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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의 충복 4인방 " 라프렌티 베리야 (下)
게시물ID : history_20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4
조회수 : 1948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1/07/10 21:16:01
스탈린이 죽고 표면적으로는 말렌코프가 서기장으로서 권력의 정점에 있는듯 보였지만, 실질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은 라프렌티 베리야였습니다. 베리야는 집권 이후 이전의 행보와는 다른 자유화 정책을 표방하

며 유대인 의사 사건에 연루된 의사들을 석방하고, 1백만명에 달하는 비 정치범들을 강제수용소에서 석방함

은 물론, 고문 금지 법안을 입안하는등 제법 훌륭한 통치자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또한 정치국이 위성국가

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당의 경제정책 통제도 차츰 줄여나가고자 하였죠.이것이 훗날 말렌코

프를 권좌에서 몰아내고 자신이 절대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민심을 얻고자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 스탈린주

의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개혁을 시도하고자 한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고 합니다. 이런 

베리야의 선정(?)에도 불구하고 흐루시초프를 비롯한 반대파들은 마음을 놓을수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아무

리 온건한 정책을 편다 한들 베리야는 베리야였고, 언젠가는 마각을 드러내어 반대파 숙청에 나설것이 틀림

없다고 믿고 있었죠. 여기에 베리야의 온건, 자유화 정책이 소련의 미래를 어둡게 할것이라고 믿는 고위층 

인사들과 이들에게 설득당한 말렌코프까지 가세하여 흐루시초프, 말렌코프, 몰로토프 3인의 반 베리야 연합

이 결성됩니다. 1953년 6월 26일, 베리야는 이들에 의해 체포되어 모스크바의 모처에 감금되었습니다. 베리

야가 어떻게 몰락하여 죽음에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여러가지 설들이 존재하는데 베리야의 장남 세르고의 

증언에 따르면  6월 26일 베리야의 저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들이닥쳤고, 베리야를 잡아 그자리에서 사살했

다고 합니다. 다른 설에 따르면 그날 당 회의가 있었고 회의 중에 흐루시초프가 베리야를 영국의 스파이라

고 격렬하게 비난했는데 이에 당황한 베리아가 허둥대는 사이 몰로토프를 비롯한 당내 유력자들이 한 목소리

로 베리아의 직위 해제를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주코프 원수와 그가 대동한 무장병들이 들어와 베리

아를 연행하여 끌고 나갔는데 이 모듣것이 다 짜여진 각본이었다는 것입니다.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는 와중

에 말렌코프가 자기 책상에 달린 벨을 몰래 누르면 미리 대기하고 있던 주코프가 들어와 베리야를 체포하는 

것이 바로 반 베리야파가 처음부터 구상했던 각본이었다는 것이죠. 어쨌던 기록에 따르면 이날 베리야와 그

측근들이 모조리 체포되었고, 이반 코네프 원수가 주재한 소련 대법원에서 변호인도 없고 항고의 권리도 인

정되지 않는 재판을 받았습니다 결국 베리야와 그 일파들에겐 영국과 내통한 반역죄로 사형 선고가 내려졌

고. 1953년 12월 23일 전원 총살되었습니다. 여기서 세르고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판사의 증언이 있는데 

이 판사에 말에 따르면 재판정 어디에서도 베리야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르고의 주장대

로 베리야가 당일 자택에서 사살되었다는 설에 힘을 실어주는 증언이라 할수 있겠죠. 이외에도 베리야의 사

생활에 대한 유명한 일화에 따르면 부하들을 시켜 어린 소녀들을 납치해오게 한뒤 강간하는 것이 이분의 취

미(...)였다는 설이 있습니다.(로리콘 & 새디스트였다고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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