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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서 본 만주국의 위상-오카다 히데키
게시물ID : freeboard_20415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알류트
추천 : 0
조회수 : 51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25/03/28 16:50:15

만주국에서 활동했던 중국인, 조선인 작가들의 문학을 통해 만주국에 대해 분석한 책입니다.

논문 같은 느낌이 나며 연구 목적으로 쓰이는 도서입니다.

참고자료는 작가가 일본인이기에 대부분 일본 측의 논문입니다.

참고로 한자가 많이 있습니다.

참고로 이 도서에서, 만주국 출신의 중국인 작가(한족으로 추정)인 왕도(한자 변환하는 법을 몰라서요. 이름을 한자식으로 음차하면 임금 왕자에 법도 도입니다)가 일본유학 시절 특고에게 고문을 당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일부를 그대로 옮겨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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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8일 창춘(장춘??)에서 일본 사회학회와 동베이윤함14년사 편찬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필자는 거기서 구 만주국의 노작가들과 만났고(2000년 출판된 도서입니다.) 그때 이민(오얏 리에 백성 민) 씨로부터 일본어 시집 새로운 감정과 그가 손으로 쓴 일본 유학시기 문학활동 풍운록(이하 풍운록)이라는 원고를 건네받았다.

원고는 208자 원고지 294장에 이르는 방대한 역작이었다. 원고에는 일본어로 쓴 그의 편지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러한 회상록은 보통의 독자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의 여부는 별도의 문제로서 전문가의 연구에는 물론 가치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회상록의 완전한 원고는 당신과 같은 분에게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내주변에 방치해둔다면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고 폐물에 불과할 뿐이지요 이러한 견지에서 오늘 회장에 가지고 나와 당신에게 건네주고자 하는 참입니다.

필자는 그의 원고와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속에서 울컷 치솟는 감격을 느꼈고 그것과 더불어 마음의 부담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서전승(서녘 서 밭전 이길 승) 씨가 있는 평화연구실과 지구의 한 곳에서 편집부로부터 회상록을 의뢰받은 이민 씨는 일본어 원고 [체포에서 일본추방까지]를 보내주었다. 그의 글은 지구의 한 곳에서 연재되었는데 위의 풍운록을 간략하게 정리한 것이었다. 그의 글을 읽고 난 뒤, 필자는 그의 마음 속에 응어리져 있던 것이 조금 가벼워진 것처럼 읽혔지만, 그러나 그것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두 자료에 기반해서 어느 젊은 중국인 청년이 일본에서 벌였던 문학활동을 밝히고 그 작업을 통해서 일본과 만주의 낙차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은 이민 씨가 가지고 있는 마음의 응어리에 대한 필자 나름의 책임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 제1차 초고가 완성되었을 완성되었을 때, 필자는 이민 씨에게 원고를 보내어 의견을 여쭈었고 그것과 더불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질문에 대한 답들은 초고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1. 일본유학시기 문학활동 풍운록

왕도, 1918년 12월 14일 지린성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이민이라는 이름을 쓴다. 도쿄 유학시절의 필명은 임적시(수풀 림, 맞을 적 혹은 때 시, 백성 민)이다 .신징에서 활동할 때는 두백우(막을 두 흰 백 비 우)라는 필명을 페이핑 시기에는 여기(법칙 려, 성씨 려, 기특할 기, 의지할 의)라는 필명을 사용해 문학 활동을 했다.

그는 1935년 10월 지린 일중을 졸업하기 바로 직전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어전문학교에 들어갔다.

다음해 4월, 일본대학예술학부 창작과에 입학했고, 문학창작을 전공했다.

1937년 겨울, 영예지우 사를 결성하여 중문문에잡지영예지우를 창간했다. 잡지창간에 많은 돈을 출자한 이점공 (오얏 리 점령한 점 공 공)(화학 전공)이 명예사장이 되었고, 왕도는 사장을 맡았고, 장영화는 총편집으로 근무했다. (장영화는 필명 신실(매울 신 열매 실)고등학교 시기 왕도의 동급생. 왕도는 그의 꾀임에 일본유학을 결의했다고 한다. 같은 일본의 예술대학 영화과를 전공했다. 귀국 후 만영(찰 만, 희미할 영)에서 활동했으며 유물론연구회의 멤버였다) 다른 사원으로 요명길, 당모, 오모 등이 가담했는데 모두 만주국의 유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문예잡지는 노신의 글을 게제했다는 이유로 1기를 출판한 이후 정간되었다. 이와 더불어 영예지우사도 해산되었다.

1937년 7월 8일 발행된 일본어시집 새로운 감정도 문제가 있다고 여겨져 발금처분을 받았다. 이후 경시청 외사과 아시아계로부터 특고의 감시가 붙었고, 친구들과 거리를 둬야했던 그는 고독한 생활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1939년 1월 초순의 어느 이른 새벽에 그는 돌연히 가택조사를 받았다.

그 길로 고전마장 근처에 있는 야만 경찰서에 연행된 그는 준엄한 취조를 받았다. 기소유예 판결을 받은 그는 4월 하순에 석방되었고 그대로 조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일본유학시기 문학활동 풍운록]은 4개월이 채 못 되는 유치장의 체험을 쓴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체포에서 일본 추방까지]에 대강의 내용이 쓰여 있다. 여기서는 몇 군데 흥미를 끄는 점을 거론해두고자 한다.

우선 그는 1. 영예지우사, 및 간행잡지의 내실 문제 2. 시집 새로운 감정의 내용문제 3. 조선인과의 교제에 의심스런 점이 있다는 이유로 연행당했다.

조선인과의 교제란, 김호영, 최품삼, 이주삼 등과의 교유관계를 말한다

김호영은 재일 조선인으로 몇 번이나 체포를 당한 경력이 있는 자로, 당시에는 전향하여 간다 고가와쵸에서 조선신보사라는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다.

왕도의 시집을 인쇄했던 곳이 바로 조선신보사였다. 중야중치의 유명한 시 [비 내리는 시나가와역]에 첨부된 헌사,

"(어대전) 기념으로 이북만, 김호영에게 보낸다"에 나오는 김이 바로 이 사람이다.

최품삼은 같은 일본대학의 학생으로, 전 공산당원이다. 그는 여러번 체포당한 경력을 가진 위험분자였다.

왕도는 학우였던 이주삼과 함께 1938년 어름, 유물론연구회라는 독서회를 조직했고, 구류 중이였던 산전청삼랑의 빈집을 방문했다고 한다. 왕도의 체포와 동시에 그들도 체포되었다.

잡지동인은 모두 만주국 출신자였고, 재일 조선인과도 교우 관계를 많이 가졌던 점에 착안해서, 필자는 그에게 도쿄 유학 시절 관내 중국인과의 교제가 어땠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그러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해주었다.

유학하고 있을 때 우리는 관내 유학생과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가장 교류가 빈번했고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것은 조선인이었다. 공통의 운명감에서 친다면 서로 반향할 관계였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모두가 좌익적 경향이어서 서로 언어를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답변은 필자가 기대한 바대로의 내용이었다. 당시 관내와 만주국의 중국인 사이에는 어떤 종류의 감정적 벽이 생겨 있었고. 중국인 동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자유로운 교류를 주저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고 필자는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용의 사실로 체포된 왕도는 고문을 포함해 취조를 받았다. 취조 과정에서 공산당에 동정하고 공산주의를 신봉한다는 죄상이 밝혀졌다. 그러나 배후관계 없음이라는 이유로 전술했듯이 기소유예 판결을 받았다.

그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그가 기소까지 가지 않았던 이유는 그의 부친이 의뢰한 지린의 변호사 도박통이 당시 법무대신의 제자였고 그가 중간에서 손을 써줬기 때문에 가능했음에 틀림없다.

이상이 그의 도쿄 유학 시기에 있었던 사실에 관한 경력이다.

회상록을 읽으면, 왕도가 식민지 만주국과 일본의 사법 권력을 민중이 어떻게 파악했는지에 대한 방식의 차이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을 알아챌 수 있다.

가령 면회가 허락된 후 처음으로 면회 왔던 자는 바로 하숙집 주인이었고 또 면회를 올 정도로 친하지 않았던 일본의 학우와 면회했던 일을 소개한 다음에, 왕도는 다음과 같은 감정을 서술하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전제적인 곤봉과 이민족의 회옾 하에서 자라나 경관복을 본 것만으로도 심장이 위축되는 나의 처지에서 말하자면 이것은 확실히 잘 음미해야할 예의를 다한 방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중략-일본은 군국주의국가라고는 해도) 어느 정도는, 법을 두려워해도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사회적으로 정착되어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유치장에서 알게 된 일본인 학생 산전돈과의 접촉을 통해서 마찬가지의 감개를 품게되었다.

내가 조용조용 그에게 일본군이 위만주에서 어떻게 참수와 같은 잔혹한 수단을 사용해서 그곳의 인민을 진압하고 위협했는지를 말해주었을 때, 그는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했고,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어려서부터 법치에 익숙해 있었던 그로서는 근본적으로 자기의 동포가 이러한 야만적인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렇게 '법을 무시하고 탄압에 광분하는 위만주국 사법권력'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왕도에게 가장 두려웠던 것은 바로 만주국 치안당국으로 신병이 인도되는 것이었다.

설사 형을 살아야 한다고 해도, 그럴 때 가장 좋은 것은 도쿄에 머무르는 것으로, 본국으로 송환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가장 나쁜 것은 바로 국경을 넘어 위만의 일본헌병대나 혹은 경찰서 특무과로 보내지는 것이다. (중략)

만약 그런 지경으로 떨어진다면, 즉 생명을 보존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칼산에 오르고 기름이 끓는 냄비에 빠지는 것보다 더 지독한 인간지옥의 고통을 만날 것임을 깊이 알고 있었다

그는 만약 "추방되어 위만경찰에게 인도된다면, 분명히 배 위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할 것이다"라고까지 말하고 있다. 근 60년 전의 체험이다. 여기에 인용한 회상을 말 그대로 받아들일 작정은 아니다. 그러나 20세를 막 넘겼을 뿐인 청년이 이국의 경찰 유치장에서 고문을 받으면서도 고향인 만주국으로 인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다.

용의 사실의 하나인 적화사상의 근거가 된 것인 [새로운 감정]에 게재된 두수의 시였다. 특고에게 추격을 받던 양상을 풍운록에 기반해서 소개해두자. 우선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나의 노래의 다음과 같은 구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여전히 초조하고 분노로 가득차고 미쳐서

자기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마치 우리에 갇힌 야수처럼

(중략)

말로 다할 수 없는 비통함, 조롱, 압박이여

빨리 오라, 나의 이 부패한 세계를 매장하기 위해

아! 나는 새로운 시를 노래 부를 것이다

나는 용감한 생활로 들어갈 것이다

"이러한 시구는 그 선명함 때문에 특고 경관의 중추신경에 부딪쳤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고 한다.

산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갑작스레 이렇게 물었다. "당신이 우리 속에서 노래를 부맂 못하는구나 라고 한 것은 무얼 가리키는 거야?? 과거에 감옥에 간 적 있나?"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것은 비유에요!"

제등(가지런할 제 등나무 등)이 끼어들며 말했다. "무얼 비유한 거지? 환경을 비유한 거야?" 나는 답했다

"그렇습니다"

화야(불 화 들 야)가 이어서 물었다. "부패한 세계는 무엇을 가리켜 말한 거냐?"

나는 말했다. "나의 환경을 지 시한 겁니다."

그는 다시 물었다. "너의 환경은 뭐에 속해 있지?"

나는 말했다. "나의 생활에 속해 있지요."

이 둔사가 화야를 격분시켰다. 그는 즉각적으로 큰 소리를 쳤다. "닥쳐!"

그런 뒤에 다리를 들어 맹렬하게 나의 대퇴부를 찼는데 둔탁한 진동소리가 났다. 내가 "나의 환경은 사회에 속해 있어요."라고 말하자 그제서야 화야는 다리를 내렸다.

다음으로 문제가 된 것은, 스페인의 반파쇼 전선에 참가해 전투의 희생자가 된 미국의 여배우인 로지타 디아스를 가송하는 시였다.

당신의 죽음은 우리의 비통함을 격발시킵니다.

비통함은 과격한 분노로 변하고

우리는 해일과 같은 기세로

공동의 의지를 강화하여

앞으로 돌격합니다(전사인 은막의 스타에게 바친다)

화야는 시집을 가리키며, 몇 가지의 질문을 했다.

"스페인 내전은 누가 누구와 싸운 거냐?"

"디아스는 왜 정부군에 참가했나? 미국인이 외국의 전쟁에 가다니, 누구를 위한 것이냐?"

"너는 왜 그녀를 노래했냐?"

"앞을 향해 돌격한다고 했는데, 어디를 향해서, 무엇을 하기 위해서냐?"

이와 같은 식으로, 한 문제를 이어서 또 다른 문제가, 속사포처럼, 나의 머리로 떨어졌다

나의 답이 조금이라도 늦어질라치면 즉각적으로 전후좌우로 맹렬하게 맞거나 다리에 차이거나 했다.

그러나 내가 꿇어앉은 자세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장 일진광풍과 같은 구타가 있었다.

추궁은 끊이지 않았고, 창작의 의도가 반파시스트에 있었다고 인정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심문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왜 파시스트에 반대하는지, 스페인정부군의 성격은 어떻고, 소련과는 어떤 관계이며, 공산당과는 어떤 관계인지 등등에 대해서 달려들면서 나에게 물었다. 호통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두통이 끝나지 않아서 차라리 맞는 편이 나았다.

최후의 클라이맥스는 영원히 잊기 힘든 것이었다. 내가 변호를 하는 중에, 나는 그저 민주를 주장하고 파시스트를 반대했을 때, 나의 말 속에는 한 번의 '그러나'가 있었다. 내가 '그러나'(이것의 의미는 그러나 나는 공산당문제를 더 이상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말하자마자 화야는 즉각 나의 뺨을 가격했는데, 소리가 대단히 컸다.

이후 '그러나'로 시작되는 변명은 일절 허용되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추궁을 당한 왕도는 창작의도가 '공산주의를 옹호하고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것'에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왕도의 분석에 따르면, 특고경찰로서는 이 자백으로 충분했고, 이 자백을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노렸던 것이다.

중일전쟁이 가장 격렬할 때, 일본인의 코 끝에서, 이렇게 자기 마음대로 활동하고, 나아가 일기에서 '장개석 만세'와 같은 항일 슬로건을 발견했기 때문에, 특고가 어찌 추궁하지 않고 기록하지 않았던 것일까?

일본의 법률에는 항일죄의 조문이 없어, 이것을 죄상으로 만들어 기소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불문에 붙였던 것이다. 다른 식으로 말한다면, 일본의 법률에 비춘다면, 설사 공산당이나 기타 적색단체에 참가하지 않더라도 개인이 공산주의를 선전했다는 것만로도, 3년 이하의 판결을 내릴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뒤에 경찰관이 말해준 것이었다.

왕도는 교묘하고 숙련된 심문과 윽박 앞에서 특고경찰이 썼던 조서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이르렀다. 왕도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을 터였다. 갇가지 풍부한 경험을 쌓아온 특고에게 미숙한 이국의 청년을 함정에 빠트리는 일 따위는 아기의 손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므로.

+)귀국이후에는 지린성 경찰청 특무과의 백특무와 접촉했고, 이후 특무의 감시 하에 요시찰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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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말하는 특고는 고등계 형사로 주로 일본 제국 시기 사상범과 정치범을 상대했으며 일본 민간인들에게도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고작 현재로 치면 20대 초반의 대학생이나 됐을 법한 나이의 젊고 미숙한 중국인 청년에게 정신적인 압박과 고문으로 별다른 의도도 큰 생각 없이 썼을 법한 시 등을 문제삼아 공산당을 선전한다고 몰아붙여 끝내 유도하여 자백을 받아내는 따위 일이야 그들에게는 일도 아니었겠죠.

취조받는 내용을 글로 봐도 상당히 강압적이고 폭압적입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의 진술을 강압적으로 몰아붙입니다. 말그대로 답정너이고 이 젊은 중국인 청년은 자신의 한계를 시험당해야 했습니다.

읽어보고 상상해봤는데 상상만 해봐도 지치고 질리고 비참하고 힘들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은 이 글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나요??

여러분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20231110_16084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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