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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가 해줬던 명절 밥상
게시물ID : cook_20690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그냥노동자
추천 : 15
조회수 : 1691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7/07/10 04:58:41
 
 
 
어렸을 때 나는 명절이 되면, 먼저 친가집에 가고, 그 다음에 외가집에 갔다.
당연히 친가집에서 술이 만취된 아버지는 외가집에 잘 가는 일이 없었고, 엄마와 나, 동생만 가거나
아니면 아예 가지 않고 다음날 외가친척들이 다 간 뒤에야 가는 일이 잦았다.
 
그것이 나는, 외가집에 별로 가고싶어 하지 않는 아버지의 이기심이라고 생각했고
한때는 그런점이 아버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게 만들기도 했다.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세월이 지나 알게 된 사실은 이러했다.
결혼하겠다고 사우디에서 큰 돈을 벌었던 아버지는 매달 그 돈을 가족에게 송금했는데
가족중 누군가 그 돈을 다 써버렸고 귀국한 아버지는 돈이 한푼도 없는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가족이라고, 아버지는 그 돈을 뒤로한 채 셋방에서 어머니와 시작했는데
딸자식 출가시켰더니 고생만 시킨다고 외가집에서 대단히 안좋아했던 모양이였다.
 
단지 누군가에게는 즐겁기만 한 명절에도 아버지는 눈치를 봤던 것이겠지.
 
그거야 뭐, 어른들의 사정이였고 나는 역시 그 시절을 관통했지만 단지 지나치기만 한 어린아이일 뿐이였다.
가족관계는 치우고서라도 나는 그래도,
할머니가 해줬던 그 밥상이 참으로 기억난다.
 
가족이 너무 많은 탓에 명절만 되면 여기저기서 그릇을 끌어모아 누구는 밥그릇에 밥먹고 누구는 국그릇에 밥먹고
그걸로도 모자라 상을 크게 세개나 폈는데 애들만 열명이 넘고 어른은 수없이 많아서 마당에까지 상을 펴놓고 밥을 먹어야 했다.
 
맛있는 밥상.
 
그렇게 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외할머니는 하고많은 음식중에서 유독 녹두전과 갈비를 그렇게 잘 하셨다.
맛을 표현할 수없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그 맛을 잊지 못해 직접 만들어보고 전국을 다 돌아다니면서
찾아봤지만 그것과 비견되는 맛을 찾을 수 없었다. 토란국을 한수저 뜨고 갈비부터 집어 먹었을 때, 배가 불러올때면
녹두전을 찢어 먹는 그 맛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은 어머니에게도 물어봤지만, 어머니가 답하기를
 
"그거 이제 못만든다. 할머니가 안알려주고 돌아가셨어."
 
답을 마친 어머니는 왠지 쓸쓸한 뒷모습으로 설거지를 했다.
어머니도 나름대로 맛을 찾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신 모양이였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하신다.
이것도 실전(기술이 전승되지 못한)이라면 실전이겠지.
 
이제 어머니의 가족은 남아있지 않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첫째이모와 이모부도, 돌아가셨다.
외삼촌은 이제 연락이 닿지 않는다.
둘째이모는 돈번다고 미국가서 이제 연락이 되지 않는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캐나다로 가서 캐나다 사람이 된 셋째이모는 이제 한국말이 잘 안나오는 모양이다.
 
명절이면 모여 땅따먹기고 무궁화꽃이고 했던 친척동생 형 누나들은 각자의 삶을 산다.
과거에 발목잡혀 회상하는 것은 나뿐일 것이다.
 
엄마는 얼마전에 캐나다 이모하고 통화를 했다.
전화통을 붙잡고 세시간이 넘게 이야기했는데도 할말이 남았다고 한다.
명절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가 셋째이모에게 말했다.
 
"얘 이제 너하고 나밖에 없다."
 
그말이 왜 그렇게 서글픈지 내가 다 눈물이 났다.
할머니가 다시 돌아와 그 상을 차려준대도 먹을사람조차 남아있지 않다.
 
아니, 다 있대도... 나처럼 간절히 먹고싶어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이성적인 문제로다가, 땅값과 현금다발에 멀어진 사람들이니까
그런 감성이나 남아있을런지.
 
여러가지로 씁쓸해서, 아무말이나 써본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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