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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학과 메이지 유신에 대해
게시물ID : history_2101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aurelius
추천 : 5
조회수 : 937회
댓글수 : 7개
등록시간 : 2015/05/27 11:54:39
일본이 임진왜란 전부터 서구와 교류하면서 서양의 기술력에 눈을 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물론 여러 정치적 이유 때문에 나중에는 서양과의 무역을 대폭 제한하는데,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와는 이른바 쇄국정책 하에서도 꾸준히 교류가 지속되었죠. 이러한 여건 속에서 발전한 신학문이 바로 난학(蘭學)이라는 것인데 이러한 사상적 전통이 후일 메이지 유신에 미친 영향은 정말 거대합니다.

먼저 사쿠마 쇼잔(1811~1864)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는 원래 주자학에 정통한 유학자였지만 그가 33세가 됐을 때 구로카와 료안이라는 난학자를 만나게 되면서 서양의 지식에 대해 눈을 뜨게 됩니다. 그는 Noel Chomel이라는 네덜란드 사람이 집필한 '백과사전'의 일본어 번역본을 탐독하였고 1849년에 이르면 전기와 전신에 대해서 배우게 되고 전기를 이용한 기계를 발명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일찍이 중국의 아편전쟁에 대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고 막부에 서양의 군사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적극적으로 건의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며 중국에서 발간된 해국도지를 번역하고 여기서 제시하고 있는 <해방팔책>을 적극적으로 선전합니다. 당시 막부 또한 청나라의 군사사(聖武記)와 해국도지의 일본어 번역본을 급히 찾고 있었던 실정이었고... 

아무튼 이러한 쇼잔은 후일 메이지 유신의 거두가 될 여러 인물을 제자로 길러냈는데 그 중에 중요한 인물로는 카츠 카이슈(1823-1899)와 요시다 쇼인(1830-1859)이 있습니다. 

요시다 쇼인은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인물로 일찍이부터 정한론을 주장했고 아베 신조가 가장 존경한다는 인물이라고 하죠. 그런데 그는 스승인 사쿠마 쇼잔으로부터 난학에 대한 것을 물려받기보다 주자학적인 유교적 세계관을 물려받은 것 같습니다. 그는 후일 '존왕양이'의 가장 열렬한 선교자가 되었고, 그가 길러낸 제자들은 대게 과격한 근왕주의자들이 되었죠. 

그런데 사실 요시다보다 더 중요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카츠 카이슈입니다. 그는 난학에 심취한 학생이었고 네덜란드어와 유럽의 군사기술을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덕분에 네덜란드어를 상당한 수준급으로 구사할 수 있었고 따라서 막부가 유럽열강들과 교섭할 때 통역으로 나설 수 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네덜란드인들의 도움을 받아 1855년 나가사키에 '해군 전습소'를 설치하고 여기서 '일본해군'을 육성하기 위해 학생들을 모집하고 그곳에서 유럽기술과 네덜란드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전습소에 모이게된 학생들은 난학과 더불어 서양문물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 중 한명은 고다이 다이스케(1836-1886)이라는 인물인데 그는 사쓰마 번 출신의 사무라이였습니다. 그는 카츠 카이슈와 와의 친분, 그리고 나가사키 전습소에서의 유학 끝에 서양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고다이는 사실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던 인물인데, 그의 아버지는 류큐와의 무역에 종사했던 사람이었고 그 또한 일찍이 상하이에 가본 경험이 있었고, 다시 말하자면 국제적 안목을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일찍이부터 양이론이라는 것은 어리석고 무지한 자들의 선동이라고 생각했으며 사쓰마 번에 꾸준히 개혁을 건의했습니다. 그가 '정책'으로 건의했던 것은 근대적 산업의 진흥과 서양의 군사기술 및 편제의 도입, 그리고 유럽에로의 유학생 파견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본격적으로 채택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쓰마가 영국의 군함에 의해 철저히 패배하면서부터입니다. 사쓰마가 군사적으로 영국에 패하자 소위 보수파들의 힘은 거의 일거에 말소되었고 고다이가 번 정치의 중심에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1864년에는 개성소가 설치되어 포술, 조련, 병법, 축성, 천문, 지리 , 수학, 측량, 항해, 기계, 조선, 물리 , 화학, 의학 등을 교습하였고 그 이듬해 15명의 젊은 무사들로 구성된 유학생들을 영국으로 파견하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유학생 파견은 막부 정책에 반하는 불법적인 일이었지만 사쓰마는 자체적으로 부국강병책을 도모하기 위해 이들을 영국으로 파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유학에서 돌아온 고다이는 후일 메이지 일본의 개혁이 될 정책들을 사쓰마에서 먼저 실행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쓰마가 이렇게 과감히 개혁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쓰마 번주의 성향에도 있었습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1809-1858)는 사쓰마의 11대 번주로 번주로서는 드물게 난학에 상당히 심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증조부였던 시마즈 시게히데부터 난학 오타쿠였죠. 

그는 영주로 취임하자마자 서양식 조선, 반사로 및 용광로, 지뢰, 수뢰, 유리 등의 제조를 비롯한 서양식 공업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854년 서양식 군함인 쇼헤이마루를 건조해 막부에 헌상을 하고 그 군함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현대 '일장기'를 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길러낸 가신 중에는 메이지 유신 중에 활약하게 될 사이고 다카모리, 그리고 오오쿠보 도시미치가 있었습니다.  

사실 난학에 심취했던 사람들은 더 있었습니다.

메이지 유신 중에 활약하고 나중에 일본의 외교관으로 활약하는 이노우에 가오루(1836-1915)도 난학을 공부한 학생이었고 토사의 번주 야마우치 요도(1827-1872) 또한 난학에 호의적인 인물로 난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던 요시다 도요를 번정의 책임자로 등용하고 서양식 기술을 도입했으며 나가사키 유학을 추진합니다. 


사실 일본에는 전국을 획일적으로 통일하는 사상적 조류가 없었고, 신토주의, 주자학, 불교, 난학 등 여러 학파들이 난립했었고 이러한 상황에서 시대적 요구가 난학을 부각시켰으며 이를 공부한 사람들이 특출나게 성공할 수 있었기에 후일 근대화를 도모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난학에 대한 기초적 지식이 있어야 나중에 서양인들이 무언가를 가르쳐줄 떄 알아들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튼 일전에 소개해드린 영국의 역할 외에도 일본의 '난학 전통' 또한 일본의 근대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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