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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삼국시대에 가장 용맹했던 5개의 정예부대
게시물ID : history_2075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11
조회수 : 4633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5/14 18:30:43
글: 복녕객(福寧客)

난세삼국에 각지의 세력은 아주 복잡했고, 군대도 아주 많았다. 이름을 날리고 후세에 이름이 전해지는 부대도 적지 않다. 오늘 얘기할 이 다섯 개의 정예부대는 대부분 유비와 관계가 있어서, 아마도 한켠으로 치우친 것같다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유비의 수하부대가 용맹하지 않았다면 유일하게 맨손으로 나라를 일으킨  촉한이 전통강호인 위, 오와 천하를 삼분할 수 있었겠는가?

1. 단양병(丹陽兵)

이는 도겸(陶謙)의 부대이다. 그 자신이 바로 단양 사람이다. 서주의 노군벌로서, 도겸은 수정에 좋은 장수를 지니고 있지는 못했지만, 정예인 '단양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래서 조조와 같은 거물과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양은 산이 험하고 백성은 과감하고 용맹하며 무예를 좋아하고 싸움을 즐긴며, 힘있는 자를 숭상하여 정예병이 나는 곳이다." 유비가 도겸을 증원할 때 도겸은 수천의 단양병을 유비에게 준다. 나중에 유비를 따라 천리를 전전하는 부대가 바로 이 정예병이다. 나머지 단양병은 조표(曹豹)의 지휘하에 여포가 서주를 탈취하는 전쟁을 일으킨다. 아마도 나중에 여포의 부하가운데에도 단양병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현지에 잔류한 약간의 단양병은 광릉태후 진원룡(陳元龒)의 부하가 된다. 이들 단양병은 나중에 소패왕 손책의 도강공격을 물리친다. 유비, 여포와 조조의 격렬한 전투를 보면, 단양병은 동이의 후손이며 기본적으로 용병부대이다. 전투를 잘하며 힘든 것도 견디는 항우자제병의 기풍이 있다.

2. 함진영(陷陳營)

함진영은 독특한 부대이다. 사람수는 많지 않지만 전투에서 극히 용맹했다. 지휘관은 여포 수하의 대장 고순(高順)이다. 사람들은 고순에 대하여, "그가 이끄는 칠백여명의 병사는 천명이라고 부르는데, 갑옷이 모두 정련되고 균일하여 매번 공격할 때마다 부수지 못하는 경우가 없었다. 이름은 '함진영'이라고 불렀다." 함진영은 사령관인 고순과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고순의 사람됨은 "청백하고 위엄이 있으며 술을 마시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았다." 그는 충성스러운 것으로 유명했고, 여포가 멸망한 후,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목을 내밀어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반복무상의 여포진영에서는 보기 드문 경우였다. 조조는 여포의 수하에 대하여는 투항을 권유하지 않고 죽인 것은 오로지 그 한 명 뿐이었다. 진궁은 조조의 약점을 잘 알아서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포는 사령관의 재질은 없었다. 고순도 잘 쓰지 못했다. 그러나 함진영의 전투력은 잘 알았다. 그래서 "여포는 그의 충성됨을 알았지만, 쓸 수가 없었다. 여포는 학맹이 반기를 든 후 더욱 고순을 멀리한다. 육속은 그와 친척관계여서 고순이 거느리는 병사를 모조리 육속이 빼앗는다. 그래서 공성전을 할 때 고순에게 육속이 거느린 병사를 지휘하게 하였지만, 고순은 원망하지 않았다." 여포의 비극은 바로 이 정예병의 비극이다.

3. 백이병(白耳兵)

백이병은 유비의 친위대이다. 유비의 곁을 지키는 백이병도 백전노장들이었다. 여기서 언급할만한 점이라면 백이병의 지휘관 진도(陳到)이다. 진도는 자가 숙지(叔至)이고 여남 사람이다. 유비를 따라 온갖 전투를 치르면서 촉한이 성립된 후에는 정후(亭侯), 정서장군에 봉해진다. 이엄을 도와서 백제(白帝)를 지켰다. <삼국지>에서는 "정남후중(征南厚重), 정서충극(征西忠克), 통시선사(統時選士), 맹장지열(猛將之列)"이라고 하였다. 정남장군은 조운을 가리키고,정서장군은 진도를 가리킨다. 이릉전투에서 촉군이 패전한 후, 진도는 부동과 후방을 막는다. 부동이 전사하자, 진도는 백이병 수백을 이끌고, 수백의 창으로 오군의 미친듯한 추격을 막아냈다. 이를 보더라도 백이병의 전투력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촉한의 맹장은 <삼국연의>에서 이름조차 거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기괴한 일이다. 그는 원래 유비의 막하에서 조운 다음가는 맹장이었다. 아마도 나관중이 촉한의 맹장을 너무 많이 그려내어 역사적 사실을 훨씬 초과하였으므로 진도는 억울하지만 나오지 못한 것이 아닐가. 진도는 역사상 "자주 조운과 나란히 거명되며, 충용을 겸비한 장수로 칭해진다." 조운이 이미 전형적인 그런 장군이므로 나관중은 아마도 두 사람을 합쳐서 조운의 이미지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4. 백마의종(白馬義從)

저수는 감군으로 원소에게 말한다: "공손찬은 백마를 좋아하여, 자주 백마를 타고 오랑캐를 격파한다. 오랑캐들은 '백마장군'이라고 불렀다. 정예 삼천을 골라서 모두 백마를 타게 하고 '백마의종'이라 불렀다. 실은 금위군이다." 삼국의 전투에서 '백마의종'은 그저 한줄기 유성과 같다. 공손찬의 정예기병부대였다. 아쉽게도, 짧은 동안의 휘황을 뒤로 하고, 계교전투에서 원소의 대장 국의(鞠義)에게 섬멸당한다. 공손찬은 북방소수민족과의 전투에서 용맹한 것으로 이름을 떨친다. 그는 쌍두철모를 잘 썼다. <후한서>에서는 "공손찬은 자주 활을 잘 쏘는 사람 수십명과 함께 백마를 타고, 좌우 날개로 삼아서 스스로 '백마의종'이라고 불렀다. 오환에서는 서로 말을 전하여 백마장사를 피했다" 백마의종은 나중에 상당한 규모의 부대로 확충되어 일시에 새외에 이름을 떨친다. 

아쉽게도 계교전투에서 극성 국의를 만난다. 백마의종은 이때부터 힘을 잃는다. "공손찬은 그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기병을 보내어 짓밟으려 한다. 의병(義兵)은 모두 방패 아래에 엎드려 움직이지 않았다. 수십보에 이르렀을 때, 동시에 모두 일어나며 먼지를 흩날리며 소리치며 돌진한다. 강노(强弩)가 비오듯이 쏟아지며 맞으면 쓰러졌다. 공손찬의 수하 기주자사 엄강의 병사 천여명이 수급을 참한다. 공손찬의 군대가 패배하고 보병과 기병은 달아나고 다시 군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는 전형적인 궁노로 기병을 이긴 전투사례이다. 언급할만한 점이라면 자료에서 언급한 바로는 조운이 바로 백마의종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영웅전>에는 원소가 백마의종에 대하여 듣고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한다. 원소가 웃으면서 말한다; 그에게 '백마의종'이 있으면 나에게는 '대극사(大戟士)가 있다. 어찌 두려워할 것인가? 그리고 장합을 불러서 깨부수라고 말한다. 장합의 대극사도 원소군대내의 정예부대란 말인가?

5. 무당비군(無當飛軍)

소위 "무당비군"은 제갈량이 남중을 정복한 후, 소수민족병사를 이용하여 만든 촉한의 정예부대이다. 무당비군은 유비의 전통적인 정예부대 백이병, 그리고 서량 마씨군단과 더불어 3대정예부대가 되어 한때 이름을 날린다. 이 군대는 특색이 있었다. 부대의 성격으로 보면, 그다지 적절하지 않을지는 몰라도 프랑스의 용병부대와 비슷하다. 즉 직업용병군인 것이다.

촉한정권은 원래 삼묘(三苗)의 후손인 무릉만(武陵蠻)을 기용한 적이 있다. 이들은 오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에서 맹장 감녕조차도 이들의 손에 죽는다. 칠금맹획은 당연히 하나의 상징이다. 이 전쟁에서 제갈량은 남중 소수민족이 용맹하고 전투를 잘하는 것을 알았다. 이건 이상할 것도 없다. 농경민족은 보편적은 진취정신이 부족하다. 그러나 유목, 수렵민족은 왕왕 싸움을 좋아한다.

남중전쟁이 끝나면서, 평화가 찾아온다. 이들 용맹한 전사들은 실업하게 된다. 이런 역량을 남방에 놔두면, 그것은 사회의 큰 불안정요소이다. 타이완에서 항전후에 발생한 228사건을 보라. 앞장선 인물은 바로 일본군에 있던 대만적의 고사부대 구성원이다. 그래서 제갈량은 이들에게 일석용조의 유리한 정책을 쓴다. 즉 소수만족전사를 촉한의 정부군에 가입시킨 것이다. 경비문제는 현지의 지방호족들에게 부담하게 한다. 이렇게 이이제이의 수법으로 지방호족의 권위를 강화시키면서 군대문제도 해결한다. 

동시에 남방할거세력이 회복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제갈량의 주재하에 촉국은 비용을 아끼지 않고, 남중의 용맹한 병사들을 만여가를 촉으로 이주시킨다. 그리고 5부를 만드니, 이들을 막을 자가 없었다. 이들을 '비군(飛軍)'이라고 부른다. 이것이 무당비군의 내력이다. 이 군대는 촉군에 도착한 후 촉국의 군호가 되고, 대대로 촉국의 병사로 근무하는 직업군인이 된다. 당시 성도와 남중의 번화함은 같은 반열에 놓고 얘기할 수 없을 정도이다. 남중이 오랑캐들은 용사를 중시하여, 매번 인원에 부족이 생기면 남인들이 앞다투어 가입하고, 이에 가입하는 것을 영광으로 여긴다. 이는 마치 네팔의 구르카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영국군대는 네팔에서 구라카용병을 뽑는데 그 광경과 비슷하다. 당시 남방은 인구가 많지 않았는데, 양가에 이만호, 건녕군에 만호, 주제군이 팔천호, 흥고군이 사만호이다. 한꺼번에 1만호의 전쟁에 능한 세가를 옮겨버리니, 현지의 할거세력에게는 부저추신이라고 할 만하다.

무당비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들은 몸에 갑옷을 입고 산과 고개를 넘는다. 궁노와 독전을 잘 쓰며, 특히 방어작전에 능했다. 일가족이 이주하였다. 습속은 만고춤을 추고, 둥근 방패에 머리는 산발을 하며 소리를 지르며 진격한다. <삼국연의>의 칠금맹획에서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이 정예병에게 현지의 사령관 은치동 동주 양봉을 만들어 주었는데, 이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대체적인 이미지는 틀리지 않는다. 이들은 기이한 복장을 하고, 독특한 풍속을 지녔다. 이들이 촉의 수도로 들어가니 분명 적지 않은 문화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최소한 성도의 사족계층은 호기심과 우려가 있었을 것이다. 이들 용맹한 전사들을 잘 관리하기 위하여 촉한은 군대를 잘 다스리기로 이름난 위나라에서 투항한 장수이자 파서 사람인 왕평(王平)을 이 군대의 제1대사령관에 임명한다. 왕평은 자가 자균(子均)이고, 글자는 아는 것이 10개가 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병사들과 같이 고생하고, 성격이 엄격하고, 훈련은 가혹했으며, 말은 많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따랐고, 약간은 음침한 장군이다. 실로 고용군에게는 둘도 없는 적합한 지휘관이라 할 것이다. 

비군은 남중용사라는 명칭이 부끄럽지 않았다. 용맹하게 싸웠고, 촉한의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일출기산때, 마속의 부대에 배속되어 장합과 가정에서 싸운다. 원래는 마속이 남중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그가 이 군대의 장점을 잘 살릴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마속의 실수로 전군이 궤멸한다. 이때 후방을 막아준 것이 바로 왕평의 비군이다. 한편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적군을 미혹시켜 송공적으로 다른 부대원들이 전쟁터에서 철수하는 것을 도와준다. 그리고 자신도 온전하게 몸을 빼낸다.

건흥9년, 제갈량의 제4차북벌때, 왕평은 부사령관이 되어 남위에 주둔한다. 사마의를 기산에 포위하는 것을 설계한다. 사마의는 막아내지 못하고 위위구조의 수법을 택한다. 장합으로 하여금 주력군을 이끌고 왕평의 고군을 공격하게 한다. 비록 당시 왕평의 무당비군은 겨우 3천으로 위군의 20분의 1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들 용병부대의 용사들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죽기로 저항한다. 화살이 메뚜기떼처럼 날아오는 장합의 맹공에도 견뎌낸다. 사마의의 군영은 이미 제갈량의 대군에 포위당한다. 위군이 퇴각하고, 무당비군은 산지병력의 특징을 살려 위군의 후위를 공격한다. 이렇게 전후로 협공하니 위군은 대패하고 갑수 수천을 잃는다. 촉국이 사마의와의 제1차대전에서 상당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무당비군이 조위 맹장 장합의 공격을 막아내주었기 때문이다.

무당비군은 산지작전의 특징으로 자주 소수민족반란을 진압하는데 동원된다. 연희3년(240년), 한가(지금의 사천 아안 북쪽)의 오랑캐가 반란을 일으킨다. 촉한은 향총을 보내지만 그는 소수민족반란군의 손에 죽는다. 다시 무당비군을 전선에서 불러들여 국면을 통제할 수 있었다. 이들은 아마도 제2대 혹은 제3대 비군이었을 것이다.
출처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4dwc&articleno=16155448&maxNo=16155453&minNo=16155444&maxDt=20150506005627&minDt=20150425100708&maxListNo=0&minListNo=0&maxListDt=&minListDt=&currentPage=1&beforePage=1&category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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