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media.daum.net/society/people/view.html?cateid=1011&newsid=20120517173134696&p=mk&RIGHT_COMM=R1 5·18 당시 국군통합병원 진료부장 이정융씨
"억울하게 끌려온 시민들을 보면 마음이 아팠죠. 그러나 당시에는 손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1980년 5ㆍ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국군통합병원 진료부장을 지낸 이정융 씨(69)가 32년 만에 당시 실상을 전했다. 계엄사령부에 끌려온 시민만 3000명에 달했고 부상당한 시민들은 국군통합병원에서 치료를 했다. 도주를 못하게 하기 위한 감시 차원이었다.
수사를 맡은 보안사는 시민들 중 시위 주동자를 잡기 위해 매일 불러다가 고문을 가했다. 이씨는 "200병상 모두 시민들로 채워졌다"고 회고했다. 입원 환자 외에도 부상당한 시민들이 찾아오면 무료로 약을 내줬다. 부상당한 시민들의 생사를 몰라 헤매는 가족이 오면 면회를 시켜주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에는 가족과 만나게 하는 게 불법이었다"고 말했다.
보안사의 수사국장과 안면이 있던 이씨는 억울하게 잡혀온 시민들을 풀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씨는 "당시 수사국장은 '잡혀들어온 사람은 모두 구속해야 한다"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고 설명했다.
수사국장은 광주민주화운동 한 달 전에 벌어진 사북사태(민영탄광에서 광부들이 일으킨 노동항쟁) 때 6000명이 시위를 벌여 81명을 기소했으니, 이 비율을 기준으로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군법회의에 넘겨야 한다고 했다.
이에 이씨는 "광주시민을 두 번 죽이는 일"이라면서 수사국장을 설득해 중ㆍ고등학생 700여 명이 풀려났다. 총을 들고 병원에 와 약을 가져간 한 시민이 총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군의관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이씨는 "이 시민의 행동을 보안사에 알렸으면 곧바로 주동자로 몰렸을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설'만 많았던 군인들의 사망에 대해서는 "민간인에 의해 죽음을 당한 군인은 단 1명뿐"이라고 주장했다. 금남로 도로가에 쉬고 있던 군인을 후진하던 시내버스가 치어 숨지게 한 게 전부라는 것이다.
이씨는 당시 군인ㆍ시민 등 사망자 수를 총정리했다. 사망한 군인들은 대부분 M16소총에 희생당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민군이 군인들을 사살한 것이 아니고 군인들끼리 오인해 총격이 벌어져 사망한 것"이라고 밝혔다.
투입됐던 공수부대, 31사단, 보병사단의 지휘 주파수가 잘못돼 빚어진 일이었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