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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없음]한 밤의 연주
게시물ID : panic_2030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행복한하루♪
추천 : 1
조회수 : 182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0/09 15:52:26
대학에 합격하고 서울로 올라왔을 때 나는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에 불과했다. 기숙사 신청 기간은 진작에 지나버렸고, 서울에 아는 친인척 하나 없었던 터라 별 수 없이 자취방을 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수중에 가진 돈이 얼마 없었던 탓에 마땅한 방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학일은 점점 다가오는데 여전히 여관방을 전전하는 신세라 나는 갈수록 초조해졌다. 그 날도 어김없이 복덕방에 들어서는 때 노주인은 손님인 듯한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는 중이었다. 주인은 날 바라보고 빙그레 웃더니 마침 방이 하나 나왔다고 말했다. 내 사정이 딱해보였는지 아는 지인을 통해 하나 얻어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고맙다고 연신 고개를 숙이며 방은 보지도 않은 채 그날로 계약을 체결해버렸다. 그만큼 급했던 것이다. 

가방 한가득 짐을 싸들고 자취하기로 한 집으로 향했다. 물어물어 찾아온 집은 이전에 연립주택으로 쓰이던 걸 개조한 듯 했다. 마당엔 듬성듬성 풀이 자라있었고 건물 자체도 낡아있어 좀 칙칙해 보였지만 이 정도면 나쁘지 않을 성 싶었다. 내가 기거하기로 한 방은 3층 복도에서 두 번째 방. 들고 온 짐을 대강 정리하고 안을 살폈다. 기본적인 가구라든지 하는 것들은 처음부터 준비가 되어 있었던 데다 부모님과 함께 살 적에 쓰던 내 방보다 훨씬 넓은 크기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개학을 했고, 처음 며칠간은 선배들 등쌀에 집에 들어오는 일이 많지 않았다. 매일 그들의 손에 이끌려 술에 잔뜩 취한 채 현관에 쓰러져 잠이 드는 게 일상이었다. 그날도 마찬가지, 비틀비틀 거리며 바닥에 몸을 눕히는데 이상하게도 그날 따라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딘가 몽롱하고 어질어질함에도 불구하고 정신만은 점점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즈음 반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따라 어쩐지 아련하면서도 애잔한 음색의 피아노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에 문외한인 나조차도 마음이 동할만큼 아름다운 소리에 무거운 몸을 끌고 창가에 섰다. 소리는 바로 위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듣고 싶은 마음에 창문을 활짝 열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흐름을 깰까 두려워 차마 열 수 없었다. 그저 가만히 귀를 대고 눈을 감는게 고작이었다. 그 한밤중의 연주회는 자정을 넘어 공기가 찬 기운을 머금을 때쯤에야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난 매일같이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버릇이 생겼다. 

위층에 사는 사람은 누구일까. 집주인에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가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혹여 오해라도 할까 걱정되어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연주는 매일같이 계속되었고 그를 만나고 싶다는 갈망은 갈수록 커져만 갔다. 딱히 만나서 어떻게 하리라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누가 연주를 하는지, 그리고 그에게 작은 존경이나마 표하고 싶다는 마음이 전부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연주는 훌륭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소위 위대한 음악인이라 칭해지는 자들의 연주는 얼마나 형편없는 것이었던가. 그가 만든 이름 모를 곡 하나 하나가 인류의 모든 음악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감히 나는 자부할 수 있다. 

그의 집 앞에서 서성이는 날도 많아졌다. 하지만 내가 그를 찾는게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차마 그를 만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그가 연주를 그만두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말이다. 
방학이 시작될 무렵에도 난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자취방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빠져나가자 그의 연주는 더욱 잦아졌던 것이다. 특히 방음이 잘 되지 않았던 터라 그의 집 문 앞에 있다보면 여느 때보다도 선명한 선율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가지 이상한 점은 그렇게 그의 집 앞에서 살다시피 했는데도 한 번도 그는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때론 연주를 하지 않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늘 그의 집 안에선 무어라 다투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흡사 누군가를 위협하듯 쉿쉿 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으레 있는 창작자의 고통이려니 했다. 선율이 사라진 적막한 복도의 공기는 더위에 지친 개의 숨결처럼 무겁고 끈적끈적하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어느새 몸이 불편함을 감지할 때 쯤이면 다시 연주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러길 며칠째 어느날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한 번쯤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알겠다고 대답했다. 당분간 그의 연주를 들을 수 없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서글퍼졌다. 다음날 이른 기차편으로 떠나야 했기에 마지막으로 그의 연주가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밤이 깊어갈 무렵 복도를 나와 4층의 복도로 올라갔다. 어쩐지 그날따라 발걸음이 무거웠다. 계단 곳곳에 끈적끈적한 진액을 발라놓은 듯 발이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벽면에 낀 곰팡이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단순한 울증 때문은 아니었다. 복도 입구서부터 풍기는 악취는 분명 공상이라 치부하기엔 너무나 선명했던 것이다. 

늘 이맘때 쯤이면 들려오던 소리가 그 날따라 조용했다. 벽에 기대 그의 연주가 들리길 기대했지만 침묵만이 이어질 뿐이었다. 달도 숨을 죽이고 벌레도 울지 않는 밤이었다. 그 날은 연주를 하지 않는 모양이라며 포기하고 돌아서는 순간 나는 발작적인 사람의 신음소리를 들었다. 흠칫 경련이 일 만큼 섬뜩한 소리였다. 그리곤 이어지는 날카로운 고함. 갑자기 미친듯이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평소와는 다른 매우 거친 소리. 미칠듯한 빠르기로 이어지는 연주는 어느새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바뀌어 있었다. 

"손가락이......손가락이......도대체 벗어날 수가 없어......" 

흐느끼는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 들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도 모르게 방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손잡이를 잡아당기자 뜻밖에도 문은 열려있었다. 악취가 풍겨왔다. 

더듬더듬 손을 내밀어 전등을 켜자 방 안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수 년은 지난 듯한 쓰레기들이 도처에 뒹굴고 있었고, 중앙에 놓인 피아노엔 흉측한 몰골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빛이 바랜 피아노 스툴 밑의 장판에는 오줌인 듯한 것이 늘어붙어 있었다. 연주는 미친듯이 빨라졌고 그 광기의 선율은 벌떼가 웅웅 거리듯 방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그 광경은 단순히 끔찍하다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것이었다. 

"뗄 수가 없어.....뗄 수가......"

남자는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계속 알 수 없는 말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움푹 패인 그의 뺨은 며칠간 먹지 못한 듯 꼭 마른 해골처럼 보였다. 두려움이 심장을 짓눌렀지만 서둘러 그를 빼내야 겠다는 생각에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남자는 의외로 완강했다. 온 힘을 주어 끌어당기는데도 남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흡사 누군가 반대편에게 그의 몸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철머 느껴졌다. 연주는 계속되었다. 그의 몸은 주체할 수 없을만큼 경련을 일으켰고, 그에 응답하듯 창문이며 가구들 역시 마구 떨리고 있었다. 초조해졌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피아노 스툴을 힘껏 걷어찼다. 낡은 스툴의 다리가 부러지면서 남자가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의 손가락은 여전히 피아노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몸을 움켜쥔 채 내 쪽으로 힘껏 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피아노에서 떨어진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내 품에 안겨있던 남자의 몸이 서서히 허물어지더니 금새 폭삭 꺼져버리는 것이 아닌가. 마치 불에 타고 남은 재처럼 허물어진 남자는 낡은 옷가지만 남겨 놓은 채 사라져버렸다. 순간 재가 되어버린 남자의 몸에선 검은 안개 같은 것이 튀어나와 방 안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창문이 세차게 덜컹거리더니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져버렸다. 안개는 한 차례 방 안은 휘돌더니 금새 창문 밖으로 빠져나가버렸다. 그리고 피아노는, 피아노는 여전히 그 광기의 선율을 토해내고 있었다. 놈은 자신의 먹이를 빼앗긴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몰아치는 돌풍에 쓰레기들이 이리저리 휘날리기 시작했다. 그것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다. 겁에 질린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피아노가 토해내는 울부짖음이 밤바람을 타고 금새라도 어깨를 잡아챌 것만 같았다. 거리의 불빛은 칙칙한 어둠만을 토해내는 듯 흐릿해보였고 한참을 달리다가 그만 쓰러져버리고 말았다. 

눈을 떴을 땐 부모님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무려 4일 간이나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후에 들은 말로는 내가 밤마다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고 한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섬뜩하던지 결국 병원 측에서 개인 병실을 내주었다고.

퇴원 후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2학기는 휴학을 신청한 뒤 바로 군입대를 자청했다. 어머니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 집에 대한 기억을 빨리 잊기 위해서라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전역 후 다시 이전처럼 평범한 날들을 보내던 중 갑자기 그 집에 대한 생각이 났다. 시간이 많이 지난터라 두려움도 무뎌졌는지 문득 발걸음을 그곳으로 향했다. 건물은 알 수 없는 이유로 무너져내렸다고 했다. 다행히 건물에 아무도 없었던 탓에 다친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시에서는 부실 공사로 처리한 듯 했지만 어쩐지 찝찝했다. 기억을 되짚어 건물이 있던 자리를 찾았지만 뜻밖에도 거리는 무척이나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 곳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었던 터라 결국 그 건물이 있던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연주에 대한 기억이 날로 흐릿해지는게 아쉬웠지만 그저 추억 속에 남겨두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그리고 그 덕택에 내 진로를 결정할 수 있었기에 그에게 감사한다. 

얼마 전에 헐값에 구입한 중고 바이올린 케이스를 어깨에 꼭 들쳐맨 체 익숙한 불빛이 있는 거리로 나왔다. 인적 없는 골목 너머에서 금방이라도 그의 연주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출처


웃대 - 왁스원샷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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