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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의 서울 무력진압 시도 (제2의 5.18?)
게시물ID : history_2045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동물개
추천 : 2
조회수 : 196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5/04/23 22:5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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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mirror.enha.kr/wiki/6%EC%9B%94%20%ED%95%AD%EC%9F%81

그 시작은 1987년 초에 일어난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이었다. 당시 운동권 선배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을 연행한 경찰들이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경찰은 물고문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그래서 생겨난 희대의 망언이 "탁!" 하고 치니까 "억" 하고 죽더라이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면서 책상을 내려쳤는데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헤드라인으로 뽑아낸 문구가 바로 저 명언이다. 저 제목을 사용한 신문이 바로 동아일보.

그런데 박종철군 사망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박종철군의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로의 개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묵살하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국민들의 민심을 격앙시켰다.

...
대통령 취임 때부터 7년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약속해온 전두환은 퇴임 이후에도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각제 개헌을 구상하고 있었다. 국회의원 공천권을 가진 집권당 총재로 후계자 노태우를 허수아비 국무총리로 세워서 좌지우지 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큰 틀에서는 개헌을 위한 위원회가 여야의 만장일치에 의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런데 정부가 호헌 조치로 이 논의 자체를 뒤집어 버리자 직선제 개헌으로의 변화를 고대하던 국민들의 반발을 한 번에 받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의 김승훈 신부가 5.18 민주화 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다섯 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약칭 국본)" 이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월 10일 민정당(민주정의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군의 고문치사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그러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되었고 집회가 무산되자 서울시내 곳곳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되었다. 이미 5월 이전부터 진행중이었던 시위를 특별히 6.10 항쟁, 6월 항쟁이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명동성당에는 당시 故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는데 김수환 추기경은 자신의 입지를 활용해 시위대를 잡으려는 경찰을 막아주었다.

추기경이 거부하는 상황에서 성당에, 그것도 주교좌 성당인 명동성당에 함부로 경찰을 투입해서 사람을 잡아간다는 것은 세계 가톨릭계 전체에 도전하는 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무소불위의 국가 권력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손을 뻗을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전두환이 벌인 최대의 쇼인 1988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자칫 유럽이나 남미의 가톨릭 국가들이 올림픽을 보이콧을 할 가능성도 높았다. 실제로 교황청은 명동 성당 내로 공권력이 투입되거나 시위 진압에 군이 동원될 경우 서울올림픽에 대한 전면적 보이콧을 검토했었다고 한다. 

(이와 반대로 1995년 6월 6일, 김영삼 정권은 명동성당 관내에서 농성중이던 한국통신- 現 KT - 노조 간부들을 연행하는 삽질을 저질렀고 이는 제1회 지방선거를 앞둔 김영삼 정권에게 고스란히 크나큰 치명타가 되었다.)
(국민들은 명동성당 안의 시위대에게 호응하면서 헌금의 형식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보내주는 등 지지를 표시했다. 이 당시의 소소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명동성당 농성 당시 조영래박원순 등 인권변호사들이 시위대와 합류하기 위해 명동성당에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처음엔 경찰들이 딱히 제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변호사들은 양복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경찰 측에서는 이들이 시위대가 아니라 정부의 높으신 분들 정도로 오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곧 일행의 정체를 파악하고 경찰들이 접근을 저지해서 변호사들의 시도는 불발로 끝났다. 당시의 변호사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도 나오는 이야기.)

한편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을 직격으로 맞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한열은 결국 6.29 선언이 발표된 지 6일 뒤인 7월 5일 요절했다. 게다가 이게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이한열군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6월 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로 다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고 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前 치안본부장은
 ...
 "좀 심각하지만 경찰력으로 책임지고 막겠다" 면서 전두환을 설득한 덕에 큰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론 6월 19일 군부대 투입을 통한 무력진압을 실시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수도권 외곽에 주둔중이던 충정부대들을 서울 외곽지역에 집결시켰다. 여기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즉 명령만 내려지면 바로 투입할수 있게 한 것. 그리고 정부는 청와대출입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할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진압으로 소요사태를 종결할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보고를 하였다.

무력진압에 대한 정보는 당연히 시위 지도부에게도 전달 되었으며 시위지도부는 유혈사태에 대비하여 비상연락망을 가동하고 길거리에서 시위하는 시민들 틈에 섞여서 연행당하는것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대비를 하였다.

한편 주한미군 정보부대에서는 19일 오전에 한국군이 무력진압에 대비하여 병력을 동원하고 있다는 징후를 포착하였다. 청와대에서 19일에 주한미군에게도 무력진압을 위한 군부대 이동을 통보하라고 지시는 내려갔지만 한미연합사령부에 통보되지 않았다.

CIA 한국 지부에서는 6월 20일 새벽 4시에 강제진압을 할것이라는 구체적인 첩보를 입수하였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이후 강한 반미 감정과 군부대 투입의 악영향을 경험한 미국은 한국군의 무력진압을 저지하기 위하여 CIA가 주한미군의 협조를 받아 전차5대를 차출하여 수도방위사령부와 육군 특수전사령부등 한미연합사령부의 통제하에 있지 않고 한국이 단독으로 움직일수 있는 부대들의 정문에 전차를 보내 무력시위를 함으로써 한국군에게 압력을 넣었다. 이 행동은 효과를 발휘하여 진압부대의 출동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 진압군으로 참가했던 일부 예비역 장병들의 증언에 나오는 주한미군 전차와 한국군 진압부대가 부대 정문에서 대치하였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한편 6월 20일 오후에 주한미국대사가 전두환과 면담일정이 있다는걸 알고 전두환과 만나러 가기전에 접촉하여 한국군의 무력진압 계획을 알려주고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다시 한번 무력진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함으로써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이 다시 벌어질뻔한 위기를 막는데 성공하였다. 미국상원에서 한국 민주화 결의안을 통과시키며 민주화에 힘을 보탰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더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판단한 전두환 정권은 6월 29일, 노태우 후보의 직선제 수용 선언(6.29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6월 항쟁의 마지막은 서울에서 이한열의 장례식으로 치뤄졌는데 무려 100만명(울산시 인구)의 서울 시민들이 장례식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시위로 번지게 된데에는 대학을 졸업한 도시 봉급자(화이트 칼라)를 중심으로 한 신흥 중산층들의 참여. 이른바 넥타이 부대가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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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18때의 경험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경험한 미국은 6.10항쟁때는 적극 개입했다
2. 미국의 적극적 개입이나 세계의 눈치가 없었더라면 강제 진압 후 장기집권이 이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3. 시위의 시작은 청년들이지만 대규모 시위로 번지는 바탕에는 중산층의 참여가 필요했다
(지금의 중산층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개선이나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4. 제2의 5.18이 일어나서 부산과 서울이 군부대에 의해 강제 진압당했다면 지금의 전두환이나 (새누리당) 관련자들의 처우는 어찌되었을까 ㅎ





권복경 前치안본부장 “전두환, 6월항쟁 부산에 軍투입 명령”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sid2=257&oid=020&aid=0002440489

김영삼 정부 때 명동 성당에 공권력 투입

http://www.news-y.co.kr/MYH20131225003600038/
정부는 국무총리 사과 성명을 발표하는 등 수습에 나섰지만, 사제와 신도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사제들은 단식농성에 돌입하고, 전국 성당에서 시국기도회와 촛불시위가 열렸습니다.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교과서 표현, 지우라는 정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13329.html
독재비판 서술 등 포함…저자들 “절대 못고친다” 거부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1061122551
민정당은 민주자유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을 거쳐 오늘의 새누리당이 됐다. 현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뿌리는 전두환의 ‘민정당’이다.

새누리당 '전두환 추징법' 사실상 반대, 논란 예고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07902



전두환 사위에서 롯데가문 사위로 마침내 새누리당 실세 등극
'잘 나가는'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
http://special.mediatoday.co.kr/network/?p=17



[아이엠피터] 5월 광주의 배후 미국과 전두환의 굴욕
http://impeter.tistory.com/1854
미국이 병력이동을 알고, 승인했다는 정황은 미국의 외교전문 곳곳에서 나옵니다.
... 미국은 전두환의 비상계획을 10일전에 알고 있었고, 군대 투입에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수부대뿐만 아니라 해병대까지 동원할 경우 승인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곳이 미국이었습니다.
... 결국 미국이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 진압날짜를 늦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항공모함이 한국에 들어오는 날짜를 맞추기 위해 진압날짜를 연기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몰랐던 광주의 시민들은 미국이 설마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과 신군부를 옹호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이유로 광주 시민들은 미국을 통한 중재 노력을 시도했습니다.




(내각제 관련) [딴지일보] 파토의 쿡찍어 푸욱 1.공포의 마스터플랜
http://www.ddanzi.com/ddanziNews/1740840
...특히 지금 저들은 가카 때 부터 최근의 부정선거에 이르기까지, 그간 지은 수많은 죄들 때문에라도 절대 정권을 내 줘선 안되는 입장에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넘을 내세워도, 웬만큼의 부정을 계산에 넣어도 대선 승리의 확신이 없다면 과연 무슨 방법을 쓰려 들까.
…내각제 개헌.
내각제 하에서 동서 지역 통합을 이룬 초거대 여당이 가지는 절대적 안정성. 이 틀 안에서 그들은 항상 이기고, 총리는 언제나 그 속에서만 배출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 그들 의원과 총리의 자식들이 다시 의원과 총리가 된다. 바로 일본 자민당 스타일의 영구집권 구조다. 한 때 대권을 논하던 문재인과 안철수는 이제 변방에서 잔소리나 해대는 군소 세력으로 전락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더 이상 노무현 같은 돌발 변수가 나올 가능성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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