫓겨나가자 마자 베리야는 소수민족들에 대한 강제이주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

했고, 여기서도 그의 잔혹함은 여지없이 빛을 발했습니다. 어쩌면 스탈린의 부하들중 스탈린을 가장 많이 닮

은 사람이 베리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우리 사할린 동포들도 이 강제이주 정책의 희생자

가 되어 갖은 수난을 겪어야 했지요. 그 원흉이자 시발점이 바로 이 사람, 베리야였습니다. 각설하고, 대전 

말기 소련은 이후 다가올 냉전시대에 대비하여 보다 위력적인 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이때 미국의 

맨하탄 계획을 알게 된 베리야 이하 소련 정보당국은 적극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펼쳐 이후 소련의 핵무기 보

유에 큰 공헌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포함한 공적들을 인정받아 진짜 "원수"의 계급에 오르게 되지요. 대

전 종결후 스탈린의 노쇠는 보다 뚜렸해졌고, 차기 서기장 자리를 놓고 실력자들 간의 암투도 본격화되는 양

상을 띄었습니다. 베리야는 1946년 1월 내부인민위원회 수장 자리를 사임했으나 그 후임인 크루글로프, 아바

쿠모프 등은 베리야의 수하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고, 아바쿠모프 같은 경우는 당시 후계자 1 순위로 거론

되던 즈다노프와 제휴하여 베리야 측근들 중에 유대인이 많다는 점을 들어 베리야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베리야는 이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말렌코프와 손을 잡고 "레닌그라드 사건"을 날조해내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1948년 즈다노프가 급사한 틈을 타 그 측근 2000여명을 처형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 이후 반 베리야 

진영에서는 베리야 - 말렌코프 연합에 대항할 인물로 흐루시초프가 거론되기 시작하지요. 또한 베리야에 대

한 정치적 공세의 일환으로 시작된 반유대주의 정책은 점점 더 강경해져서 주변 위성국가의 수반들 중에 유

대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고(이 사람들은 전부 베리야가 데려다 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1953년에는 유대

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 지도층을 독살하려 했다는 "유대인 의사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때 17

명의 유대인 의사들이 체포되었으며 소련 내 유대인들을 모두 극동으로 강제이주시킨다는 정책이 수립되었으

나 3월 5일 스탈린이 "블리쥐니" 에서 급사함으로서 의사들은 석방되고 강제이주 정책은 취소되었습니다. 스

탈린의 죽음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베리야가 스탈린을 독살했다는 것입니다. 몰로토프

의 회고록에 따르면 베리야가 자신이 스탈린을 독살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으며, 워파린이라는 독극

물을 사용하면 흡사 뇌졸증 증세처럼 보일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이 죽음을 앞두고 베리야에 대한 의심

이 극에 달했던 것을 고려해볼때 일견 타당성있는 이야기로 들리기도 합니다. 어쨌던 스탈린 사후 말렌코프

가 그 뒤를 이었고, 베리야가 제 1 부수상에 올라 권력은 온전히 그들의 손에 들어온것 같았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져 둘로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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