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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 승무원 와타나베의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2081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워썬더
추천 : 11
조회수 : 816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5/17 02:01:10
천황이 갑자기 신에서 인간으로, 성전의 제일가는 상징에서 '민주주의'의 애매모호한 상징으로 바뀐 데 대한 독특하고도 예리한 비판을 담은 [산산조각 난 신] 이 1977년에 출판되었다.

이 책은 와타나베 기요시가 1945년 9월부터 1946년 4월까지 기록한 일기인데, 당시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못한 퇴역 군인이었다.   그는 열다섯 살에 해군에 입대해서 일본에 전세가 불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1944년 마리아나 제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전을 경험한 사람이었다. (1944년 6월 19일) 그 뒤 그가 타고 있던 전함 무사시가 침몰하여 대부분의 승무원이 사망했는데도,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1944년 10월 24일) 이리하여 그는 남들보다 빨리 동원 해제되어 천황의 항복 방송이 나온 지 2주 후에 고향 가나가와 현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군수물자를 하나도 챙기지 않은 채 귀향한 그를, 어머니는 동네의 다른 자식들은 이것저것 챙겨서 왔는데 무엇을 했느냐며 타박했다고 한다.

청년병사 와타나베는 천황이 ‘성전’에 대해 발언한 모든 것을 그는 하나도 빠짐없이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전투에 임했다. 전쟁에 지면 천황이 사형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그가 타고 있던 무사시에서, 또한 그의 고향에서도 널리 퍼져 있었다. 와타나베는 천황이 자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쟁에 패배해 적에게 수모당하는 것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결밖에 없었다. 끝내 천황이 자살하지 않자 그는 패전의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기 위한 천황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짐작했다. 아마 대부분의 제국 육해군 병사들이 귀국하기만 하면 제위를 내놓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의 추측이었다. 천황이 그의 이름 아래 목숨을 바친 병사들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든 표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와타나베의 일기는 1945년 9월 2일부터 시작된다. 바로 도쿄 만에서 항복 문서 조인식이 치러진 날이다. 제국 함대에까지도 적군의 깃발이 게양된 것을 본 그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그는 이보다 더한 치욕은 없다고 썼다. 연합군이 도쿄로 쏟아져 들어왔을 때는 흙투성이 군홧발이 가슴팍을 짓밞는 듯하다고 적었다. 도조 히데키의 엉성한 자살 시도는 그에게 구토감을 안겨 주었을 뿐이었고 천황이 자진해서 맥아더를 방문했다는 데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 둘이 마치 친구나 된 듯 나란히 서 있는 그 유명한 사진을 보고는 구역질이 났다. 그 사진은 그에게 “천황과 더불어 정말로 졌구나”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그의 절망감은 왜 천황이 아무런 수치심도 보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천황은 원수로서 신성함과 권위를 스스로 내팽개치고 적 앞에 마치 개처럼 머리를 조아렸다”라고 썼다. 때문에 그에게 “천황 폐하는 이날 죽었다.”

그 뒤 몇 달 동안 그는 마치 미친 사람 같았다. 배신당했다는 생각과 억누를 수 없는 분노에 괴로워하는 나날이 이어졌다. 이제 아무도, 아무것도 믿을 수 없게 되었으며,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믿을 수 없었다. 천황이 정말로 전쟁을 원치 않았다면 도대체 개전 선언에 서명은 왜 했는가? 왜 그는 진주만 공격 책임을 도조에게 밀어붙이려 하는가? 왜 이 모든게 자신이 명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언론도 그를 질리게 했다. 어제는 ‘성전’이라고 떠들어 대던 신문들이 오늘은 군국주의자, 관료, 재벌의 음모라고 말하고 있다. 누군가가 신문에서 믿을 만한 기사는 부고밖에 없다고 한 것에 와타나베는 동의를 표하며 옮겨 적었다.

언론이나 정부가 선전해 대는 ‘1억 총참회’나 ‘어제의 적은 오늘의 친구’라는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말도 더없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우정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도대체 전쟁은 왜 벌인 것인가? 1억 총참회는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인가? 그보다는 천황을 포함해 전쟁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잇는 사람들에게 참회하는 것이 낫지 않은가?

10월 중순이 되자 오랜 분노에 지친 그는 황궁을 불태우고 황궁 옆의 해자 가에 있는 소나무에 천황을 거꾸로 매달아 (제국 해군의 수병들이 그랬듯이) 떡갈나무 몽둥이로 내려치는 광경을 상상할 정도가 되었다. 혹은 바다 밑으로 끌고 들어가 바닥에 가라앉은 수천의 시체, 바로 그의 명령으로 시작된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그 시체들을 보여 주는 것을 상상했다. 천황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해저의 바위에 내려치는 것을 상상했다. 와타나베는 스스로도 미쳐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국가 신도 폐지령이 나온 12월 15일 그를 ‘군대 떨거지’라고 비웃는 야쿠자 다섯 명과 싸움이 붙은 끝에 크게 부상을 당했다. 온 몸에 멍이 든 채 자리에 누운 와타나베는 그가 타고 있던 전함 무사시에 다시 탑승해 46cm 함포를 일본 열도로 겨누어 마구 포탄을 갈겨 대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날 그는 이런 저주를 퍼부었다

 
천황이란 뭐냐?

일본이란 뭐냐?

애국이란 뭐냐?

민주주의란 뭐냐?

‘문명 국가’란 뭐냐?

다, 전부 뒈져 버려라.

거기에 침을 뱉는다!



이후 와타나베는 계속되는 전후 일본인들의 이중성, 이를테면 전쟁 중에 귀축영미를 작살내야한다고 소리높여 외치던 아버지의 친구가 일본이 미국이 49번째 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와타나베의 소학교 시절, 어린 학도들에게 전장으로 나아가라고 선동하던 교사가 차라리 일본이 전쟁에서 잘됬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었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는 등, 환멸을 느끼게 되고 일본 전체에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으로 변하게된다.

4월 20일, 와타나베는 ‘아나타’라는 호칭으로 천황에게 나는 당신에게 충성하며 전쟁을 수행했지만 패전 이후 더 이상 당신을 믿을 수도, 당신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도 없게 되었다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그리고 복무 기간동안 그가 누렸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한 뒤, 총 4281엔 5센으로 정산하고 편지에 동봉하면서 이렇게 글을 끝 맺는다.




“이제 내가 당신에게 빚진 건 한 푼도 없소.”






출처: 존 다우어 '패배를 껴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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