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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주의,브금없음]무너진사랑
게시물ID : panic_203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행복한하루♪
추천 : 2
조회수 : 2981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1/10/09 15:59:52



“내 말 들어봐요, 언니. 

나 진짜 언니밖에 말 할 사람 없는 것 같아서 메시지 남기는 거야. 

내가 언니밖에 안 믿는 거 알지? 

나 처음 언니 옆집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언니랑 뭔가 통했었잖아. 

그때 언니가 나한테 무척이나 잘 해줬고, 

나 일 나갔을 때 우리 민영이 잘 봐주고 그랬었잖아. 

그래서 내가 언니만 믿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 들어 봐줘요, 언니. 

나 진짜 언니밖에 없어. 

이제 정말 언니 밖에 없어서 그러는 거야.










이사 오고 나서 언니가 나한테 되게 잘 해줬었잖아. 

나 그때 막 이혼하고 민영이랑만 진짜 열심히 살려고 그랬었단 말이야. 

마음은 굳게 먹으려고 해도 한적한 동네에서 나 혼자 열심히 살아가보려해도 진짜 못 살겠더라고. 

집안일 해줄 사람도 없으니까 가정부 쓰기도 하고,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들어서 우울증도 있고 그랬었단 말이야. 

그때 언니가 여행 갔다 돌아와서 옆집에 새로 왔냐면서, 

나한테 무척이나 잘 해줬었잖아. 

뭐 필요한 거 없냐고 물어보고. 

여기 동네 조금 조용해서 사람들이랑 친해지기 힘든데 자기는 나랑 뭔가 잘 맞을 것 같다면서. 

나 언니가 나한테 그래줘서 너무 고마웠어. 

다시 힘내서 살 수 있는 용기, 그거 받았어. 

정말 고마워. 

정말 언니 아니었으면, 난 벌써 목을 매달거나 손목을 긋거나 옥상에서 뛰어 내렸을지도 몰라.











사실 나 처음에는 언니를 백퍼센트 믿지는 않았어. 

그냥 좋은 사람이구나라고만 생각했지, 

지금처럼 모든 걸 언니한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믿지는 않았었거든. 

내가 언제 언니를 믿었냐면, 

그래, 

바로 그 때였어. 

언니가 민영이 찾아 줬을 때 말이야.












엄마라는 사람이, 자기 딸을 잃어버리다니. 

죽을 것 같이 창피하기도 하고, 

죽을 것 같이 걱정됐어. 

차라리 내가 죽어 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항상 민영이를 데려다주려고 했었는데, 

이혼 서류 문제 때문에 늦게 도착했었거든. 

기억나지?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었어. 

경찰들도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근데 언니가 먼저 나 진정시키고, 

애 사진 가지고 다니면서 주변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그랬잖아. 

친구들이랑 놀이터에서 소꿉장난 하고 있는 민영이 찾은 것도 언니였고. 

생각해보면, 난 울고만 있었어. 

민영이를 어떻게 찾아야할지도 모르겠고, 너무 무서웠어. 

민영이가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까. 

그런 무서운 상상들이 민영이를 잃어버린 그 순간보다 더 무서웠어. 

그런데 언니가 다 찾아줬잖아. 

그 때, 언니를 믿기로 했어. 

언니가 내 삶에 무언가를 도와주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어.











정식적인 이혼 절차를 모두 수속하고, 언니가 그랬잖아. 

이제, 정말로 아픈 인생 살아가지 말자고. 

같이 열심히 살아보자고, 자기도 응원하고, 매일 하느님께 기도 한다고. 

언니가 그랬었잖아. 

정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몰라. 

그래서 열심히 일했어. 

기도하는 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또 민영이를 위해서 열심히 일했어.












그렇게 정신없이 일했었지. 

언니도 학교 선생님이다 보니까 많이 바빴잖아. 

진짜 만날 시간도 없고 해서 옆집인데도 자주 마주치지도 못하고. 

나도 바빴었지. 

얼마나 정신없이 지냈냐면, 어느 날 내가 아침에 딱 눈을 뜨면, 

민영이가 벌써 예쁜 손녀나 손자를 나에게 맡기고 지내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없었어. 

정말로 이렇게 지내다가 눈을 딱 뜨면 민영이는 어느새 다 커서 시집을 가버리지 않을까, 

이렇게 내 삶에 평화가 영영 머무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조금 몸이 안 좋더라도, 

또 정신없이 일하다가 보면 몸이 아픈 것도 잊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일했었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말 이렇게 사는 것도 평화로운 삶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 날이었을 거야. 

민영이가 자꾸 자기 친구들이 왜 너희 집에는 엄마밖에 없냐고 묻는다고 했을 때. 

민영이가 흘려서 말한 것이지만, 

나는 민영이의 말에 얼마나 가슴에 커다란 상처가 생겼는지 몰라. 

그 순간부터, 

평화롭게 보였던 내 인생이 너무나도 야속하게 느껴지더라. 

꼭 못 달아나게 움켜졌다고 생각했는데, 

평화라는 바람이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더라고.












다시 우울해지기 싫어서, 

더 열심히 일하려고 했어. 

우리 집은 아빠가 없어도 잘 살아간다는 것을 민영이랑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었어. 

입 안에 단내가 날 정도로 꽉 물고 열심히 일했지.














그러다가 그를 만났어. 

내 고객 중 한 명이였지. 

그는 굉장히 부자였다는 것 빼고, 크게 특별할 점은 없었어. 

내가 거래하는 물품 중 가장 좋은 미술품들을 거래하는 사람 이였지. 

흔히 말해 에이급 손님이었어. 

그는 결혼한 상태였고, 집도 무척이나 으리으리하게 컸고, 아내는 의사였고, 그는 사업가였지. 

조금 이상한 조합이라고 언니가 그랬지. 

그래, 맞아. 

그래서 그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는지도 몰라.















어느 날 그가 그랬어. 

거래 목록을 좀 보고 싶다고. 

몇 달 만에 보는 그였기 때문에 최근에 들어온 물품 목록들 중 괜찮은 것을 그에게 먼저 이메일로 보냈지.

그가 몇 가지 물품을 다시 꼽아서 이메일로 보내줬지. 

또 다른 거래. 

특별할 것 없는 거래. 

그러나 그 거래는 특별했어. 

단지 그 때 내가 몰랐을 뿐이었지.












그가 고른 미술품들을 보여주기 위해 그림 몇 개를 가지고 그의 집에 갔지. 

언제나 있는 거래였고, 

이번 거래만 잘 성사시키면 민영이가 다니고 싶어 했던 태권도 학원에 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대감에 부풀었었지. 

미술품을 몇 가지 소개하고 설명하다가 어느 순간에서 인지부터 

그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챘어. 

물품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불안하기도 하고 초조했지. 

이번 거래만 성사시키면 되는데 라는 생각이 내 몸을 지배했었어. 

정말 열심히 일하려고 했었으니까. 

무슨 일이 있으세요, 사장님? 

이렇게 묻자 그가 그러더군.













혹시 저녁을 같이 먹을 생각이 있느냐고.













망설여졌어. 

난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단박에 알아챘어. 

나를 원했던 거지. 

난 알고 있었어. 

그는 내가 생각하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던 거야. 

결혼과 자신의 성욕은 별개의 문제인. 

모든 것을 가져야 만족해야할 줄 아는 그런 ‘남자’이었던 거지. 

나는 알고 있었어. 

나를 바라보는 그 탐욕의 눈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나는, 눈을, 꾹, 감고 그러자고 그랬어.












그는 나를 차에 태우더니 근사한 레스토랑에 데리고 갔지. 

민영아. 

눈을 꾹 감고 그가 나를 바라보는 것을 느끼며, 그렇게 참았지. 

손님이다, 고객이다. 

그리고 내가 선택한 길이다. 

그와 이야기가 끊이지 않게끔 하며, 

아직 내가 굉장히 매력이 넘치는 사람인 것을 과시하는 듯이 오버해서 행동하며, 

그가 나에게 확 빠져들게끔 노력하며. 

비록 옷차림은 초라할지라도, 우아하게 걷고, 우아하게 먹고.













그 날이야. 

내가 언니한테 민영이 부탁한 날. 

나는 그와 밥을 먹고 나서, 그랑 잤어. 

그렇게 나쁘진 않았어. 

그는 나를 원했고, 나는 그의 배경을 원했었으니까. 

그가 나의 지속적인 고객이 되게끔, 나는 그를 상대로 거래를 했던 것뿐이라고 생각했어. 

미안, 언니. 

조금 거북하지?











언니는 이런 생활, 아마도 모를 거야. 

이런 삶, 살아본 적 없겠지. 

나 같은 여자도 본 적 없고, 이해한 적도 없겠지. 

나 같은 여자 이야기 들어주기도 참 지겨웠을 거야. 

그런 데에도 나를 끝까지 지켜봐줬으면 해. 

내가 언니만 믿는 거 알지? 

난 이제 아무도 없어. 

아무도…….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나니,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날 원한다는 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것도, 

오히려 빙빙 돌려서 접근하는 것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고, 

저녁을 같이 먹을 때 그가 나에게 해줬던 행동들, 말들. 

일 얘기를 하지 않고 취미 얘기나 내 이야기를 맞장구 쳐주던 그. 

술에 취한 척 해서 같이 잤지만, 호텔에서 방을 잡기 전의 망설임. 

잠자리에서도, 충분히 나를 애무한 후에 나를 다루던 그. 

운동을 좋아하다 보니 몸도 너무 쳐지지 않았었고. 

만약, 그가 나를 먼저 만났더라면, 

내가 그를 먼저 만났더라면 잘 살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고. 

그는 끝까지 나를 집에 대려다주었어.














우습지. 

잠자리 하나로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이 완전히 달라지니 말이야. 

그런데 정말로 그에게는 어떠한 특별한 매력이 있었어. 

나를 확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그런 매력 말이야. 

왜 가끔씩 있잖아. 

그런 사람들. 

몇 마디 잘 안 했는데에도, 아, 그 사람 정말 매력 있다, 하는 사람들. 

그 역시 그런 사람이었어. 

그렇기 때문에 잠자리까지 가는데 순탄했던 거고.












난 이혼한 몸이야. 

민영이를 위해서라면, 내 삶이 부셔져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독하게 먹었으니까. 

언니, 억지로 이해 안 해줘도 돼. 

언니는 그냥 내 얘기만 들어줘. 

그것만으로도 난 충분해.













내 정신은 말도 안 되게 황폐해져 있었을 거야. 

또 외로웠던 거고. 

언니가 항상 하던 그 말 있잖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항상 누군가를 만나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전 남편에게 크게 대이고도, 민영이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면서도, 

나와의, 

나만의 약속을 굳게 지키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맸던 것 같아. 

그래, 외로우니까 사람이야. 

그래서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인 것 같아. 

그러니까 그런 실수도 하고, 말이야. 

외로우니까.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정말 내가 외로워서 그랬었을까? 라는 회의감이 들어. 

그래서 두려워. 

또 다시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고, 

그 실수가 큰 상처로 되돌아왔으니까. 

단순히 나의 외로움으로 그런 실수를 저질렀다고는 난 생각 안 해. 

나는, 너무 어리석었어. 

너무나도.














그래, 따지고 보면, 다 이건 전남편 때문일지도 몰라. 

그 사람, 크게 잘 못한 건 없어. 

그저 너무나도 뻔뻔했을 뿐이지. 

나 몰래 바람을 핀건 나도 이해해. 

남자니까. 

남자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해. 

난 그건 용서할 수 있고, 이미 용서 했어. 

게다가 그 사람이랑 바람난 여자, 정말 화가 나게도 젊고 아름다운 여자더라고. 

매력 있고. 

그래, 그건 누구나 저지를 수 있는 정말 ‘찰나’의 순간이야. 

그렇지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바람피운 것을 들켰다고, 다짜고짜 ‘이런 내가 싫다면 우리 결혼 생활 끝내자’라고 말 하는 건, 

그건 남편으로써의 도리를 넘어서, 

사람과 사람으로써의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말을 나에게 할 수 있었을까,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떻게 민영이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래서 난, 외로워서 그 남자를 만난 게 아닐지도 몰라.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전남편에게, 날 두고, 민영이를 두고 미련 없이 홱 떠나버릴 수 있었던 그 사람에게.

'나 여기 있어요, 그리고 잘 살고 있어요’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 

어차피 보지도 않을 사람에게, 나와 민영이는 안중에도 없을 사람에게. 

그런 하찮은 복수심으로, 내 몸을 굴렸을 거야. 

그래서 지금은 내 자신이 너무 증오스럽고, 한심하다. 

그래서 지금 받은 상처가, 더 아프고, 수치스럽다. 

바보라서, 

내가 너무나도 바보 같고, 멍청이 같고, 미친년 같아서. 

한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순간 든 복수심 때문에, 

내 인생과 민영이의 인생을 버려서. 

그런 이기적인 생각으로. 

나만의 이기심으로.















복수심에 눈멀고, 

애정에 귀가 먹어버린 나는, 

그를 그렇게 몇 번 더 만났어. 

하지만 그 이후로 계속 자지는 않았지. 

그가 나를 창녀가 아닌 여자로 느낄 수 있게. 

날 여자로 느낄 수 있게. 

날 책임질 수 있게끔. 

날.













언니는 내가 그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을 했는지 평생을 걸쳐도 알 수 없을 거야. 

그 남자와 어떻게 해보려고, 

모든 일을 다 제쳐놓고 그 남자와 어떻게 해보려고 한 나의 모습은 분명 추악했겠지. 

창녀가 아닌 척 했지만, 

실은 나는 창녀와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겠지. 

아니, 오히려 창녀들보다 더 역겨운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애 딸린 아줌마가, 돈 많은 남자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역겨운 꼴이란. 

언니는, 그런 내 모습을 절대 모를 거야.














그렇지만, 그 사람, 나를 계속 대해줬어. 

영화가 보고 싶다고 내가 은근슬쩍 말을 놓으면, 

다음 날 영화 티켓을 들고 와줬었고, 

읽고 싶은 책이 새로 나왔다고 말을 놓으면, 

다음 날 그 책은 내 손에 있었어. 

더러운 여자와도 같은 난, 그런 모습에 반했고, 

아니, 반했다고 믿고 싶었을 거야.















그 사람이랑 만나는 횟수가 잦아지고, 

만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영이는 언니와 더 붙어있어야 했어. 

그 때 언니가 그랬었지. 

요즘 그렇게 일이 바쁘냐고, 

그래도 애는 너가 더 많이 봐야 되지 않겠냐며. 

웃으면서, 미안하다고, 

이번 일만 해결되면 다음에는 이런 일 더 없을 거라고, 했었지만, 

이미 언니의 눈은 무언가를 보고 있었겠지. 

하나의 벌거벗은 채로 돈을 가슴에 끼고 있는 창녀를 보고 있었겠지.













그를 더 만나면서도, 언니 생각을 계속 했어. 

민영이 생각도 계속 했지. 

언니가 나를 어떻게 봐줄까, 언니가 나를 예전처럼 바라봐주긴 할까. 

언니가, 더 이상 민영이를 봐주지 않을까. 

그에겐 내가 애가 있다는 사실을 언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앞으로 이대로 말하지 않은 채로 지낼까. 

이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불안했어. 

언니가 나를 조금씩 의심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세상이 나를 조금씩 의심하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에, 

너무나도 불안했어. 

그 때, 아마 가정부 아줌마를 불렀을 거야. 

언니한테 더 이상 민영이 맡기지 않으려고 했었어. 

언니에게 너무 미안하기도 했고, 

난 무척이나 이기적인 년이라서 가정부 아줌마를 둠으로써 

그를 더 만날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고.















다시, 불안한 행복이 계속 됐지. 

나는 점점 그에게 빠져들어 가고 있었고, 

이젠 잃어버린 내 영혼의 반쪽이, 전 남편이 아니라 그이지 않았을까, 

그 반쪽을 다시 합쳐야 되지 않을까라는 위험한 생각도 하게 됐지. 

왜 난 그렇게 그 사랑에 필사적 이였을까, 

왜 그렇게 목말라했을까, 

왜 그렇게 매달렸을까. 

왜 매달렸을까. 

왜. 

매달렸을까.
















그렇게 또 몇 주가 지나갔어. 

이미, 나는 그를 만나는 것 자체가 일상이 되어있었고,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꼭 나는 그와 이야기를 해야만 했어. 

얼굴을 보기 힘들면, 메신저로라도, 

메신저로라도 이야기하기 힘들면 전화로라도, 

전화로라도 이야기하기 힘들면 문자로라도, 

문자로라도 이야기하기 힘들면 나 혼자만의 상상 속에서라도.














그러다가 언니한테서 전화가 왔었지.













언니가 나보고 그랬잖아. 

요즘 잘 지내냐고. 

언니가 그 얘기 꺼내는 순간부터, 짐작하고 있었어. 

언니, 나 없을 때에도 계속 음식 하면 우리 집에 와서 가져다주고 했다면서.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레 가정부 아줌마랑도 친해질 거라고 생각했지. 

언니 성격 좋잖아. 

모르는 사람이랑도 금방 친해질 수 있고. 

그러다보니까, 언니가 나한테 이야기를 꺼낸 순간, 직감이 왔어. 

난 잘 지내, 언니는?












그 다음 말이 뭔지 기억해, 언니? 

짐작을 하는 거랑, 직접 그 일이 벌어지는 거랑은 정말 큰 차이가 있더라고. 

언니가 다짜고짜 그랬잖아. 

가정부 아줌마한테 들었는데, 요즘 너 혹시 남자 만나냐고.















처음에는, 조금 당황스러웠지. 

이렇게 빨리 들킬 줄은 몰랐고, 이렇게 언니가 빨리 물어볼 줄은 몰랐고. 

그리고 가정부 아줌마도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그 남자, 우리 집에 데려다 준 적 딱 한 번 밖에 없었거든. 

그리고 그 다음에 든 생각은. 

가정부 아줌마가 왜 그런걸 말할까라는 생각이었어. 

솔직히, 내가 누굴 만나든, 그게 뒤에서 얘기 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런데, 민영이 다음으로 제일 내 이야기가 귀에 들어가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었던 언니한테 

내 이야기를 한거 아니야. 

화가 났었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어쩌지? 라는 생각 뿐이었어.














사실을 말할까, 거짓말을 칠까. 

내가 무슨 남자가 있냐고, 난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웃으며 넘겨버릴까? 

아니면, 언니, 나 다시 거짓말처럼 사랑에 빠진 것 같아, 

결혼을 생각할 정도로 라고 진지하게 말해볼까. 

그냥 무슨 소리냐고 자세히 물어볼까. 

왜, 내가, 행복해지는걸 세상은 방해할까? 

왜 세상은 나를 그렇게 무너지게 만들까. 

그런 생각까지 미치니까, 

갑자기 온 몸에 힘이 쫙 빠지면서 몸에 걸치고 있는 옷이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지더라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까스로 전화기를 두 손으로 꽉 잡고, 

부들부들 떨면서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노력 하는 것 뿐이었어. 

입술을 땔 힘도, 나에겐 있지 않았었으니까.













언니가, 이런 내 모습을 알았던 것일까. 

지금 바쁘면, 나중에 있다가 만나서 얘기 하자는 언니의 말이, 나는 너무나도 고마웠어. 

그래, 라고 겨우 말하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어. 

민영이가 어느새 내 옆으로 와서, 엄마 괜찮아? 라고 물어보는데, 

그 순간, 가슴에서 울컥 하고 무언가가, 올라오더라. 

나는 왜 이렇게 나 밖에 몰랐을까.












모든 것이 민영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를 만났지만, 결국 전부 나를 위한 만남이었어.












그를 만날 땐, 난 민영이를 숨겼고, 지워버렸어. 

마치, 내 뱃속엔 아이가 없었다는 듯이. 

귤을 한 상자를 까먹고 귤껍질까지 빨았던 기억마저 없었다는 듯이. 

엄마라는 단어는 내 머릿속 사전에서 지워버렸다는 듯이. 

그렇게 이기적이게, 그를 만났어.














언니, 난 죽어야 마땅한 년이야.















민영이 얼굴을 보는 순간,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막 흘렀어. 

민영이가 엄마 왜 우냐며, 같이 따라 울더라고.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너무 미안해. 

민영이를 붙잡고 그렇게 울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눈물마저 거짓일까 봐, 

그 눈물마저 나의 가식이었을 까봐, 무서웠어. 

그래서 더 울었어.















나는 망가졌어. 

내 몸은 부서져버렸어. 

하나님이 날 버렸을까? 

기도하고, 기도를 했는데에도. 그것 가지고는 안 되는 걸까? 

난, 한 순간만이라도, 마음 놓고, 정말로 웃고 싶었을 뿐인데. 

정말 그 뿐이었는데. 

정말, 

그 뿐이었는데.
















민영이는 내 품에서 울다가 지쳐 잠들었었어. 

그 작은 손으로, 내 손을 꼭 잡고는, 떠나지 말라는 듯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다 괜찮아질 거라고 말하려는 듯이. 

이 아이는, 내가 이런 줄 모르겠지.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겠지. 

내가 어렸을 때, 내 엄마가 제일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처럼. 

미안하다, 미안해. 

그렇게 더 울었어.














무거웠던 내 몸은 어느새 조금 가벼워져 있었어. 

사람의 몸의 70퍼센트는 수분이래. 

내 몸도 눈물로 70퍼센트가 이루어져 있을까? 

그래서 조금 가벼운 느낌이 들었던 것일까?















언니한테 큰마음 먹고, 얘기해야 될 거라고 생각했어. 

언니니까. 

못난 애미 대신에 민영이 찾아주고, 병신 같은 애미 대신에 민영이 봐줬던 언니였으니까. 

같이 늦은 점심이나 같이 먹으면서 얘기나 조금 해보자고.
















초조했어. 

말은 그렇게 꺼냈지만,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두고 도망가고 싶었어.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보면 집 한 채가 통째로 없어지잖아. 

우리 집도 그렇게 없어져버렸으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손톱을 물어뜯고, 

차를 연거푸 마시고, 

화장실을 들락날락 거리다보니, 

초인종 소리가 들리더라고.













언니는 아마 짐작 하고 있었을 거야. 

언니는 똑똑한 학교 선생님이고, 나는 할 줄 아는 게 남자랑 사랑 하는 일 밖에 없는 년이니까. 

나는 사실 그 때 있었던 일이 잘 생각나지 않아. 

무슨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아. 

어떻게 말을 꺼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무섭고, 두려웠어.













언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할까봐. 

이혼이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새로운 남자를 찾아서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그에게 내가 애엄마라는것을 밝히지 않고 계속 만나고 있다는 것을. 

그렇지만 언니는 날 받아줬어. 

진심으로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줬고, 

진심으로 내 손을 잡아줬잖아.













그 날이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내 안 속에 꽉 차 있었던 무언가를 연거푸 토해내듯이 풀어 냈던 것 같아. 

고마웠어, 언니. 

정말로.















그렇게 언니와 만나서 내 이야기를 다 하고나니까, 

한 없이 무거웠던 내 몸이 믿을 수 없게 가벼워지더라. 

내 몸 위에 얹어져 있던 내 삶과 민영이의 삶의 무게를, 

언니가 어느 정도 들고 가지 않았을 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야. 

정말로 고마웠어.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희망을 언니를 만날 때 마다 얻게 되더라고.














가벼워졌기 때문일까, 더 이상 그를 큰 부담을 갖지 않고 만나게 됐어. 

일부러 매력 있는 척 하지 않고, 내 실제 모습으로 그를 만났지. 

덜 꾸미게 되고, 더 많이 웃게 되고. 

내가 편해지니까, 그 역시 편해지더라고. 

그 때쯤 되니까, 억지로 내가 만들어낸 호감이라는 감정은 진실 된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변했어. 

아, 내 행복이 이제야 날 찾아오는구나. 

지금껏 많이 아파왔던 내 삶들과 안녕. 

새로운 삶들과 안녕. 

나는 그에게 점점 빠져들어 갔어.














단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민영이였어.














난 그에게 내가 애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거든. 

나는 그가 아이는 없지만 한 가정의 남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어. 

다시, 내 몸은 무거워지기 시작했어.













언니, 난 아무래도 엄마가 될 자격이 없나봐. 

난 민영이에게 너무나도 못된짓을 했어. 

난 미친년이야. 

정말, 난 엄마가 될 자격이 없어. 

내 몸이 무거워지고, 계속 무거워짐에도 불구하고 난 그 무거운 몸을 이끌고 그를 만났으니까. 

민영이 때문에 이 사랑이 깨지게 하고 싶지 않았어. 

정말 어쩌다 난 이런 괴물이 되어버린걸까?













난 그렇게 괴물이 된 모습으로 그를 만나고, 그를 사랑하고. 

집에와서 민영이의 얼굴을 보고 밀려오는 토악질에 연거푸 내 몸을 쏟고. 

사랑한다고, 또 다시 밀려오는 토악질을 참고 민영이에게 말하고. 

다시 괴물이 되가고. 

다시 그를 만나고, 

그를 사랑하고, 

랑한다고, 또 다시 밀려오는 토악질을 삼키고 그에게 속삭이고.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먼저 말했어. 

혹시 너 아이가 있지 않느냐고.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고 침대에 누워 좀 전의 관계를 다시 상상하고 있던 나는 갑자기 수치스러운 느낌이 느껴졌어. 

어떻게 알았을까라는 생각보다 왜 그가 알았을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언니, 나는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린거야.














내가 아무런 말도 없이 이불 속으로 점점 들어가 꼼지락거리기만 하자 그가 계속 입을 열더라고. 

원래 오래전부터 알았는데, 자기가 먼저 말할때까지 비밀로 하고 있으려고 그랬다고. 

예전에 집에 대려다주면서 그 집에서 기다려본적 있는데 애가 그 집으로 들어갔었더라고. 

그 꼬마 아이, 되게 예쁜게 자기 닮아서 바로 알아봤다고. 

그런데 지금 왜 말을 꺼내냐면, 

자기가 딸이 있다는 사실을 죄로 받아들이고 있는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랬다고. 

세상에 어떤 부모가 자식이 있다는걸 숨기고 싶어 하겠냐며, 

괜히 나한테 미안해할까봐 꾹꾹 참았던거 안다고. 

이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그 앞에서 처음으로 울었어. 

토악질이 밀려오는걸 꾹, 꾹 눌러 담으며. 

그가 날 위로해주더라고. 

이해한다고, 딸이 있는건 어떤 기분이냐며. 

자긴 결혼한지 꽤 됐는데 아이가 안 생겨서 그런지 무척이나 부럽다고. 

토악질이 더 밀려오기 시작했어. 

내 몸은 한없이 무거워졌지.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어.















내가 울음을 그치자 그가 말하더라고. 

지금까지 생각해봤는데, 우리 너무 행복했다며. 

날 이렇게 행복하게 만든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며. 

무언가 불안했어. 

불안하기도 하면서 전남편이 나에게 청혼을 했던 그 순간의 느낌이 오더라고. 

그래, 그가 나에게 이혼서류를 보여주더라고. 

이젠 정말로 자기랑 평생 그 행복한 순간을 가지고 싶다고. 

그가 그렇게 말했어.
















또 다시 울었어. 

나에겐 이 사람만 있다면 내 몸이 얼마나 무거워져도 견딜 수 있을것 같다. 

무슨 일이든 다 해쳐나갈 수 있을것 같다. 

그가 또 다시 날 위로하더라고. 

이제 곧 정식으로 우리 만날 수 있는거라고. 

그는 그렇게 말했어.















그가 날 집에 태워주고, 집에 들어온 난 자고있는 민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제서야 웃을 수 있었어.

이제 다시 아빠가 생기는거야. 

민영이가 잊고 있던 아빠라는 단어를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얼마나 생각해왔을까. 

그 사람이 아빠라는 단어를 말하게 해줄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얼마나 기다려왔을까. 

내 방에 가서 나 혼자 침대에 누워 여보라는 말을 연습했어. 

여보, 

여보, 

여보, 

여보. 

허공에 그렇게 흩어진 그 단어들은 내 꿈을 행복하게 해 줄 자장가였지.
















기대감에 부풀었던 그 날의 나의 아침은 지금도 잊을 수 없어. 

민영이가 나를 뽀뽀로 깨웠던 나의 아침. 

한껏 가벼워진 내 몸, 맑아진 내 머리. 

그의 향수 냄새를 상상하며 샤워를 하고, 그가 좋아하는 음식을 상상하며 아침을 차리고. 

민영이와 웃고 떠들며. TV를 보다가 갑자기 그이가 생각나 전화를 해보고. 

전화를 받지 않던걸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피곤해서 아직 안 일어났나보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















그 날의 낮도 나는 잊을 수 없어. 

가정부 아줌마를 해고하고 나니 집에 둘 밖에 안 사는 데에도 일이 많더라고. 

빨래를 하고, 민영이 방 정리를 하고, 다가오는 겨울을 위해 솜이불도 꺼내놓고. 

그이가 다시 생각나 전화를 해보고. 

전화를 받지 않던걸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일이 바쁜가보다.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














그 날의 저녁도 나는 잊을 수 없어. 

빨래가 돌아가는 소리를 벗 삼아 낮잠을 자고 일어난 나는 민영이가 TV보는 소리에 일어났고, 

이른 저녁을 먹었지. 

탈수되어 나온 빨래를 다림질을 하고 뽀송뽀송해진 그 면의 촉감을 느끼며 그가 보고 싶어졌고. 

빨래를 다 개고 나서 그에게 전화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에게 전화했고. 

전화를 받지 않던걸 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 

아직 일이 안 끝났나보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















그 날의 밤도 나는 잊을 수 없어. 

오랜만에 TV 쇼프로그램을 보고 민영이랑 한바탕 웃고. 

민영이 학교 숙제를 봐주고, 허기가 조금 져서 과일을 잘라서 먹고. 

과일을 먹다보니 그가 보고 싶어져서 나는 다시 전화를 했고. 

전화가 아예 꺼져있다는 음성에 서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 내가 전화한 번호는 더 이상 없는 번호가 되었지.
















그게 무슨 소린지 언니는 이미 알고 있지? 

그는 그렇게 없어졌어. 

증발했어. 

마치 원래 없었던 사람인 냥, 그렇게 없어져버렸어. 

몸이 다시 무거워지고, 토악질이 밀려오더라.













무작정 언니를 기다렸어. 

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어. 

그가 없다는 이 사실을. 

그가 없어도 세상은 원래대로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난 이렇게 돌아가지 않는데. 

난 그 자리에서 멈춰있는데. 

결국은 다시 민영이는 아빠 없는 아이가 되고,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이 싫었고, 

증오스러웠어. 

그를 찾을 힘도 없었어. 

다시 그렇게 돌아가는 세상을 견디는 것조차 힘들었고, 무거웠어. 


















언니 집 앞에서 무작정 앉아 기다렸어. 

밤늦게 언니 돌아오자마자 언니 얼굴 보고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터졌어.

















그 날도 난 기억이 잘 나지 않아. 

내 안에 모든 것을 연거푸 토해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렇지 못했었어.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조금 더 똑똑한 여자였다면. 

후회. 

그리고 또 후회. 

증오. 

그리고 또 증오. 

모든 것이 후회와 증오뿐 이였어. 

내게 남은 건 정말 독한 독뿐이었어. 

난 다시 괴물이 된 거야.














도망치듯 언니의 집을 나서고, 집으로 들어와 자고 있는 민영이의 얼굴을 보며 

난 내 마음에 독을 찰 수밖에 없었어. 

난 다시 괴물이 된 거야.


















그의 체취들. 

그의 티끌들. 

그의 흔적들을 인터넷에서 뒤지기 시작했어. 

그가 다니고 있는 회사에서 그가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 알게 되었고, 

그의 개인 홈페이지를 알게 되었고, 

그의 회사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어. 

그를 찾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어.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자마자 즐겁게 지 가족들이랑 여행을 떠난 사진이 보였으니까. 

나쁜 놈, 입술을 잘근 깨 물은 그 틈사이를 헤집고 욕이 나오더라고.

















내가 느낀 그 절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어. 

내가 왜 그 이혼서류를 자세히 보지 않았을까. 

몇 번이고, 몇 십 번이고 본 서류인데. 

그게 왜 진짜라고 나는 철석같이 믿었던 걸까. 

난 왜 그를 믿었던 걸까?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그는 나와 한번 저녁을 같이 먹고 나와 자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단지 그 뿐이었는데.
















내가 상상했던 그 모든 것들, 그 모든 것들이 공중에서 흩어져버렸어. 

아빠, 여보, 행복, 미래, 내 삶. 

가까스로 그것들을 끈으로 묶어 날아가려는 것을 붙잡고는 놓치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손바닥이 벗겨지고 피부가 들어날 정도로 그것들을 당겨 거의 내 코 앞까지 당겼다고 믿고 있었는데. 

그 끈들은 썩어버린 동아줄이었던 거야. 

아니면 누군가가 싹둑하고 그것들을 가위로 토막내버렸을지도 모르고.


















언니,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는 거지? 

그 사람은, 그 사람은. 

그 사람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는 거냐고.














어떻게?












난 그 날 이후로 아무도 만날 수 없었어. 

언니도 만나지 않았어. 

아직 제 주인을 찾지 못한 미술품들도 전부 주인을 찾아줬어. 

난 이제 민영이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이젠 아무도 믿지 못해. 

언니, 난 정말 괴물이 되어버린 거야.















그의 홈페이지에 매일같이 들락날락 거렸어. 

마치 날 비웃기라도 한들 그들의 모든 사진엔 미소가 가득했어. 

그 여자 드디어 임신했더라고. 

난 더 비참해졌어. 

고작 그거 때문에 날 떠난 거야? 

고작 그 불러오는 그 배 때문에 날 버린 거야? 

그 사람은 점점 뚱뚱해지고 볼품없어지는 그녀의 몸뚱이를 보고 날 버린 거야? 

더, 더 비참해졌어. 

전화기를 들고 그들이 묵고 있는 호텔에 전화를 걸어, 그를 찾았지. 

안 된다는 직원과의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는 원하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어. 

그의 아내와 통화를 할 수 있었어.
















그 사람의 아내의 목소리는 전혀 듣기에 좋지 않았어. 

그 사람이 자기 아내의 유일하게 예쁜 건 목소리라고 그랬는데 말이야. 

넌 그 목소리마저 내 아내보다 예쁘니까 난 이제 아내와 있을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말이야.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목소리. 

토악질이 밀려오는걸 꾹꾹 참으며 말을 꺼냈어. 

종권씨 아내 되시는 분이시죠? 

저 며칠 전까지 종권 씨랑 사귀었던 여자예요.
















그의 아내와의 통화는 나의 복수를 그에게 펼치기 위한 좋은 첫 단계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언니, 그녀가 뱉은 그 다음 말이 뭔지 알아? 

그녀가 내게 했던 말말이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그 행복한 티를 내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 

그런데요?














난 전화기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어.














언니가 만약 그 때 내 옆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난 정말로 괴물이 되어버렸어. 

흉포한 마음을 가진 괴물 말이야. 

입을 벌리고 민영이가 깨지 않도록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들을 찢어버리고 싶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녀의 배를 갈라 그가 나에게 다시 돌아오도록 하고 싶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혀를 잘라버리고 싶었어.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의 성기를 망치로 내려치고 싶었어.














난 그렇게 괴물이 되었어.













언니,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아. 

그들은 10분 후에 이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야. 

오랜 여행 끝에 다시 그들이 대한민국의 땅을 밟을 시간이 되었어. 

이젠 둘이 아닌 셋이 되어서 말이야.













내 손에는 지금 날이 선 식칼이 들려있어. 

민영이는 내 차 뒷좌석에 앉아서 곤히 잠들었어. 

민영이는 괴물 엄마가 뭘 하는지 알고 있을까? 

민영이는 똘똘한 아이니까, 알고서 잠든 척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












언니, 이제 나는 내 무너진 사랑에 이별을 고하려고 해. 

내 무너진 삶에 마침표를 찍으려고 해. 

언니, 근데 듣고 있어? 

언니가 학교에 있어서 낮에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의도적으로 전화기 꺼둔 건 아니지? 

마지막으로 언니한테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전화기가 꺼져 있어서 메시지 남기는 거야.













그래도 마지막으로 언니 목소리 들으면서 인사하고 싶었는데.













언니, 정말 지금까지 고마웠어. 

나 진짜 언니밖에 말 할 사람 없는 것 같아서 메시지 남기는 거야. 

내가 언니밖에 안 믿는 거 알지? 

나 처음 언니 옆집으로 이사 왔을 때부터 언니랑 뭔가 통했었잖아. 

그때 언니가 나한테 무척이나 잘 해줬고, 

나 일 나갔을 때 우리 민영이 잘 봐주고 그랬었잖아. 

그래서 내가 언니만 믿는 거야.














정말 오랜만에 목소리로만 안부 전해서 미안하고, 

이게 정말 생뚱맞은 부탁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민영이, 언니가 잘 챙겨줬으면 해.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으면 그 때 민영이 찾으러 언니네 집으로 갈게.















언니, 보고 싶다…….















그럼 이만 끊는다. 

언니는 행복해야해. 

나랑 다른 삶을 살아야해. 

알겠지? 

그럼 안녕."













결.













출처


웃대 - 우노히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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