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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들이 싫어하는 경주최부자 이야기
게시물ID : sisa_2050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썩은낙지
추천 : 10
조회수 : 719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2/05/27 00:33:49
이 글이 뒷북이 아니라면 오유에 실망할 것입니다.
얼마전 이회영님 글이 베오베에 올랐기에 뒷북일 줄 알면서 글 올립니다.

http://www.usimin.co.kr/simin2010/bbs/board_view.php?num=31848

http://www.usimin.co.kr/simin2010/bbs/board_view.php?keycode=tagText&keyword=%B4%EB%B1%B8&num=31882&page=1

제가 드리고 싶은 주 이야기는 2번째 링크 글 내용입니다.
유시민 게시판에서 퍼 온 이유는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들이 간단히 정리되었기 때문이니 오해마시길 바랍니다.
혹시,공정성 의심하는 분들은 아무 포털에서나 경주 최부자 이야기를 찾으면 쉽게 검색 가능하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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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합방과 경주 최부자의 활동
1910년 국가의 주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일은 11대 경주 최부자인 최현식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에 최현식은 가문의 모든 일을 20년 중반인 아들 최준에게 넘기고 은둔의 길을 선택한다. 약관을 좀 넘은 최준은 중대한 결단을 하게 된다.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조국 광복을 위해 헌납을 할 각오를 하게 된다. 

조선국권회복단 경주군 대표로 활동하던 최준은 그 조직의 가장 큰 후원자였다. 또한 그는 조선국권회복단 활동으로 첫번째 영어의 몸이 된다.

하지만 일제시대 최준의 활동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백산 안희재와 함께 한 "백산상회"활동이었다. 잘 알려진바와 같이 백산상회는 상해임시정부의 중요한 자금줄 역할을 한 위장 무역회사였다. 흔히 백산상회는 백산 안희재가 주도가 되어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백산상회에서 가장 중요한 자금원이 경주 최부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측면이 있다. 

백산상회는 막대한 임시정부군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매년 막대한 결손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결손의 대부분을 매워준 것이 바로 12대 경주 최부자인 최준의 몫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지만, 광복이 되는 날까지 그는 백산상회를 통한 임시정부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왜 이러한 일이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까? 그건 바로 "부자가 나라를 위해 재산을 사용한 것이 무슨 큰 일인가?"라고 말하며 자신의 활동이 세간에 알려지기 꺼려했던 최부자의 철학때문이었다. 그는 한참이 지난 1990년대에 와서야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게 된다.

광복 이 후 최부자의 활동
해방 이 후 최준은 그간 자신이 이루어 놓은 재산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다. 그의 고민의 중심은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이 이룩한 부를 영원히 지속하게 하는 일일까?" 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라는 두가지 물음이었다. 

결국 그는 광복 이 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인재를 육성하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으며,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전재산과 주위 분들의 도움을 얻어 1947년 대구에 대학을 하나 설립한다. 그것이 바로 "대구대학교"이다. 물론 현재의 대구대학교와는 다른 학교이다. 

하지만 대구대학교의 시련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된다. 5.16 쿠테타로 집권한 군부정권은 1961년 대학설치령을 강화하게 되고, 이러한 조치의 여파로 대구대학교는 재정적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여기서 또 한번 최준은 또다른 결단을 내리게 된다. 

교육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희사하여 설립한 대구대학의 지분을 아무런 댓가없이 대구 최고의 부자인 이병철씨에게 양도하게 된다. 왜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희사한 대구대학의 지분을 아무런 댓가없이 넘겼을까? 여기서 그의 정신을 잘 알 수 있다. 자신이 전재산을 희사하여 설립한 대구대학의 지분을 댓가로 넘긴다는 것은 자신이 대학을 설립한 철학 - 미래를 위해 후손을 기르는 것이 만석꾼의 재산을 영원히 보존하는 길이다 - 을 저버린다, 즉 자신의 철학을 돈과 거래한다는 불명예를 받지 않겠다는 선비정신의 발현이었다.

최부자 가문의 현재
지금 최부자가문의 현실은 어떠할까? 지금도 만석꾼의 재산을 유지하면서 지내고 있을까? 아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최준은 대학설립에 자신의 전 재산을 희사하였다. 여기에는 조상대대로 사용하던 선산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은 선산을 희사받은 대학에서 그 땅을 처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함에 따라 최준을 포함한 경주 최부자 가문의 조상묘를 전부 이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고 한다. 즉 경주 최부자는 자신들이 죽어 묻힐 땅 한평도 남기지 않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국가와 지역사회에 희사한 대표적인 한국적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자신이 살 집 - 부부만이 살기에는 너무나 과분한 집 - 은 챙기는 특정한 국가지도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물론 아직까지 헌납하지도 않았고, 헌납을 할지 불분명하지만.) 

최부자 가문에 대한 약평
재산 증식과정에서, 재산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또한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경주 최부자 가문이 일관되게 유지한 원칙이 바로 "국가와 지역사회가 없는 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부자는 국가와 지역사회의 발전을 위해 부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라는 신념이었다. 부당한 부의 축척을 경계하고, 합리적인 부의 재분배와 처분을 강조한 경주 최부자의 이러한 신념은 바로 조선시대를 관통하는 진정한 선비정신과 함께하고 있다. 

여담 - 대구대학교의 뒷담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5.16 쿠데타 이 후 최준은 대구대학의 모든 지분을 아무런 조건과 댓가없이 이병철에게 넘겨준다. 이는 이병철의 재산이 대구대학의 발전을 위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최준과 같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 애시당초 이병철은 대학운영에 대한 의지가 부족했다.

결국 그는 1964년 벌어진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대구대학을 최고권력자인 박정희 일가에게 헌납을 한다. 그리고 박정희 일가는 헌납받은 대구대학교와 재정적인 내부 문제로 폐교를 선언한 청구대학교를 병합하여 영남대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결국 독립유공자가 세운 학교가 일제장교 출신에게 넘어가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광복 이 후에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와 같이 기가막힌 사건을 직면한 최준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한다. 그는 "나라가 발전하면 더이상 이러한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간단한 말을 남긴채 이 일에 대해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설립된 영남대학교의 정관 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지금도 이 정관이 유지되고 있는지는 확인 못해봤음을 양지 바랍니다.) 

학교법인 영남학원 정관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교주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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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을 하면 3대가 망하고 매국을 하면 3대가 흥한다면 누가 애국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개인적으로 인지상정(人之常情),사필귀정(事必歸定)이란 말을 참 좋아하는데...
인지상정인 세상만 되더라도 꽤나 평화로운 세상이 올 겁니다.
양심있고 올바른 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영남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이 순리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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