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하루종일 그분과 함께 보내면서, 사실 정작 할 일은 2시간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사실 기회를 포착한 내가 일을 할리가 없었다. 1시간 정도 하다가 옆에서 열심히 일하는 누나한테 애절한 눈빛을 보내서 밖에 놀러갔다 오다가, 다시 앉아서 1시간정도 하다가 다시금 누나의 옷깃을 살짝 당기면서 조른다. 내 이 어찌보면 7살짜리 어리광과 맥락이 통하는 짓들을 모두 웃어주며 받아주는 누나는, 어찌보면 정말 신이 만들다가 어쩌다가 실수로 단점이라는 요소를 넣는 것을 잊어버린 사람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덕분에 난 이 날을 계기로 신촌거리 뒤에는 무슨무슨 가게들이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이 사람은 걷는 걸 좋아하는 것도 나와 통하는 것 같다.
“우리 지금 데이트하는 거 같다~”
하면서 살짝 부끄럽다는 듯이 웃어보이는 누나의 말에 빨대를 꼽고 먹던 스무디를 반쯤 길가에 뿜어버린 것 외에는 실수한 것도 없다. 정말, 데이트라는 것이 있다면 지금 이 때보다 즐거울 수가 있을까. 아니, 즐겁다는 표현은 너무 부족하다. 이 때보다 행복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대답을 그 후로 2년에 걸친 기간동안 처절하게 깨닫게 된다. 절대 그럴 수 없다 - 는 것을.
*
발표 준비는 발표 2일전인 수요일에 모두 모여서 종합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다행히도 내가 못챙겼던 3명 역시 기대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면서 파워포인트를 작성해와줬다. 그래서 내심 고마운 기분도 들었고. 옆에서 경석이가 툭툭 건드리면서,
[사실 그쪽 완성 못할거라 생각했다마.]
고 넌지시 건네는 말을 들으며, 어떻게 보면 정작 걱정해야하는 쪽은 우리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튼, 고맙다 다들. 여러모로. 그리고 발표일이 되었다. 도우미-즉 ppt 담당은 주현누나, 그리고 발표인은 나머지 네명이다. 순서는 지수-경석이-나-서연누나 순이다. 발표를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미리 리허설을 마쳤고, 준비는 완벽했다. 그리고 그렇게 발표수업이 시작됐다.
우리 앞에 발표한 5,6,7조. 다들 뭐 괜찮게 발표했다. 역시 두 번째주에 발표한 사람들이 첫 번째주보다 앞선 퀄리티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강사가 처음에 말한 ‘앞선 사람이 페널티를 가지고 있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래, 이런 면에서는 인정해주마. 우리 조는 도우미를 맡은 주현누나를 제외한 네 명 모두 정장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것은 수업의 규칙이다. 발표하는 사람은 무조건 정장을 착용할 것. 다행히도 이 수업 3일전 기적적으로 내 정장을 맞추게 되는 기적적인 타이밍이 나오면서 나는 무리없이 정장을 입고 수업에 참석할 수 있었다.
“와 성원아 멋있다~”
...라는 반응을 기대하며 서연누나를 봤겄만, 누나는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만을 하고는 다른 발표자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하긴, 나뿐만이 아니라 4명 모두가 정장이니. 지수가 약간은 뻘쭘해진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하더니 갑자기 입을 연다.
“우와, 성원이 정장이 먹어주는구나! 멋있는데~”
음~ 그래. 하긴 내가 좀 정장을 입으면 먹어주는 스타일이긴 하지...잠깐. 지금 뭔가 작위적인 냄새가 나는데.
“아, 그러네~ 성원아 멋있다~”
뒤늦게 날 다시 본 서연누나가 날 보더니 한마디 해주신다. 서비스로 다시 봤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리고 이 말을 들은 나는 (물론 빈말이었겠지만) 다시금 하늘로 날아올라 갈 것만 같다. 고등학교 친구가 진짜 친구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여. 여기 고등학교 친구보다 훨씬 의리있는 대학교 친구가 여기있다. 증거로 삼아주마, 지수야.
*
7조의 발표가 끝나고, 그 다음은 바로 우리다. 준비시간은 3분밖에 주어지지 않았지만, 모두들 침착하고 신속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지수가 발표 시작전 인사를 하기까지의 준비시간을 1분 40초만에 끝내버렸다. 그리고, 발표 시작. 내 애초의 기대만큼 지수는 특유의 재치있는 입담으로 청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이렇게 배치한 것의 의도이기도 하고. 사실 지수가 우리 셋중에서 가장 잘생기기도 했다. 얼굴을 가장 먼저 보내는 것이 예의라고나 할까. 그리고 두 번째는 경석이. 경석이 역시 생각만큼 잘해주고 있다. 재치에 있어서는 지수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사실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돋보이던 둘이니까. 그리고 이것이 내가 둘과 같이 조활동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고. 경석이 차례까지 끝났다. 그리고 이제, 메인 이벤트다. 인터뷰 동영상과 분석 - 이번 발표의 메인테마. 경석이도 만족스러운 듯 나한테 마이크를 건네며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힘내.]
그래, 고맙구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 같다, 너희하고는.
“안녕하십니까 세 번째 발표주자인 조장, 지성원이라고 합니다.”
하면서 허리를 60도정도 숙이고 올라온다. 전의 발표들이 마음에 든지 반응은 이미 여느 7개조보다 훨씬 좋은 편이다. 문득 강사 얼굴을 보니, 그 역시 지금까지 뭔가 흡족하다는 느낌이다.
“지금까지 이 주인공은 두 번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리고 그 위기마다, 주인공은 특정한 소재에 자기 자신을 담으면서 주제의식을 전달하려 하였습니다.”
자신있다. 독서는 15년간 나의 특기였고, 서평을 남기는 것은 6년간 나의 취미였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과만을 위해 공부해왔고, 우리 학교 접수일정이 시작된 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인문대학에 원서를 넣었다. 경쟁률 같은 것은 알바 아니었다. 여기 떨어지면 어딜 붙든 재수다. 생각할 필요없이 결정했던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 들어와서 정말 대단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아직 1달밖에 안되었지만, 벌써부터 주눅이 들 정도로.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인문학과, 오길 정말 잘했다 - 날 바라보는 수백개의 시선을 마주하며, 그런 생각이 든다. 문득, 그 중에서 특별한 시선을 느껴본다. 물론 그 시선이 무엇인지는, 난 알고 있다. 그리고 살짝 그 사람을 돌아본다. 내 다음 발표자인, 그 사람을.
“...”
그냥 웃으며 날 보고 있다. 그리고 나도 보며 생긋 웃어보인다. 아직 웃는 모습은 자신없지만, 그래도 난 언제부턴가 저 사람을 보면 그냥 웃는 거밖에 생각 안난다. 힘내자!
“...그리고 그런 주인공에게 세 번째 위기가 찾아옵니다...”
*
예상대로였다. 줄거리 설명 및 서평까지만해도 감탄하면서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 강사님. 그 다음 차례로 인터뷰가 뜨자 나에게 물어본다.
“아, 학생. 내가 저 책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데, 누구하고 컨택했습니까?”
대답할 필요없다. 보면 알겠지 - 내 대답할 타이밍에 인터뷰 동영상이 재생되고, 화면에 선생님의 얼굴이 상영되자 강사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학생들 중에서도 몇몇이 알아봤는지 감탄을 내뱉는다. 인터뷰 동영상이 끝나고, 난 분석차트를 꺼내면서 그 다음 부분을 발표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나의 말을 강사가 손을 들고 가로막았다.
“학생. 궁금한게 있는데.” “예.”
말씀하시죠. 아니, 어느정도는 예상하고 있습니다만.
“저 분하고 어떻게 컨택했습니까? 저 분은 반년전에 예약해야 30분정도 시간을 내줄 수 있는 분이라고 들어서 저도 두어번 접촉했다 실패했는데...”
알아. 하지만 난 그런 기색을 전혀 내보이지 않은 채, 알 수없다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입을 연다.
“우리 아빠 친군데요.”
그리고 상황종료. 웃음바다가 된 강의실에 고고히 서있는 강사여. 사진이라도 찍어두고 싶다. 여태까지 학생을 우롱하며 학생 위에 군림하려던 것들에 대한 작은 복수라고 생각해두면 되겠도다. 그건 그렇고 정말 후련하다! 아버지, 감사해요. 동창 정말 좋은 분 두셨군요. - 집에 가서 어깨라도 주물러드려야겠다.
*
발표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끝났다. 강사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여태까지 한 발표중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내리며 수업을 정리해줬다. 이 강사, 어떤 면에서는 쿨하구나. 다시봐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했어요 모두~” “아아 정말 수고하셨어요!”
그리고 그런 최고의 찬사를 들은 우리 조는 희희낙락하게 서로 하이파이브를 칠 수 있었다. 뭐, 조별 발표가 끝난 조들은 바로 그 2주 후까지 해당 주제에 대한 레포트를 써서 내야하지만, 일단은 좋은 결과가 나왔으니 잠시 기쁨을 만끽해도 괜찮겠지. 그건 그렇고 정말 후련하구나 - 이대로라면 누나들한테 저녁이나 한번 쏘자고 해도 될 타이밍이다.
“그렇다면 누나들!” “에?”
하지만, 내 말을 듣고 기뻐하는 표정 그대로 내 쪽을 돌아보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며 - 난 이 수업이 끝나고 또 다른 조모임이 있음을 생각해내버렸다. 생각같아서야 펑크를 내고 싶지만, 내가 계속 미뤄서 여기까지 온 스케쥴이기 때문에 여기서 또 한번 미뤘다가는 언제 뒤통수를 가격당할지 모른다. 아, 정말 이건 기회인데 말이지...
“아, 아니에요.” “뭐야, 싱겁게~”
하면서 누나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시작한다. 뭔가 자기 학과에 일이라도 생긴 듯 하다. - 그럼 일단 난 자리를 떠도 되겠지. 자리를 탁탁 털고 일어나서 책가방을 정리한다. 그리고 경석이와 지수가 나갈 때 따라나간다.
“아, 성원이 서연누나하고 뭐 가는거 아니었나?”
뭔소리냐 경석아. 난 사랑보다 우정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고.
*
그 다음 레포트 작성기간에 이르러서는, 난 점점 대담해지기로 했다. 난 애초에 각자 레포트 작성파트를 지정을 해준 다음 각자 맡은 부분을 처리하여 한 번에 모여 작성하도록 하였다. 오해하지 마시라. 난 민주적인 조장이다.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한 조치이기 때문에 날 희생해서 취한 조치란 말이다. 그럼, 당연하지.
천진스럽게 날 바라보는 누나의 눈길. 하지만 그 눈빛의 진짜 의도 정도는 저도 알 수 있답니다.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건 아닐텐데말이죠. 이쯤되면 나도, 한단계 전진해볼까 - 굳게 다짐을 한번 하고 숨을 들이쉰다.
“왜 물어보는 거겠어요?”
하지만 말을 내뱉는 순간, 어찌보면 이건 약간 정도를 넘은 발언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그 말을 한 것을 후회했다. 아.. 아직 이정도의 친밀도는 아닐려나하는 후회감도 밀려왔다. 괜히 무안해지는 건 아닐까? 무안해지면 어떻게 말해야할까? 그냥 장난이라 무마하고 취소해야하나? 하지만,
“왜애? 난 모르겠는데에?”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듯이, 하지만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보는 누나를 보며 난 피식 웃음이 난다. 이제 알겠다. 이 사람은 나보다 훨씬 위에 있다. 난 뭘하든지 누나 손바닥 위에서 그냥 놀고 있는 거다.
“아, 그게.”
그리고 결국 페이스를 잃어버리는 사람은 나다. 이럴 때 보면 3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쉽게 메꿔지는 게 아니란말이지. 하지만.
“언제 볼까?”
전혀 밉지가 않다 - 그리고 또다시 그 사람을 보며 헤벌레 입을 벌리고 있는 내 바지주머니에 한 번의 진동이 온다. 문자가 왔다는 것이다. 열어서 확인해보니, 저번 주에 미팅한 여자아이 중 한 명이다. 지금 뭐하냐고... 글쎄.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하고 행복하게 담소중이랍니다만. 하지만 그렇게 답장을 보낸다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게 분명하다 - 핸드폰을 열고, 다시 닫는다. 뭐 생각해주는 건 고맙다만, 난 여기에 집중할란다.
“언제가 좋으세요?”
여기에서 ‘혹시 모르니까 보험을 드는게 좋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하지만 보험을 들기에는 이미 난 돌이킬 수 없는 사고과정에 빠져버린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