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한을 멸한 동진(환온의 북벌)
동진은 이번에서 다루고자 하는 환온의 북벌뿐만 아니라 그 전에도 몇번 북진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당시 중원의 영토를 대부분 상실한 상태였던지라 동진은 과거 서진의 옛 영토를 수복하고자 했던 의지가 있었다. 게다가 조적(祖狄)이란 장군의 상소가 촉진제로 작용하여 조정에서는 조적에게 군권을 위임하여 북벌을 맡기고자 했으나 당시 동진 지배계급의 모순, 재정부실의 문제와 행여나 그 북벌의 성공으로 그의 위세가 높아질 것을 두려워했던 귀족계급의 시기와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리고 정확히 40년후, 환온이 잊혀졌던 북벌 프로젝트를 꺼내들고 나섰다. 고토를 회복하자는 명분을 내세운 것이다. 허나 이 역시 심각한 반대에 당면하게 된다. 우리가 제갈량도 아니고 무슨 놈의 북벌인가 그냥 조용히 가진 것이나 지키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환온은 황제를 알현하여 이 북벌로서 얻을 이점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허락이 떨어지자 환현은 최고의 군통수권자가 되어 동진의 대다수 병력을 거느리는 위치에 서게 된다.
사실, 환현의 이와같은 행동에는 사심도 없잖아 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환현을 알게모르게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여럿 제후들과 군벌들을 지원하여 그 환현을 견제하고자 했던 것인데, 바로 이 균형을 깨뜨리기 위해, 즉 모든 군통수권을 자신이 쥐기위해 출전을 상소하고 자청했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목제 사마담과 조정에서는 이를 알아도 어찌 막을방도가 없었으니, 명분이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것인데 그걸 태클걸자니 마땅치가 않았고 혹시나 이 반대를 구실삼아 그가 거느리고 있는 대군으로 쿠데타라도 일으킬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어찌됐든 환온의 북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환온은 총 3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 촉 땅으로 쳐들어가 성한을 멸해버리는 한편, 전진과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영토를 대다수 회복하는 지대한 공을 세운다. 그는 이 공으로 명실명백한 실권자가 되었고 한편으로는 명제 사마소의 딸과 혼인하여 황실의 부마까지 되었으니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그의 입지는 실로 반석 위에 오른듯 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환온은 이 북벌에 욕심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심도 있었다. 애초에 그는 야심가였다. 일찍이 젊었을때 왕돈(동진 초 이야기 참고)의 무덤을 지나며 "사내로 태어나 한번 저렇게 해볼만 하다" 라 했던 일화만으로도 넉넉히 그의 야심을 읽을 수 있으리라. 이렇듯 환온은 이 북벌의 공로를 자신의 공적을 높이는 선전광고로 사용했으며 늘 자만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론 동진의 조정에 대한 깊은 냉소도 그의 야심을 키우는데에 일조했다. 환온이 북벌로 낙양을 탈환했을때, 환온은 조정에 표문을 올려 옛 서진의 수도로 천도할 것을 상소했으나 당시 강남일대를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뭇 호족들과 귀족들의 거센 반대에 흐지부지 되었던 것인데, 환온은 이걸 보고 비웃었다고 한다. 명색이 나라의 우두머리들인데 한낱 호족들의 반대에 휘둘리니 그게 우스웠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야심은 절정에 이르러 결국 역모를 도모하여 쿠데타를 일으킨다.
자신의 조상에 대한 앙갚음이라도 하려 했던 것일까, 당시 황제였던 동진의 제 7대 황제, 사마혁(司馬奕)을 폐하고 사마욱(司馬昱)을 제위에 앉히니 그가 곧 제 8대 황제, 간문제(簡文帝)다.
사실 말이 폐위, 옹립이지 나중에 때를 보아 자신이 황제가 될 속셈이었음은 안 봐도 훤한 사실이다. 역시 또 한명의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요걸 어찌 요리할까 하고 고심하던 차에 그 야심가는 병사하고 말았으니 그때가 373년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