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심장이 멎을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온다. 뭐냐 이 만화 같은 대사... 아니 전개는. 설마 내가 자꾸 말도안되는 대꾸를 해서 짜증이라도 난걸까? - 아니. 하지만 목소리는 너무나도 장난스럽고 밝다. 그렇다면, 날 놀리는거...그런건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생각해라, 지성원. 생각해라. 여기서 무너지면 안된다 지성원. 게다가 지금 이건 전화란 말이다. 답장으로 뭘 할지 고민할 시간이 주어지는 문자가 아닌, 실시간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이건 턴방식 삼국지가 아니라 실시간 스타크래프트란 말이다!
“아아...”
신음을 내고 있을때가 아니잖아, 지금 그 신음으로 멀티 하나는 날아간 기분이다.
“...바로 맞추셨네요.”
하면서 웃는 내 입. 응?
[그래?] “그럼요. 저 아직도 학생요금제 쓴단말이에요- 누나쪽에서 전화하셔야지. 크크” [후, 이 짠돌아.] “미안해요 이따 야식 사줄게요~”
...정말 내가 하고 있는 말이지만 내 자신을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이대로 종점에서 내리면 바로 보여요? 아, 설마 롯데리안가?”
...게다가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대로라면 아마존에 서식하는 능구렁이와 다를바 없다. (물론 아마존에 구렁이가 사는지는 알바없다) 이러한 나의 반응은 서연누나한테 살짝 의외의 반응이었는지, 누나의 자신만만하던 목소리는 살짝 당황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아. 그게. 응, 그래.] “그래요? 그렇구나~ 알겠어요 금방 갈게요.”
이정도면 적어도 선방한걸까.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그래보인다. 그건 그렇고, 정말 뜬금없잖아, 이런 발언은.
[응, 그럼 이따봐.] “아 누나.” [응?]
마음속으로는 ‘저랑 더 통화하고 싶으세요?’라고 물어보고 싶지만, 왠지 그러면 이렇게 기적적으로 방어해온 것들을 홀랑 날려먹을 것 같다는 생각에 꾹 참기로 했다.
“아니에요. 이따봐요~” [응~]
밝다, 귀엽다. 이런 목소리라면, 몇 년을 가도 잊혀지지 않을것 같다 - 전화기를 끊으면서 문득 내 전화기에는 녹음기능이 없는지 집에 가서 매뉴얼이라도 뒤적거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버스도 녹두거리에 거의 도착했는지, 속도를 줄이고 어두운 차고지로 들어간다. 다시말해, 종점이라는 소리다.
‘설마 눈치챈건가?’
문득 뇌리에 스며드는 한 줄기 생각. 하지만 난 이를 세차게 고개를 돌리며 부정한다. 일단, 나 자신도 내 감정이 어떤지 눈치 못챘는데. 그런데 다른 사람이 안다는 게 말이 안되지. 여자의 육감이 아무리 대단하다고는 해도, ‘내 자신도 좋아하는지 모르는데’ 눈치를 챈다는 것은 일단 논리에 맞지 않는거지, 그럼. 하지만 버스에서 내리고 (애초에 어딘지 알고 있었던) 독수리버거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면서, 그리고 지수와 서있는 서연누나를 보면서. 그리고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그것을 보고 심박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맙소사...”
난 의미없는 말과 함께 한숨을 쉬는 것 외에는 달리 할 말이 없었다.
*
경석이와 주현누나는 좀 늦게 합류했다. 6시 40분정도였던가. 늦은 것에 대한 벌금으로 우리는 분식집에서 라볶이를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평소대로라면 ‘성원이를 보면 점심에 뭘 먹었는지 알 수 있다’라는 말처럼 입가에 뭔가를 묻히고 먹는 나였지만, 이상하게도 그 ‘입가에 묻히기 쉬운 음식’ BEST 5안에 들어가는 라볶이를 먹는데도 나는 깨끗한 안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일단 무지하게 신경썼기 때문이랄까. 라볶이를 먹는 도중에도 난 일단 시간을 아끼기 위해 토의를 하려고 했다. 어떻게든 그런 식으로 조모임 시간을 아낀다면 막차라도 탈 수 있지 않을까 - 하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하지만 그러한 나의 기대는,
“라볶이 맛있다!” “그쵸 누나? 역시 내가 메뉴 선정을 잘한거야!” “그런데 텔레비전에서는 뉴스밖에 안하는거야?” “성원아. 천천히 해도 된다아이가. 맘 푹놓고 하래이.” “...”
...그냥 밤새버리자는 일종의 포기로 옮겨져버렸다. 밥을 다 먹고 난 우리는 피씨방을 찾으러 본격적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신촌거리에서는 세건물 건너 피씨방이 하나씩은 있을 정도로 그 형세가 찬란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 선정에 있어서는 별 걱정을 하지도 않았다. 조건도 까다롭지 않았고..
“그러니까 인쇄되고, 오피스 깔려있는 피씨가 5대있으면 되는거지?”
그래, 지수야. 힘껏 달려갔다오렴 ...4층까지.
“...”
그리고 20분후,
“뭔 피씨방들이 이래!”
12번째 피씨방에서 일명 ‘빠꾸’를 먹은 나는 서연누나 앞이라는 것도 잠시 잊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닌게 아니라, 오피스 깔려있는 피씨방이 이렇게 없다는 것에 경악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대학근처 피씨방이 이런것도 준비 안하고 영업을 한다면, 도대체 피씨방이 있는 목적이 뭐란 말인가. 피씨방은 그냥 게임하는 곳이란 말인가, 대한민국 대학생들에게는...
‘그러는 너는.’
다른 곳을 찾아볼까.
*
17번째 피씨방에서 우리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가진 피씨방을 만날 수 있었다. 파워포인트와, 한글과, 마지막으로 5자리가 갖추어진 곳. 인쇄는 안되는 곳이었지만, 일단 임시로 만들어두는 커뮤니티에 올려보는 것으로 합의를 하고 피씨방에 모두 들어갔다. 아아, 난 아직도 그 커뮤니티 주소를 완벽하게 기억한다. ‘A를 향한 인문학 모임.’ 서연누나가 직접 만든 그 커뮤니티는, 그 당시 내가 볼 때에는 ‘이 사람 적어도 작명센스는 없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자리는 다 붙어있었고, 우린 2자리/3자리 식으로 최대한 붙을 수 있게 자리에 앉았다. 2자리에는 경석이와 지수가 앉고, 그 뒤편 3자리에는 나와 서연누나, 그리고 주현누나가 앉았다.
“자, 열심히 해보아요, 우리들.”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카운터에 들러 조원들에게 음료수를 하나씩 돌렸다. 고마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
‘조원들에게 동기부여를 하면서 지시를 용이하게 할 수 있도록 해보자!’
...아무래도 나 ‘조장놀이’에 뭔가 맛들인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별 작업은 90% 내 지시에 따라 이루어졌다. 시작하기 전에 짧게 모여서 차후 있을 업무를 브리핑한 후, 각자의 가능업무를 배려하여 배치하였다. 이를테면, 인터뷰를 같이한 경석이와 지수는 인터뷰 내용 정리 및 인터뷰 당시 선생님이 언급했던 부분들에 대한 기사검색, 그리고 자료 도출이었다. 그리고 주현누나는 언론들이 해당 도서에 대해 다룬 서평에 대한 검색 및 종합. 그리고 서연누나는 파워포인트 작업이다. 그리고 나는 전체적인 아우트라인 작성 및 자료종합 검토, 그리고... 말하자면 총괄업무를 담당했다. 언뜻보면 총괄업무라 하면 정말 바빠보이기 쉽다. 하지만 이런 업무를 담당해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총괄업무는 다른 사람들의 아웃풋이 없으면 널널한 법이다. 따라서, 난 본의아니게 내 옆자리에서 PPT를 가지고 낑낑거리던 서연누나를 도와주게 되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다. ‘본의가 아니다’.
“성원아 이게 왜 이렇게 돼?” “아, 그게 여기서 편집하는 것이 아니라 마스터를 편집하는...” “마스터가 뭔데?” “그러니까 이게 편집화면에서 이렇게 들어가는...”
문득 누나의 마우스를 뺏어잡고 메뉴를 들어가며 설명을 해줘가는 내 자신을 보면서, 난 인력운용에 있어서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디자인학과잖아. 컴퓨터를 못해도 디자인은 잘 하겠지. - 그리고 다행히 그 예감은 맞아떨어졌다. 메뉴디자인 색상선정에 있어서는 나보다 훨씬 나았다. 자, 그럼 이제 지수하고 경석이꺼를 보러...
“성원아. 이거 좀...”
또냐. 하지만 뒤를 돌아보니 날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내면서 앙증맞은 표정을 짓는 3살 연상의 누나가 날 보고 있다. 이래서야 화를 낼수가 없잖아. 이래서야. 항상 저런 표정을 지어준다면, 오히려 더 불러달라고 이야기라도 해주고 싶다, 나참. 다시 누나의 마우스를 잡으면서 입맛을 다신다.
“개체를 넣으실 때는 이걸 클릭하시고 마음에 드시는 모양을 선택하면 돼요.” “아, 그럼 그 막 움직이는 건 뭐야?” “예?”
움직이는 거? ...아아.
“애니메이션 효과 말하는거구나.” “응?”
그런 귀여운 표정 짓지 않아도 설명해줄 거랍니다.
“이걸 이렇게 해서 오른쪽 버튼을 누르고 이걸 누르면 이렇게 돼요.” “아, 이걸 이렇게...?” “네.”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한 표정으로 헤하면서 모니터를 바라만 보고 있는 누나의 얼굴을 보면서 나름 이제 나도 짐작가는 바가 생겼다. 이제 알겠다. 대학교 4학년이 될 때까지 파워포인트 못해도 된다. 날 믿어라.
“네, 그럼 이것의 순서를 정할수 있는데...?”
그리고 다시금 누나의 마우스를 잡으려고 하는데 - 어쩌면 그것은, 자그마한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의자에서 상체를 지나치게 멀리 뺀 채로 장시간 자세를 유지하던 몸이 순간 균형을 잃으면서 기우뚱거린다. 어라, 왜이러냐 이거 - 하는 자문의 시간도 주어지지 않는다. 갑자기 등쪽이 폭신해지는 느낌이 듬과 동시에 뭔가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어온다. 아직 이해가 안가는 사람들을 위해 한마디로 정리해주겠다. 내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가면서 이 누나의 품에 살짝 안기는 듯한 포즈가 되어버렸다.
“어?”
갑작스런 상황. 물론 이때까지 놀란 것은 내가 아니라 누나다. 그렇다. 놀란 것은 누나다. 그것도 아주 살짝 놀랐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순간 누나의 숨결이 내 뺨에 스쳤다고 생각이 되었을때, 그러니까 그 자세가 1초정도 지났을때. 난 이 상황에 대한 자각을 비로소 하게 되었다. 이런 빌어먹을 반응속도!!
“으아악?!”
지나치게 넘어간 방향의 반대로 힘을 주려다가 그대로 키보드에 얼굴을 박아버렸다. 그래, 놀란 것은 누나지만, 간떨어지게 경악한 것은 이 몸이다.
“괜찮아?”
키보드, 아프구나.
“아...예.”
애써 정신을 차리는 와중에도 대답하는 것은 잊지 않는다. 쪽팔리잖아, 이래서는. 그것보다 나 등에서 뭔가 다른 감촉을 느낀 것 같기도 한데...?
‘변태냐!!!’
애써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그 생각을 잊어보려고 한다. 그런데 그러고보니 이 누나 생각보다 좋은 향수를 쓰는구...
‘젠장 주체할 수가 없어지잖아 자꾸!’
이러한 사고패턴은 점점 의식의 흐름 기법을 충실히 수행하며 내가 머리를 감은지 몇시간 되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점점 대뇌피질에 스트레스를 주고있었다. 지금이 위기상황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겨우 몸을 일으켜 내 자리로 돌아앉았지만, 머리는 여전히 복잡하다.
“성원아... 괜찮아?”
그러니까 그런 애기같은 목소리로 안부를 챙기지 말란말이다. 나 진정좀 하자...
“잠시 쉴게요.”
하면서 내 컴퓨터 키보드 위로 고꾸라졌다. 이럴 땐 아무 생각 하지말고 그냥 눈을 감는게 최고다.
*
시간은 어느새 밤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누군가(그러니까 이 지성원님)의 눈부신 지휘로 작업은 생각만큼 진행되고 있었지만, 이대로 밤을 샌다고 생각하니 뭔가 눈 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다. 아아. 10분이라도 좋아. 밖에 잠깐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옆자리 구경이나 좀 해보자. 뭘하고 있길래 이 사람은 이렇게 열중해있는걸까.
“누나.” “응?”
문득 옆자리를 향해 말하면서 모니터를 힐끔 보니, 이 사람 싸이월드를 하고 있었다.
“아, 아! 그게 내가 지금 잠시 머리 좀 식히려고 그게 응? 그래 뭐 있잖아 그거!”
이 사람 당황하면 마구 손을 휘젓는구나. 덕분에 시야는 마음껏 방해받고 있다만. 다만 그 ‘그거’가 뭔지에 대해 좀 설명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안해애...”
그렇다고 풀이 죽을 것 까지야. 업무중 싸이월드가 이정도로 사과를 구해야하는 일이라면, 컴퓨터 수업시간에 스타하다가 걸린 나는 사형이라도 구형받아야할 분위기이다. 하지만 이렇게 당황해하는 서연누나도, 너무 귀엽다. 뭐랄까, 3살 연상 누나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아니 누가 뭐래요?”
그래서 괜히 딴죽을 한번 걸어본다.
“...”
이 사람 말이 없어진다. 이쯤에서 화제를 돌리는 것이 나을려나.
“그런데 누나도 싸이하시네요?” “응? 응.”
내 말을 들은 이 누님은 내가 화제를 돌리는 것이 그렇게도 고마웠는지, 갑자기 헤헤 웃어보이더니 자기 홈페이지를 열어서 나한테 보여준다. 스피커에서 음악 하나가 흘러나온다. 남자 두 명의 간드러지는 목소리.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소를 차분히 몰아주는 남자그룹의 대표곡이다.
“나 홈페이지도 있다~~”
그래, 홈페이지가 있구나. 좋은 정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연누나.
“저도 싸이하는데, 일촌맺으실래요?” “응?”
내 말을 듣더니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고개를 내 쪽으로 돌린다. 그리고 어느샌가 다시 서연누나의 모니터를 보면서 슬쩍 자리 옆으로 끼어들게 된 내 눈이 누나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
다들 알겠지만, 미국에서는 눈이 마주쳤을 때 피하는 사람들을 의심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자신감이 없다고 할까, 아니면 뭔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면 둘중 한명은 눈을 피하기 십상이다. 일단 어색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은 내가 눈길을 즉시 거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 일촌맺자구?” “네. 어떻게 하시는줄은 아시죠?” “너 나 무시하는거야?”
하면서 샐쭉 토라진듯한 목소리에, 그 표정 좀 구경해보려고 다시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려고 하는 나의 눈이 다시금 누나의 두 눈과 정면으로 마주친다. 이 사람, 계속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 적어도 나하고 같이 말을 할 때는. 그렇다면 앞으로 난 이 사람하고 대화할때는 그냥 땅만 보고 얘기해야 하는건가. 하지만 어느새 싸이월드를 끄고 다시 애니메이션 효과를 가지고 낑낑거리는 누나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러한 느낌도 그저 눈녹듯이 사라져버린다. 처음에는 이쁘다는 생각은 안들었는데, 이제는 얼굴도 그저 예뻐보이는구나. 멍하니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정신을 겨우 차리고, 다시금 내 컴퓨터 모니터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