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종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면서 극심한 가뭄이 이어집니다. 이때의 가뭄을 세종의 7년대한이라고 합니다. GNP 1만8천달러가 넘는 지금의 대한민국도 7년동안 계속 가뭄이 들면 살아갈 방도가 막막해질 것으로 압니다. 그렇다면 수리시설도, 관개시설도 오늘과 같지 않았던, 그 때는 어찌 되었겠습니까. 모든 백성이 굶어야 하겠지요. 길거리에서 굶어서 죽은 사람들의 시체가 즐비합니다. 젊은 세종의 고통을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24세가 된 세종대왕은 지금의 광화문 네거리, 그때는 6조관아라고 했습니다. 육조관아에 큰 가마솥을 내걸고 죽을 끓여서 백성들에게 먹이게 하였습니다. 임금이 먹어야 하는 식량인 내탕미로 죽을 쑤게 하였습니다. 그 임금의 양식을 덜어서 도성 안 백성들에게 죽을 쑤어서 먹여랴. 그런 선정을 진휼이라고 합니다. 청년 세종은 그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내 백성들이 얼마나 배고파 하는지, 또 행색은 어떠한지를 보고 싶어 육조관아에 차일을 치고 나와 앉았습니다. 죽을 받아먹는 백성들의 몰골은 참담했습니다. 뼈다귀에다 가죽만 씌워놓은 참혹할 몰골등이 와서 죽을 받아서 먹고 부들부들 떨면서 돌아갔습니다. 세종은 이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내가 정치를 얼마나 잘못하면 저렇게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야 하나 하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경복궁으로 돌아온 세종이 경회루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춥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경회루 옆에다 초가삼간을 하나 지으세요”라고요. 신하들은 완강하게 반대했습니다. 경복궁의 모든 건물이 기와집인데, 거기에 초가집 지었다가 불이라도 나면 어떻게 됩니까. 그때 젊은 지성, 세종은 한 술 더 뜹니다. 짓기는 짓되 새 재목으로 짓지 말고 경복궁 어딘가에 낡은 재목이 있을 것이니, 그 낡은 재목으로 초가삼간을 지으라고 명합니다. 그야말로 왕명이니 거약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조를 동원하여 초가집 한 채를 지었습니다.
세종은 그 초가집에서 집무를 시작했습니다. 신하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초가집에서 30미터 거리에 정무를 살피는 사정전이 있고, 사정전 뒤에 침전인 교태전이 있는데 초가집에 자고 먹고, 정무를 살피면 어떻게 됩니까. 마침내 신료들은 초가집 마당에 꿇어앉아 정전에서 집무하기를 눈물로 호소합니다. 초가에서 거처하시다가 환후라도 얻으면 저희들은 대죄를 짓게 된다고 말입니다. 어디 신하들 뿐이겠습니까. 어질고 착하신 왕비 소헌왕후까지도 초가집 마당에 꿇어앉아 애원을 합니다.
이런 일이 매일 반복되는데도 젊은 세종은 끄떡도 하지 않으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임금이 어찌 기와집 구둘장을 지고 편한 잠을 잘 수 있더냐. 나는 나가지 않을 것이니라!” 이렇게 단호한 비답을 내리고 무려 2년 4개월동안 이 초가집에서 집무를 했다고 그 분의 실록은 적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