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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금없음]망각
게시물ID : panic_205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행복한하루♪
추천 : 4
조회수 : 232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1/10/17 20:50:09
오랫만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같아지고 싶어도 같아질 수 없다면, 차라리 사라져버려.』









망각 -1-









어스름한 달빛이 테라스를 조용히 비추고 있던 늦은 밤. 처절한 비명소리와 함께 창문을 

덮고 있던 커튼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그 사이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 그는 몹시 겁에 질린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은 비단 귀신을 보았다던가, 괴물을 보았다던가

하는 종류의 공포가 아니었다. 미래에 다가올 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형태를 알 수 없기에

더욱 두려운 무언가를 걱정하는 듯 했다. 그는 이내 창가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필시 물을 

마시러 거실로 향했으리라. 잠시 뒤 테라스로 보이던 커튼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남자의 주위를, 아니 그의 집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모종의 두려움은 자취를 감추었다.




#




“저기......혹시 이 번호가 유명하다는 심령 연구가 김 용규씨 핸드폰 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저 좀.. 도와주십시오...한시가 급합니다...”

“무슨 일인지 일단 설명을..”

“기억이 사라집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제 주위 사람들의 기억이 사라지고 있어요.”

“네..?”

“자세한 이야기는...만나서 하면 안될까요..?”

“물론이죠. 주소가 어떻게...?”

“여기 주소가...”

전화를 끊은 용규는 이내 자신의 사무실에 있던 짐을 부랴부랴 챙긴 후에 사무실을 나섰다.

약속한 시간이 되기엔 아직 여유가 있었지만, 자신의 직감으로 볼 때 자신의 의뢰인이 굉장히

급하다는 사실을 눈치 챘기 때문이었다. 물론 ‘기억이 사라진다’라는 사실 자체가 용규에게

큰 매력으로 작용했을지도 몰랐다. 용규는 사무실을 나와서 택시를 잡고 의뢰인의 집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용규가 의뢰인의 집에 도착한 시간은 약속시간보다 10분정도 빠른 시간이었다. 그는 일단

의뢰인의 집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살펴 보았다. ‘기억을 잃게 만든다.’따위의 악질적인 행위가

일반적으로 그 집에 살고있는 지박령이나 원한령의 짓일 확률이 크기도 했으며, 심령이라는

부분이 심리학적으로도 꽤나 연관이 있기에 일단 집의 분위기를 살펴봄으로써 의뢰인의 

대략적인 성격이나 심리을 파악하는 것이 이번 일에 굉장히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

문이었다. 의뢰인의 집은 굉장히 넓어 보였다. 집 앞에 위치한 마당에는 대리석으로 길이 

만들어져있었고, 그 옆에는 작은 호수가 위치해 있었다. 호수의 반대편 정원에는 커다란 팻

말로 ‘개조심’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주위에 개는 보이지 않았다. ‘개가 혼자 잘 돌아다니는가

보군.‘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용규는 대리석 길을 따라 현관으로 향했다. 현관 앞에는

신발장으로 보이는 수납공간이 있었고 그 앞에는 의뢰인의 것으로 보이는 신발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었다. 

용규는 신발장이 집의 외부에 설치되어 있다는 것으로 볼 때, 의뢰인이 깔끔한 성격이거나

냉철한 성격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신발이 마음에 걸리는 듯 했다. 

그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은 후에 현관에 배치된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용규는 초인종을 누른 후에 집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왠만하면 현관으로 이동하는 의뢰인의 발소리가 들릴 법도 했지만, 집 안은

마치 초인종 소리에 일부러 움직임을 멈춘 것 처럼 조용했다. 

용규는 ‘역시 좋은 집이라 방음이 철저한건가.’라고 웃어넘기며 의뢰인을 큰소리로 불렀다. 


“계신가요?”


잠시 후, 초췌한 모습의 의뢰인이 문을 조용히 열어주었다. 한 눈에 보기에도 며칠간 잠을

설친 것처럼 눈 밑의 다크서클이 진하게 내려앉았음은 물론이고, 머리가 헝클어진 것으로

봐선 며칠간 머리를 감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깔끔한 성격인 줄 알았는데..?’라고 생각한

용규는 고개를 잠깐 갸웃거렸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어넘기며 의뢰인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심령 연구가 김 용규 라고 합니다.”

“네..박 은찬이라고 합니다..일단 들어오세요..”

박 은찬이라는 의뢰인의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한 상태인 듯 보였다. 그는 힘없이 몸을 움직이며 

거실로 향했고, 그러한 그의 뒤를 따라 용규 역시 거실로 향했다. 용규의 예상대로 

의뢰인은 상당히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였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를 빼면 집안의

물건들은 모두 가지런히 정렬되어있었고, 집 안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다. 용규는 슬쩍

쓰레기통을 들여다 보았다. 쓰레기통엔 액자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무언가가 들어있었지만

그의 관심을 끌진 못했기에 그는 다시 은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멍한 시선으로 소파

에 앉아 있었다. 용규는 그의 옆에 조용히 앉은 후에 물었다.


“이제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셨으면 하는데요..”


용규의 물음에 은찬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보아도 그가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고 있

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뼈저린 한숨이었다. 이내 그는 멍한 시선을 용규에게 향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한 달......전 쯤이었습니다. 어느 날부터 저에게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

처음엔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과거의 기억이 꿈에 나타나는 것은 어느 누구나 경험하는 일

이고 저 역시 예전에도 그런 적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우연히 그 꿈에 나왔던 추억을

공유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던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죠..그는 그때의 기억을 전혀

떠올리지 못했습니다. 당황한 제가 그들에게 몇 번씩 되물으면 그들은 오히려

‘무슨 소리야? 거기에 당신이 왜 있었는데?’라고 말하면서 저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기 일쑤었습니다. 처음 한 두번은 저도 제가 착각을 했다고 웃어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이 몇 번씩 일어나니까 점점 두려워지더군요. 박 은찬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주위에서 점점 지워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은찬은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 뜯기 시작했다. 

그는 굉장히 초조한 듯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인 와중에도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정서불안적인 증세를 보였다. 그러한 은찬을 용규는 그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은찬은 조용히 고개를 들고 용규를 바라보았다.


“그게 얼마나 두려운지 아십니까..? 저의 존재가 사람들 사이에서 지워진다는 그 공포감..

아마 겪어보지 않으시고는 모를겁니다...분명 있었던 일인데도..사람들은 저를 기억하지

못해요...아니, 오히려 저를 미친 놈 취급합니다...“



은찬은 용규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한 

은찬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용규는 눈을 돌렸고, 은찬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더 무서운 건 뭔지 아십니까...? 시간이 말이죠...제 꿈에 나온 기억의 시간 

말입니다....그게 점점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단 말입니다..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처음엔 몇 달 전의 기억..그 후엔 일 년 전......일 년 전....일 년 전.....

그리고 지금은......“



은찬의 눈이 두려움으로 파르르 떨렸다. 은찬은 갑자기 용규의 손을 덥썩 잡더니

울먹이며 그에게 소리쳤다.



“초등학교...초등학교 때의 기억입니다!! 점점 빨라지고 있어요!!! 전 조금씩 잊혀져가고 있단

말입니다!!! 이러다가 제가 태어나던 때의 꿈을 꾸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저라는 사람의 존재 자체가 사라지는 건 아닐까요?? 전 없었던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요??“



은찬의 눈은 떨리다 못해 위아래로 진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한 눈의 진동에 부응이라도 

하듯, 은찬의 몸 역시 사시나무 떨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고, 그의 손은 용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진정하세요, 은찬씨. 저만 믿으세요. 잘 해결될 겁니다.”



용규는 은찬을 진정시키고는 몇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 꿈이 시작된 시기가 한 달 전쯤이라고 하셨죠?”

“네.”

“이 집에는 혼자 살고 계신가요?”

“네.”

“형제 자매는..?”

“...없습니다.”

“부모님은?”

“캐나다에 계세요.”

“흐음...그렇군요..”


용규는 뭔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찬은 불안했는지 집을 나서는 용규의

뒤를 졸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이내 현관 앞까지 도착한 용규는 뒤를 돌아보았고, 은찬은

뻘줌했는지 두걸음정도 뒤로 물러서며 시선을 땅에 꽂고 있었다.


“조만간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네....되도록이면 빨리...”

“물론이죠.”

“잠은..어떻게 해야하죠...?”

“일단은 최대한 안 자려고 노력해보세요. 그래도 안 되면 아예 꿈을 꾸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드시고 푹 주무시구요. 될 수 있는 한 꿈을 꾸는 빈도수를 줄여야할 것 같아요.“

“네...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용규는 가볍게 은찬에게 목례를 해보이고는 현관을 나섰다. 그리고는 현관 앞에 널부러져 있던 자신의 신발

을 고쳐 신은 후 은찬의 집을 나섰다. 


용규가 집을 떠날 때 까지 은찬의 개는 돌아오지 않은 듯 싶었다.












망각 -中-











용규가 다시 은찬의 집을 찾은 것은 일주일이 지난 어느 저녁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은찬은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으나, 용규는 간단히 목례를 한 후에 집 안으로 향했다.

방 안으로 향하던 용규는 자신이 전에 보았던 쓰레기통을 힐끗 쳐다보았다. 쓰레기통은

비워진 듯 보였다. 그는 조용히 소파에 앉아 주변을 훑어 보았다. 모든 것이 정돈 된

느낌이 강하게 들고 있었다. 은찬이 자리에 앉기가 무섭게 용규는 질문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은찬씨의 꿈에 영향을 주는 것은 원한령의 소행일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지독한....그래서 말인데...혹시 주변에 원한을 살 만한 일이라도...?“

“없습니다.”

“이 집에는 혼자 사시는겁니까?”

“네.”

“그렇군요.....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은찬씨는 굉장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왠만하면 정해진 시간에 일을 끝마치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예를 들면..?”

“으음...아침 8시에 꼬박꼬박 일어난다던가..9시부터 10시까지 산보를 한다던가 하는 것들이죠.”

“정해진 시간에 청소를 한다던가 하는?”

“네. 저는 항상 오후2시부터 3시 사이에 청소를 마치고 쓰레기통을 비웁니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혹시.....결벽증이라던가....이런 종류의 증상은..”

“결벽증이라기보단...제가 가지고있는 것들을 줄세워 놓는 걸 좋아합니다.

저기 보세요. 저 위에 액자들. 정말 질서정연하죠?“


은찬의 손짓에 용규는 대형TV 뒤에 걸려있는 액자들을 바라보았다. 벽걸이 액자는 물론

TV위와 선반에 올려져있는 소형 액자들마저도 한 줄로 늘어서있었다.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

보였던 빈 공간은 이미 새로운 액자들로 채워 넣은 듯 보였다.


“흐음...그렇군요..아, 기분나빠하지는 마세요. 원래 이런 심리적인 측면이 심령적인 곳에 영향을

미칠 때가 많아서 그러는 거니까요.“


용규는 은찬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싱긋 웃어보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아, 꿈은 어느 정도 꾸셨습니까?”

“이제는......6살 때의 기억이에요.”

“흐음...혹시 그 기억에 관련된 사람을 제가 좀 만나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찾아보니 유치원 때 같이 놀던 친구더군요. 이미 주소는 찾아서 적어놨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몇 가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을 것 같아서요.”

“중요한건가요?”


은찬의 눈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러한 변화를 용규는 놓치지 않았다.


“아니요. 별건 아닙니다. 뭐 걸리는 거라도..?”

“아뇨..딱히 그런 건 아닙니다.”

“이런...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지체되었네요...수면제를 너무 많이 드시진 마세요.

내성이 생기면 나중에 더 힘들어질 테니까요. 대신 운동이나 따듯한 물로 샤워 같은 걸

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천만의 말씀. 그럼 이만.”


말을 마친 용규는 이내 빠른 걸음으로 은찬의 집을 나섰다. 용규는 나가면서 현관 앞에 

놓여져 있는 은찬의 신발을 살펴보았다. 그의 신발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는 오후. 용규는 분위기있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깥을 주시하

고 있었다.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리는 듯 용규의 시선은 한시도 쉬지 않고 바깥을 서성였다. 

이윽고, 용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등장한 여성이 용규의 옆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무언가 불안한 듯 주위를 계속 두리번거렸는데, 용규는 그녀의 인상착의를 쓰윽 훑어본 후에 

그녀에게 걸어가 말을 건넸다.


“혹시 윤 희정씨 되시나요?”

“네...”

“제가 연락드린 김 용규라고 합니다.”

“아..네...”

“은찬씨 일로 전화 드렸습니다.”

“네...?”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이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한참동안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러다 이내 누군가가 떠올랐는지 활짝 미소지으며 용규에게 말했다.


“아..어렴풋이 기억이 나는 것도 같네요.”

“친한 사이가 아니셨나봐요..?”

“네..친했다기보단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였던 것 같아요. 그것도 한 다리 건너서.”

“네...그러시군요...”


용규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그녀에게 은찬의 일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은찬의 이야기를 

듣던 희정은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며 무언가 생각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기억이 안난다는 듯 고개를 젓기도 했으며, 이제야 알았다는 듯이 특유의 미소를 지어보이며

용규의 말을 경청했다. 


“혹시..이런 일이 기억이 나시나요...? 은찬씨의 말로는 분명 그때 희정씨랑 같이 있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봐도....그 자리에 그 분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오히려...”


희정은 심각한 표정으로 용규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던 

용규의 표정이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용규는 자신이 생각한 것과는 정 반대로 흘러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지 양 미간을 찌푸린 채 머리를 짚었다. 그러한 용규를 보며 희정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말을 건넸다.


“뭔가...잘못되어가고 있는게 맞는거죠...?”

“네..분명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네요, 희정씨 말이 사실이라면...”

“아마 사실일 거에요...은찬이라는 분 나이가 어떻게 된다고 하셨죠?”

“22살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면 이걸 보여드리면 설명이 될 것 같아요.”


희정은 자신의 핸드백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뒤지는 듯 하더니 빨간색 지갑을 꺼내들었다.

용규는 그러한 희정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녀는 이내 지갑에서 조그마한 카드를 

꺼내더니 용규를 향해 웃어보이며 그것을 건넸다. 용규는 그것을 받아들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것은 희정의 신분증이었다.


“확실히...희정씨의 말이 모두 설명 되는군요.”


용규는 입이 마르는 듯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들이키고는 신분증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



『붙잡을 걸 그랬나봐~내가 더 사랑한다 말할걸~』

“여보세요?”

“용규씨...저 박은찬입니다..”

“네. 말씀하세요.”

“도대체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아 제가 조사할 게 좀 있어서 바빴습니다.”

“제 꿈은...이제 4살 때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것 참 유감이군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마 태어날 때의

기억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안전하니까요.“

“그..그 후에는...?”

“제가 찾아갈 겁니다. 걱정마세요. 곧 갈테니.”

“두렵습니다...”

“뭐가요?”

“뭐가라니요..?”

“당신의 존재가 사라지는게 두려운 겁니까? 아니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어쨌든 일단 푹 쉬고 계세요. 조만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말을 마친 용규는 전화를 끊고는 자신의 책상 위에 올려진 몇 개의 서류들을 꼼꼼이 바라보

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은찬의 학적부를 비롯하여, 그의 여러 가지 신상명세서들이 펼쳐져

있었다. 은찬의 서류들 옆에는 자그마한 서류봉투에 담겨진 서류뭉치들이 놓여져 있었다.

용규는 그것을 집어 들고는 유심히 쳐다보더니 그 안의 서류들을 하나 둘 씩 책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그 곳에는 얼핏 보면 은찬과 비슷해 보이는 사진이 몇 장 들어있었다.

“실종 신고서라....”

용규는 서류를 책상에 던져둔 채로 깊게 한숨을 쉬었다. 용규는 고개를 세차게 저은 후에 하늘을 향해

다시한번 한숨을 내뿜었다. 자신의 머릿 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떨쳐내려는 듯이.



#



용규가 은찬을 찾은 것은 은찬의 다급한 전화를 받고 난 이후였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러한 은찬의 모습에 용규는 일을 해결해야 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몇 살인가요 이제?”

“숨을...숨을 쉬었습니다.”

“누가요?”

“아기...”

“......잠들지 말고 기다리세요. 지금 곧 갈테니.”


용규는 자신의 책상에 흩뿌려져있던 서류를 챙기고는 바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덩그라니 남겨진 사무실의 책상에는 정체모를 서류들이 몇가지 더 널부러져 있었고

그 사이로 조그마한 캡슐조각이 보이는 듯 했다.

















망각 -下-











은찬의 집에 도착한 용규는 망설임없이 ‘개조심’이 쓰여 있던 팻말로 향했다. 역시 개는

보이지 않았다. 용규는 팻말을 발로 툭툭 걷어차 보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관

으로 향했다. 그는 현관에 놓여진 은찬의 신발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그의 신발은 가지런했다.

용규는 초인종을 눌렀다. 초인종소리가 밤하늘을 요란하게 수놓고 있었다. 문 안에서는

은찬이 문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리고 있었다. 용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은찬이 그를 맞이했다. 은찬의 눈은 다크 서클로 뒤덮여있었다. 아마도

잠을 많이 못잔 듯 보였다. 


“오셨네요...”

“네. 이제 걱정할 일 없을 겁니다. 오늘이면 다 끝날테니...”


용규는 은찬을 지나쳐 성큼성큼 방 안으로 향했다. 그러한 용규를 바라보는 은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는 듯 보였으나 이내 피곤한 듯한 표정으로 돌아간 은찬이 그의 뒤를 따랐다.

용규는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역시나 깨끗하게 비워져있었다. 그는 거실을 훑어보았다.

여전히 가지런했다. 그는 소파에 앉았다. 뒤이어 은찬 역시 소파에 앉았다.


“꿈은..어디까지 진행 되었습니까?”

“변함없어요. 낮잠을 잤을 리가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아기인 채로 남아 있겠군요.”


용규는 자신이 가지고 온 음료수를 그에게 권했다. 마음을 진정하라는 의미인 듯 했고,

은찬은 아무런 의심없이 그것을 받아서 단숨에 들이켰다. 음료수를 마시는 것을 본 용규는

자신의 음료수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은찬은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그를 바라보며

울먹였다.


“두렵습니다...”

“뭐가요?”

“뭐가라니요?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자신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이 두려워서?”

“물론이...”

“아니면.”


은찬의 말을 끊은 용규가 그를 쏘아보았다. 은찬은 움찔했으나 이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되고 싶어 했던 존재가 사라진 것이 두려워서?”

“무..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용규를 향해 되묻는 은찬에게 그는 서류뭉치를 꺼내서 테이블에 던져놓았다. 그러고선

용규는 은찬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는 듯이 용규를 째려본 후 은찬은

서류 뭉치를 들어서 내용물을 확인했다. 은찬의 표정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그의 이마에선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무엇인지 모른다고는 안하시겠죠? 누구인지 모른다고 또한 안하실겁니다.”

“도..도대체 이게 무슨...”

“분명! 당신은 저에게 형이나 동생이 없다고 했었죠?”

“그..그건...”


은찬에 손에 들려있던 서류를 낚아챈 용규는 은찬의 눈에 그 서류를 들여대고는 말했다.

서류를 보는 은찬의 손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리고 있었다.


“박 은창. 1991년 10월 생. 2009년 4월 실종 신고 접수. 보이십니까?”


은찬은 말이 없었다. 그의 시선은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러한

은찬의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규가 다른 서류를 찾아 그에게 내밀었다.


“박 은찬씨. 당신의 주민 등록 등본입니다. 당신은 나를 그저 그런 심령학자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아쉽게도 저는 이런 쪽에 굉장히 능통한 루트를 몇가지 가지고 있죠.“


은찬은 말 없이 자신의 등본을 쳐다보고 있었다.


“여기 보면 분명! 당신의 밑에 ‘박 은창’이라는 사람이 기재되어 있군요. 가족 관계는

형제..!“


용규는 서류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은 채로 은찬의 눈 앞에 가져다 대었다. 은찬은

하염없이 그 서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분명 은찬씨는 저에게 동생이 없다고 말씀하셨지만...이 곳에는 동생이 있다고 나와있

군요. 없던 동생을 만들어서 써놓지는 않았겠죠.“

“그..그건...실종된 동생을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건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중요한건 저의 ....“

“꿈 말씀이신가요? 그것도 이상하더군요. 은찬씨의 말대로 희정씨를 찾아가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했죠.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은찬씨의 말과는 다르게 희정씨는

은찬씨를 잘 기억하지 못 하더군요?“

“너..너무 오래되서...”

“아니요. 그녀는 ‘은찬씨’는 기억했지만 은찬씨와 ‘친하다’라는 사실을 기억해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녀가 당신과 얼굴만 아는 한다리 건너 사람이라구요.“

“그..그럴 리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용규는 은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녀의 나이는 19살. 당신보다 무려 3살이나 어립니다.”

“네...?”

“신분증을 보고 확신했습니다. 그녀는 확실히 19살이었고 결과적으로 당신의 친구가 아니었죠.”

“무..무슨..그런...”

“당신이 꾼 꿈 속의 그 기억...확실히 당신의 기억이 맞습니까?”

“물..물론이에요...”

“혹시...”


용규는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은 마른 침을 삼키며 용규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생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당신이 ‘바라보았던’ 기억 아닙니까?”


은찬의 손은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희정씨를 필두로 해서 당신과 박은창씨의 측근들을 조사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흥미

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죠.“


용규는 가방에서 조그마한 녹음기를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재생버튼을 누른 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 곳에서는 10명 남짓한 사람들이 제각기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를 하고 있

었다.


“10명 모두 하나같이 같은 진술을 하더군요. 자신들은 ‘박 은찬’과 친하지 않다. 그의 동생인

‘박 은창’과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이런 말도 하더군요. ‘평소 은창과 노는 자리에 종종,

아니 거의 맨날 그의 형이 따라붙어서 귀찮았다. 그가 오지 않은 날도 몇 번 있었지만

왠지 어디선가 자신들을 지켜보는 것 같아 불쾌할 때가 많았다.‘ 라구요.“


용규는 녹음기에 붙어있던 볼륨 업 버튼을 누른 후 은찬의 귀에 가져다 대었다.


『마치 은찬이라는 그 형은 동생을 사랑하는 것 같았어요. 본받고 싶어했구요.』


은찬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흔히 브라더 콤플렉스라고 하죠. 형제사이의 한쪽이 일방을 존경하거나 자신의 소유로 

두고 싶어하는 정신병...하지만 일반적으로 동생이 형을 갈망하는 게 대부분인데 당신은

조금 특별하더군요.“ 


은찬의 눈은 이미 생기를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러한 은찬을 한참 바라보던 용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의 브라더콤플렉스는 형을 이길 수 없는 동생이 마음을 접거나, 형을

롤모델로 삼는 것에서 만족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다르죠. 형의 입장에선

동생을 얼마든지 자신의 편의대로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만약

자신이 롤모델로 삼던 동생이, 매일 자신의 말을 잘 따르던 동생이 어느순간 자신의 생각과

엇나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용규는 은찬을 바라보았다. 은찬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은찬의 눈은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주위를 두리번대고 있었다.


“처음엔 막았겠죠. 말로 설득했겠죠. 그러나 상대는 19살의 청소년. 말을 들을 리가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고 존경해마지않던 동생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을 버리려한다면? 그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하..하하..제..제가 동생을 주..죽이기라도 했단 말씀이십...”

“그래. 당신은 동생을 죽였어.”


용규의 말에 은찬은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한 그의 행동에 아랑곳하지 않고 용규는 말을 멈

추지 않았다.


“죽였겠지. 그리고는 생각 했을 거야. 동생의 시체라도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그렇지?

그래서 시체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겠지. 어디다가 숨길까? 응? 정원에 위치한 연못?

아니. 그곳은 너무 흔한데다 시체를 숨기기엔 너무 얕고 맑지. 그렇다면 어디일까??“


은찬의 손은 떨리다 못해 수전증에 걸린 사람처럼 손을 자신의 의지대로 가누질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리도록 내버려두고 있었다.


“팻말!! 이 집엔 개가 없어. 처음엔 개가 어디에 간 줄 알았지만 내가 이 집을 방문한 3일

내내 개는 보이지 않더군. 개집조차 없는 황량한 정원에 난데없는 팻말이라...

‘개조심’이라는 글자는 확실히 아주 간단하게 사람의 왕래를 끊을 수 있지. 시체는 그 밑에

있을 거고. 발뺌할 수 없을 거야. 아까 오면서 정원의 지반과 팻말이 꽂혀있던 지반을 확인

했으니.“


은찬의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은찬의 입에는 괴기스러울 정도로 부자연스러운 미소

가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동생을 죽인 죄책감과 더 이상 자신의 말을 들어줄 동생이 없다는 사실은 당신의

정신을 불안하게 만들고 말았지. 그리고 결국 당신은 당신과 동생을 동일시하기 시작했어.

물론 평소의 당신은 그렇지 않았겠지. 다만, 당신의 그 브라더콤플렉스는 당신이 잠든 사이

뇌를 조종해서 당신과 동생이 한 사람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기 시작한거야. 무슨 말이냐구?

당신이 ‘바라보았던’ 동생의 기억이 당신이 ‘겪었던’ 기억인 양 치부되기 시작한거지.

분명 당신은 나에게 말했어. 당신이 그 사실을 말한 사람들은 모두 ‘무슨 소리야? 당.신.이.

왜.거.기.있.었.던.건.데?‘ 라고 대답했다고. 그럴 만도 하지. 그들의 기억 속엔 당신이 아닌

당신의 동생이 거기 있었을 테니.“


은찬은 이제 히죽히죽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래도 평소의 당신은 꽤나 이성적인 사람이었는지 나를 부르고서는 이내 동생의 존재가

자신을 곤경에 빠뜨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겠지. 그리고는 집안을 청소하기 시작했을 거야.

아마 그 전까지는 동생과의 추억이 담긴 물품을 그대로 간직했겠지. 죽이긴 했지만 내면에선

아직 동생과 함께하고 싶었을 테니. 그렇기에 그것들을 처분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당신은 

부리나케 청소를 시작했어. 그래. 내가 방문한 시간은 당신이 청소하는 시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당신의 신발. 당신은 분명 깔끔한 사람에 결벽증까지 있지. 그리고 첫날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어. 하지만 첫날은 그렇지 못했지. 마치 바깥을 

허둥지둥 몇 번이나 왕복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처럼 신발을 아무렇게나 내던져두었더군.

아마 내가 오기 전에 증거를 인멸해야한다는 강박관념이 당신의 결벽 증세를 조금이나마 

완화시켰겠지. 당신은 내가 오기 전에 그 일을 끝마칠 수 있었다고 생각했을 테고. 

그러나 당신의 예상과는 달리 나는 좀 일찍 도착하게 되었어. 내가 초인종을 눌렀을 때,

당신은 움직임을 멈추고 바깥의 동태를 살폈을 거야. 그래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던 거였겠지.

그리고 내 목소리를 확인하고는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것들을 대충 쓰레기통에 버렸을테고.“

“큭큭....형사양반 납셨구만..내가 범새끼를 고용했나보네..”

“워워. 아직 끝이 아니야. 더 들어둬. 내가 맨 처음 들어왔을 때 당신의 표정과 행동이

어땠는 줄 알아? 똥마려운 개 마냥 낑낑대면서 안절부절 못했지. 난 처음에 그게 그저 꿈

때문일 거라고만 생각했어. 하지만 아니더군. 당신은 그 결벽증 때문에 그랬던 거였어.

당신은 동생의 물품을 버리면서 동시에 그 곳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고, 동생의 물품이 빠진

곳은 덩그라니 빈 곳으로 남았지. 무슨 말인지 알거야. 당신이 그렇게 중요시하던 줄이

삐뚤어졌으니 엔간히 신경이 쓰였겠지. 그 증거로 둘째 날에 내가 왔을 때 집은 정리되어

있었고, 당신 역시 첫날처럼 초조해하지 않았어. 오히려 점점 꿈이 과거와 가까워지는 그 

시점에 더 당황했어야함이 당연한데 말이야.“


은찬은 이내 낄낄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러한 은찬을 바라보는 용규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그래서 할말은 그게 다인가, 꿈나무 형사양반??”

“뭐, 한 가지가 더 있긴 하지만 굳이 말해줘야 할 필요성을 못 느끼겠네.”

“그렇다면 죽어야지 뭐. 그냥 살려둘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지?”

“물론.”

“역시 유능하셔~”


은찬은 소파의 밑에서 조그마한 칼을 꺼내들고는 용규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은찬의 

명령에 반응한 것은 상체 뿐이었고, 은찬은 소파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이 씨팔! 왜이래!”

“아까 준 음료수 맛있었지?”

“..!!!! 약을 탔나?!”

“말했잖아. 니가 날 살려둘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젠장할....경찰에 신고할 셈이냐?”

“아니. 경찰이란 족속들을 싫어하기도 하지만, 굳이 경찰에 신고할 필요성을 느끼진 못하겠거든.”

“낄낄..너무 무리하시는 거 아닌가? 겨우 이런 수면제가 날 영원히 잠재울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 테고..내가 찾아가는 게 두렵지 않나?“

“거참 말 많네. 이제 그냥 주무시는 게 어때?”

“빌어먹을 심령 쟁이야. 내가 꼭 찾아가고....”


은찬의 고개는 이내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그런 은찬의 귀에 용규는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당신이 꾼 꿈 말이야. 그건 비단 당신의 브라더 콤플렉스 때문만은 아니야. 그동안 못 잔 것

이제 충분히 잘 수 있을 거야. 그럼 이만.”


용규는 자신이 가져온 서류와 녹음기를 챙겨들고 현관을 나섰다. 가는 도중에 정원에 박혀

있는 개조심 팻말을 뽑아버리는 것도 잊지 않는 용규였다.




#




어느 한적한 날의 오후. 용규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주위에는 심령서적과 심리학 개론이 마구 뒤섞여있었고, 그는 중간 중간 그 책

들을 뒤적이고 있었다. 


“브라더 콤플렉스와 빙의라...”


그는 타이핑을 멈추고는 조용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빙의 후 각성. 

일반적인 빙의와는 달리 숙주의 뇌와 신경계를 조금씩 잠식하여 스스로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돌연 변이적 빙의 현상.

숙주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드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숙주의 기억을 단절시켜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법과

숙주의 몸을 마비시켜서 강제적으로 빙의에 들어가는 방법이 주로 나타남.

이러한 돌연 변이적 빙의 현상은 숙주가 강력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을 때 발생하는

것으로 추정.』


용규는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파일을 저장한 후 노트북을 닫았다. 

그는 책상에 다리를 꼬아서 올리고는 창문으로 새어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여기가 김 용규씨 사무실이 맞나요?”


용규가 한참 오후의 평화를 즐기고 있는 바로 그때, 그의 사무실로 깔끔해 보이는 남자가 

찾아왔다. 용규는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오세요, 은찬씨. 아니, 이제는 은창씨인가요?”


용규와 은창은 서로를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형이 실례가 많았습니다. 덕분에 이렇게 다시 오후의 햇살을 느낄 수 있게 되었네요.”

“천만의 말씀을요. 심령 연구가이긴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애도하는 역할도 같이

겸하고 있는걸요.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저야 감사하죠.”


이내 용규는 자신의 사무실 한 켠에 마련되어있는 커피메이커로 향했다. 은창은 사무실

가운데에 위치한 테이블로 향하다가 문득 노트북을 보고는 그것을 열어보았다. 그러한

모습을 바라보던 용규가 커피 두 잔을 들고 오면서 그에게 말했다.


“아, 그거 별거 아니에요. 은찬씨가 앓고 있던 돌연 변이적 빙의 현상을 나름 연구해 본

자료거든요.“

“아, 그렇다면 이게..?”

“네. 은창씨를 세상에 나오게 한 장본인이죠.”

“흥미롭네요..설명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은창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용규를 바라보았고, 그러한 은창을 바라보던 용규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내 그에게 소파에 앉을 것을 당부하고는 말을 시작했다.

은창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거리거나 손뼉을 치면서 그의 말에 집중했고, 그러한 반응에

용규는 신이 나서 설명을 이어갔다. 중간 중간 은창의 표정이 미묘하게 흔들렸으나 자신의

이야기에 빠져버린 용규가 그것을 눈치챌 리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제가 수면제를 먹인 탓에 그는 마지막 꿈을 꾸게 된 것이죠.”

“굉장히 흥미롭군요...”

“그렇죠? 저도 처음 은찬씨를 보았을 때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흐음..근데 만약 형이 빙의 현상을 탈출하려고 했다면 어떤 방식으로 했어야 하는 건가요?”

“네..?”

“저에게 몸을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했을 까요?”

“갑자기 그건 왜..?”

“혹시 형이 다시 저의 몸을 빼앗으려 할지도 모르니까요.”


그는 가볍게 웃어보였다. 용규는 그러한 은창을 잠시 바라보더니 이내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간단해요. 꿈 속의 기억이 자신의 기억이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면 되죠.”

“그게 끝인가요?”

“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 자각이 꿈 속에서 이루어져야하거든요. 아무리 꿈이라

고 자각하려 해도 실제 꿈 속에서는 그것을 느낄 수 없는 것처럼 이 것도 꽤나 어려운 작업

이거든요.“

“흐음..그렇군요...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더 궁금하신 건 이제 없는 거죠? 은찬씨의 기억을 공유하던 은창씨가 일의 전말을 모른다는

건 조금 당황스럽네요. 하핫. 숙주의 기억까지 공유하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에요.“

“그런가요? 킥. 아! 한가지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얼마든지.”

“용규씨가 주신 수면제를 먹으면 꿈을 꾸지 않는 겁니까?”

“네. 그건 일반적인 수면제와는 달리 굉장히 효력이 강하거든요. 마지막 작전에 문제가

생길까봐 나중엔 일부러 수면제의 복용을 줄이라고 말까지...“


순간 용규의 표정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언가 간과한 것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챘

는지 자신의 사무실에 놓여있던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용규가 버려둔 캡슐과

수면제 봉지가 구겨져서 들어가 있었다.


“수면제 잘 먹었수다. 낄낄”

“젠장할.”


은창은, 아니 은찬은 테이블을 발판삼아 용규에게 뛰어 들어갔다. 그의 손에선 번쩍이는

무언가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용규가 어찌할 틈도 없이 은찬은 자신의 손에 들린 칼로

그의 몸을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찰나의 시간이었다. 이내 용규는

자신의 몸에 뚫린 수 십 개의 인위적인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널부러져 버렸다.


“마지막이 서툴렀군, 꿈나무 형사양반. 그러니까 꿈나무지. 목숨을 걸었으면 철저해야 할거

아닌가.“


은찬은 널부러져있는 용규의 시체를 바라보며 이죽거렸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무실을 빠져

나갔다. 용규의 몸에서는 피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두 눈이 있어야 할 곳은

붉은 색 액체가 고여있는 호수가 만들어졌고, 광대뼈는 이미 그 형체를 잊은 채 움푹 패인

구멍을 이루고 있었다. 목에는 길다란 칼 자국이 세상을 향해 울부짖으려는 그의 비명을

막고 있었고, 수 십개의 구멍이 뚫린 뱃 속에서는 내장들이 세상의 공기와 접촉하고 있었다.

따사로운 오후의 햇살은 그러한 용규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노트북의 커서만이 따사로운 햇살에 대항하려는 듯이 자신을 깜박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출처



웃대 - hero창정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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