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물ID : humorbest_21014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한계 추천 : 78 조회수 : 1572회 댓글수 : 6개 베스트 등록시간 : 2008/08/17 12:53:55 원본글 작성시간 : 2008/08/17 06:19:29
기독교는 우리나라 제1의 종교가 아니다. 우리나라 제1의 종교는 현제 불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갈등의 단골손님으로 출몰하는 기독교의 각종 사건들... 과연 그것이 소수만의 문제일까?
기독교는 태생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길거리에 다니다 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고래고래 외치는 사람들을 쉽게 볼수 있다. 이들을 비판하면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이단인가? 기독교 교리를 놓고 보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엄연한 진실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반박할 말이 있는가? 오히려 그들은 너무도 교리에 충실한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그날이 도적같이 오리라는 불안감에 한사람이라도 살려보려고 가정을 뿌리치고 거리로 뛰어나온 너무나도 기독교 교리에 충실한 사람들인 것이다. 나라 망신 시키면서 포교하는 그 니미랄 선교사들의 모습이야 말로 가장 독실한 기독교인의 상징이다. 그들에겐 나라라는 개념 또한 결과론 적으로는 우상숭배일 뿐이다.
기독교(천주교 포함)의 성경을 보라. 그들이 읽고 있는 그들의 구약성경을 보면 기독교가 얼마나 전투적인 종교인지 알게 된다. 여호와를 믿지 않는 족속들을 죽이고 노예삼아 가며 교세를 확장하는 과정을 그들은 소중한 포교의 역사로 바이블의 반정도를 할해하여 치장하고 있다. 이를 부정할 기독교인이 있는가? 기독교는 전도라는 행위를 위해 극단적으로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것이다. 왜? 믿지 않는, 우상숭배하는 자들은 사탄의 자식들이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불리할때마다 구약보다도 훨씬 빈약한 신약의 이상적인 내용만을 내세우거나 공부한다. 사실상 교회인들은 신약은 수도없이 읽지만 구약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종교중에 기독교만큼 폐쇄적인 종교는 없다. 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간다는 종교는 매우 드물다. 불교, 유교, 도교, 심지어 이단시 되고 있는 증산도나 대순진리교조차 믿음만으로 생명을 결정하진 않는다. (이슬람교는 잘 모르겠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고? 교리를 조목조목 따져보면 결국 예수를 믿는 자들만 사랑하는 종교일 뿐이다.
기독교 외의 종교는 모두 우상숭배이며 이는 기독교리상 사탄의 소행이며 신판의 대상임은 너무도 명확하다. 이를 부정한다면 당신은 진실한 기독교인이라 말하기 힘들다. 결국 기독교리상 타종교에게 행하는 사랑에는 극단적인 한계점이 있는 것이다. 위선이거나 아니면 사탄을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거나.. 둘중의 하나일 뿐이다.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왕권붕괴등 기독교는 순수한 종교로 전승되기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정치적 영향력을 위해 투자해왔다. 종교가 정치와 연결될때의 세계사는 늘 추악했다. 그 추악했던 종교 세계사의 대부분을 장식화고 있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이런 태생적인 한계점도 그나마 역사가 흐르면서 희석되고 있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한국의 기독교는 그런 역사의 흐름마져 역류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를 보라 이게 정말 기독교인가?
한국의 기독교의 대다수는 장로교이다. 세계적으로 장로교는 대다수를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럼 왜 유독 우리나라는 장로교가 성할까? 유교문화권과 가장 문화적으로 충돌이 적은 계파가 장로교이기 때문이다. 당시 당연시 됐던 계급사회에서 그나마 받아들일수 있는 계파가 바로 장로교였던 것이다. 이렇듯 기독교와 유교문화가 사이비적으로 짬뽕되다 보니 만민이 평등한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장로와 목사는 거의 신적인 권능을 가지고 뚜렷한 상하관계를 구축하게 된다. 그들을 의심하는 행위 자체가 믿음부족으로 치부되는 상황에서 회계의 투명함을 말한다는것은 어불성설... 이런 배경이기에 타락에 빠지기 더욱 쉬워지는 것이다.
더욱이... 한국의 기독교는 유독 십일조를 강조한다. 세계 기독교 전체를 놓고 볼때 한국의 기독교만큼 십일조를 반강제하는 나라는 없다시피하다. 아니 십일조는 오히려 이단의 행위로 치부되기도 한다. 유독 한국의 기독교에서는 십일조의 양이 믿음의 척도로 환산되고 있다. 십일조나 헌금의 양으로 장로의 자리가 결정되는 경우도 태반이다. 아니라고? 에이... 쫌! 십일조와 각종헌금의 양이 믿음의 결과물로 환산되다보니 재력이 곧 믿음이 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전개되게 마련이다.
한국 기독교의 체계를 보라. 가장 큰 교회, 가장 돈 많은 교회의 목사들이 당연스럽게 한국 기독교의 대표역할을 하고 있다. 과연 그들의 믿음이 가장 좋은가? 그 자리가 믿음의 순서로 결정된 자리인가?
어떤이는 심지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의 믿음이 독실하기에 그만큼 교회가 성공할수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진솔한 유머인가? 결국 돈이 곧 믿음이라고 스스로 외치고 있지 않는가?
밑의 글을 쓴 사람의 말대로 어쩌면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보다 타협적인 종교생활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회의 영향력을 가지는 힘쌘 사이비 기독교인들이 그 소수라면 비기독교인에게는 다수의 영향력 없는 기독교인 보다 소수의 꼴통의 모습이 기독교를 대변할수 밖에 없다.
다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아요~~~ 라고 말하지 마라. 그럴시간에 소수의 그 영향력있는 꼴통들을 갈아엎어 버려라. 귤상자안의 귤 대부분이 멀쩡하다 해도 맨 윗줄의 귤이 모두 썩어 있다면 소비자에게 그 귤상자는 썪은 귤상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