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위대한 프랑스 시민혁명으로 자유, 평등, 우애(박애는 잘못된 번역임을 알아두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혁명을 지키기 위해 유럽의 전제군주들과 맞서 싸웠고 그 과정에서 자유, 평등, 우애의 정신이 퍼졌고 프랑스의 패배 이후에도 그 정신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막을 수 없어 수많은 빨갱이(?)들이 생겨나 결국 오늘날의 사회가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머 여기까지가 우리가 대충 알고 있는 이야기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이 프랑스 혁명이다.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
우리에겐 흔히 자유, 평등, 우애를 상징하는 3가지 색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원래는 파리를 상징하는 파랑과 빨강의 2색기 사이에 왕실의 백색기를 넣어
파리와 왕실의 돈독한 관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 혁명을 보는 체계적인(?) 관점으로 이중혁명이라는 관점과 정치혁명이라는 관점이 있다. 정치혁명은 프랑스의 강화를 위한 정치체제 개혁을 위한 혁명이었다는 관점이고, 이중혁명은 정치와 경제 양면을 중심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는 과정이었다는 관점이다. 어느 쪽이건 계획되고 예정된 혁명이라는 소리다. 그러나! 필자의 관점은 다르다. 필자의 관점은 프랑스인들 아니 유럽인 모두의 수많은 뻘짓들이 점철된 결과 우연히 혁명에 다다른 ‘행운 혁명’이라는 관점을 제시하겠다.
1.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언제나 가난이 문제다. 가난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머 어쨌든 체제도 무너졌다. 프랑스가 가난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어떤 이유들이었을까?
먼저 심각한 부익부 빈익빈이었다. 우리에게도 비교적 잘 알려져 있듯이 인구의 2퍼센트밖에 안 되는 귀족들이 전체 부의 80퍼센트를 가지고 있었다. 귀족들 내에서도 고위 귀족들이 부를 거의 독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고위 귀족들은 오늘날로 치면 소위 고액 체납자들이었다. (귀족들에게 세금을 안 매긴 것은 아니다. 이런저런 형태로 세금이 계산되기는 했다. 집행이 안 돼서 문제였지.) 당시엔 경제적 평등이란 개념도 없었으니 재산 많다고 누진세를 때리는 건 아니었다.
즉 오늘날에 비하면 많은 재산에 비해 세액은 매우 낮았다. 그렇다면 단순 계산으로 과세 대상의 80퍼센트가 조세 회피를 한다는 의미다. 일부는 내겠지만 결국 국가는 기본적으로 20퍼센트의 과세만으로 운영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실제로도 그랬다.
그래도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부유한 나라라서 20퍼센트 플러스 귀족들의 찔끔찔끔 알파만으로 국가재정을 꾸려갔다. 대단하다면 대단한 나라였다. ㅉㅉ
제목: 이 놀이가 곧 끝나리란 희망을 가져야 하겠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나 누구나 예측할 수 있듯 이런 식의 운영은 파탄을 예정하고 있다. 단순한 돈의 문제를 넘어 누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언제까지고 인내하겠는가. 재정이 부족한 국가와 왕실, 세액의 대부분을 부담해야하는 비귀족 납세자들. 귀족 빼고는 모두가 불만스러운 상황이었다.
아니 사실은 귀족도 불만스러워했다. 귀족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고, 현상유지에 급급했던 국가재정이 프랑스에 장기적으로 입힌 가장 치명적 손해는 해군에 투자할 여력을 잃게 만든 것이었다.
영국은 이미 1756년에서 1763년 사이에 벌어진 7년 전쟁에서 강력한 해군력을 보여주었다. 프랑스는 해군력 증강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손을 놓고 있는 실정이었다. 투자할 돈이 없는데 어쩌겠는가. 이때부터 이미 벌어지기 시작한 차이를 프랑스는 따라잡지 못했고 최종적으로 1804년 영국에게 제해권을 완전히 빼앗기게 된다.(트라팔가 해전의 패배)
이러한 현상유지도 1776년부터 발생한 미국의 독립전쟁에 프랑스가 무리하게 참전하면서 무너지게 된다. 7년전쟁 때 당한 거 복수해주겠답시고 끼어들었던 것이다. 그 결과 안 그래도 항상 위기였던 재정이 이젠 아예 끝장이 났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날 무렵 미국 독립군은 프랑스의 ‘풍~성한 지원’ 덕분에 대부분이 개인화기를 가질 수 있을 정도로 잘 무장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프랑스혁명 직전 프랑스군은 4, 5명당 1정의 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스탈린그라드전투에서의 소비에트 러시아군이 생각난다.) 여기까지가 당시 프랑스가 겪던 재정 위기로 톡하고 건드리면 와장창 무너질 상황이었다. 머 이렇게 프랑스의 재정은 거덜났지만 북아메리카식민지의 실지로 인해 영국도 엿 먹은 거 만큼은 확실하다. 쌤쌤인가?
루이 16세의 부왕(父王)인 루이 15세
혁명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며 사치를 줄일 것을 간언하는 신하에게
“내가 죽은 뒤 혁명이 일어난들 나랑 무슨 상관이오?”라는
명대사를 남겼다는 분이시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것은 1781년, 프랑스 혁명의 시작이 되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은 1789년이다. 이상하다. 그러면 그 8년간 텅텅 빈 프랑스의 국고는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조금 전까지 프랑스의 국고가 바닥이 났음을 이야기했다. 답은 세금을 받아서 살았다. 이야기 하지 않았던가 20퍼센트에 대한 과세와 귀족층들이 어쩔 수 없이 내는 일부분의 세금으로 지냈다고.
그런데 그 세금마저 뚝 끊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1787년과 1788년 잇따라 프랑스 전역에 대흉작이 든 것이다. 농업공황으로 국민들은 세금은 고사하고 굶어죽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1770년대 프랑스를 여행했던 한 영국인이 이곳이야 말로 농민들의 낙원과도 같다고 감탄했었다. 그런데 이 때 프랑스를 다시 방문한 그는 지옥을 보았다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상황에서 정치권인 귀족들은 무엇을 했는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띵가띵가 놀고만 있었다. 아니 놀기만 했으면 다행이었다. 상황을 더 개판으로 만들고 있었다.
경기가 나빠지면 대기업을 비롯해서 부자들이 사회적 투자를 늘려야 경기가 다시 좋아진다. 그런데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대기업이나 부자들은 불황일 때를 이용해서 오히려 구조조정과 투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당시의 귀족들도 똑같았다. 농업공황으로 국민들이 굶어 죽어 가는데 그 틈을 타서 더욱 축재를 하였다.(저주 받을 넘들!) 주로 쓴 방법이 고리대금업과 파산한 농민들의 토지를 헐값에 사들이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말만 노블리스 오블리주지 지배층이 개념말아 먹은 건 똑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허구한날 베르사유에선 연회나 열고 앉아서 놀고 있으니... 이 흥겨운 잔치 속에서 딱 한 명 속이 타들어 가는 사람이 있었으니 국왕이었던 루이 16세였다. 어떤 이들은 그를 두고 ‘좀 모자란 사내’라고 혹평을 하기도 하지만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왕국이 개판 오분 전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모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기아상태에 빠진 일반 국민들에 대한 징세를 피하고 귀족들에게 징세를 함으로써 이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하지만... 될 턱이 있나? ‘모자란 사내’란 별명이 붙은 건 귀족 즉, 기득권층에게 세금을 걷어보겠답시고 덤벼든 ‘만용’ 때문이 아닐까?
루이 16세
왕조말기 즉위했더니 뭘 해도 결국 뻘 짓으로 끝나던 인간이다.
결국 국민들한테 ‘빵집주인’이라는 모욕적인 별명을 들으며 죽어야 했다.
화려한 베르사유의 궁정에서 이젠 귀족이 왕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왕이 귀족들을 달래기에 바빴다. 왕의 자존심에 열 받지만 어쩌겠는가. 거기에다 더욱 훼방을 놓는 것은 왕비인 앙트와네트였다. 이 외국인 왕비는 왕실의 편이 아니라 귀족의 편에 서서 사사건건 남편의 발목을 잡았다. 결국 나중엔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베르사유 궁정에서 왕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왕이라고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었다.
2.
한편 베르사유 바깥에서는 기근이 계속된다. 기근에 허덕이던 국민들이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에 분노했다는 말은 잘못된 사실이다. 베르사유는 별천지로 대다수의 국민들이 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요즘으로 치면 보안지역으로 일반인 접근금지구역인 셈이다. 들어와 보지도 못하는데 귀족들의 화려한 생활상을 어떻게 보겠는가? 가끔씩 보는 으리으리한 귀족들이 행차를 보고 ‘귀족 나리들은 잘사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행차 옆에 따라붙어 구걸 좀 해서 돈푼이나 좀 얻는 걸로 끝이었다.
어느 정도로 사치스럽게 사는지 일반인들은 알 길이 없었다. 알았으면 벌써 뒤집어졌다. 다만 막연히 ‘자기들끼리만 잘 먹고 잘산다더라’, ‘임금님은 귀족들만 챙겨준다더라’라는 식의 뜬소문만 퍼졌다. 루이 16세로서는 참 억울한 소리다. 귀족들만 챙겨준다니...
위기가 아슬아슬해져서 왕이 더 이상 인내하기가 어려워지는 때가 되자 귀족들이 협상 테이블에 나온다. “세금을 걷고 싶으시면 국민에게 뜻을 물어 봅시다.” 이른바 삼부회의 소집이었다. 삼부회에서 세금에 대한 안건을 논의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귀족들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안이었다. 그것은 삼부회가 어떤 것인지 살펴보면 금방 이해가 된다. 세 개의 신분으로 이루어진 의원단이 삼부회를 구성하는데 제1 신분은 성직자, 제2 신분은 귀족, 제3 신분은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보통 평민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자유인은 왕이나 귀족은 아니지만 엄연한 자기 자신의 주권자이다. 이 시기에는 인구의 98퍼센트를 대표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나오기는 했지만 자신을 스스로 처분할 수 없는 노예나 농노와는 전혀 다른 인텔리 계급이다.
삼부회의 표결 방식은 우리의 국회 방식과는 다르다. 표는 딱 3표. 각 신분별 의원들이 모여서 하나의 의견을 모아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이다. 즉 삼부회는 3장의 표로 의결을 하게 되는 제도였다. 그런데! 귀족들은 2개의 표를 이미 장악하고 있었다. 당시엔 성직자=귀족이었다.
특히나 고위 성직자로 갈수록 절대적인 공식이었다. 이런 이유로 무슨 안건이 나오든 삼부회 내에선 2:1로 귀족파가 이기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단 삼부회가 열리면 정말 세금 문제만 논의하고 폐회하겠는가?
프랑스에선 왕이라 할지라도 삼부회에 대해선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귀족들의 완벽한 꼼수였다. 루이 16세도 이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쉬운 쪽은 루이 16세였고 결국 귀족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트와네트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그녀는 프랑스왕실의 편이 아니었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 프랑스왕실을 견제하기 위해귀족 측에 서 있곤 했다.
부부간의 금실도 좋은 편도 아니었으며 굉장한 바람둥이었다.
나중에 국민들에겐 ‘포주’라는 경멸적인 별명이 붙기도 했지만 연인을 맺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로맨틱한 취미도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정치적인 의도도 크게 깔려 있었지만 말이다.
덤으로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스파이이기도 했다. 앞으로 자주 나올 분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리하여 1789년 5월 5일 삼부회가 열리게 되었으니 귀족들의 대승리였다. 삼부회라는 것 자체도 1614년 이후 처음 열리는 것이었다. 이른바 귀족혁명이었다. 귀족들은 자축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이라는 단어는 귀족들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어디서 주워들은(?) 인문주의 철학은 있어서 자기들 딴에는 혁명을 했답시고 말이다. 자신들에게 곧 밀어닥칠 재앙은 모르고...
삼부회는 신분마다 정원이 300명씩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제3 신분의 정원은 600명으로 늘어났다. 실제로 뽑힌 건 그보다 조금 더 많은 624명이었다. 그리고 제1, 2 신분은 정원을 다 채우지 못한 숫자인 247명, 188명만이 선출되었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정한건지 인구 비례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되는 숫자지만 어차피 의원 개개인이 아니라 신분별로 한 표만 행사하는 거니 그 숫자는 별로 의미가 없기도 하다.
삼부회가 개원하자 귀족들은 즉, 제1, 2 신분들은 개원 전 한껏 부풀었던 기대와는 달리 심상치 못한 분위기를 느꼈다. 제3 신분 의원들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분위기가 심히 흉흉한게 뭔 일을 벌일 태세다. 불안불안해 하면서 안건을 논의하기 위해 의원단이 각자의 회의실로 들어가려 할 때 제3 신분 의원단이 태클을 걸고 나섰다. “우리 같은 회의실 씁시다.” 잉? 먼솔? 저것들이 정신이 나갔나?
같은 회의실을 쓰자는 건 무슨 소리냐? 간단히 말해 1인 1표제를 하자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2대1이 아니라 435대 624의 대결이다. 절대로 해선 안 된다. 게다가 내부에선 반란까지 일어났다. 하급 성직자 및 하급 귀족 출신 의원들이 제3 신분에 동조하고 나선 것이다. 중소 하청업체들이 대기업에게 반기를 들었다고나 할까? 고위 귀족들은 괘씸했다. 그래도 귀족이라고 이 자리에 끼워 줬는데 감히 배은망덕(?)하게도 우리를 배신하다니! 평소엔 같은 귀족 취급도 안해주다가 이럴 때만 신의를 찾는다.
삼부회의 개회식 모습. 화려한 옷을 입은 제1, 2 신분과는 달리
제3 신분은 모두 검은색 옷만을 입고 있다.
제3 신분 즉, 자유인들은 1인 1표제를, 귀족들은 신분별 1표제를 주장하느라 삼부회는 시작도 못하고 한 달을 끌었다. 처음에는 온 국민의 관심을 받으며 시작한 삼부회였건만 시작도 못한 채 정치 불신만을 안겨주고 있었다. 귀족들은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왕에게 달려간다.
“폐하 원하시는건 모두 드릴테니 제발 저넘들 좀 쫓아내주세요.”
삼부회를 강제로 폐회시켜 달라는 소리다. 언제는 자기들이 졸라서 삼부회를 열어 놓고는 이제는 폐회시켜 달란다. 그래도 루이 16세로서는 나쁠 거 없었다. 지금껏 귀족들이 개기는 탓에 얼마나 돈 걱정하며 살아왔는데 무지렁이 몇 놈(?) 쫓아버리는 일로 그것이 해결된다니 얼마나 간단한 일인가.
여기서 루이 16세의 한계가 드러난다. 그 역시 전근대의 전제 군주였던 것이다. 제3 신분 의원들은 결코 무지렁이가 아니며 각자가 상당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이들이었지만 그의 눈에는 그저 수많은 신민들 중 하나로만 비쳤던 것이다. 그에게 신민이란 그저 돌보고 때로는 얼러야 할 어린아이 같은 존재에 불과했기에 그들의 의사는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강제로 회의장을 폐쇄함으로써 귀족들의 요구를 수용하였으나 제3 신분 의원들은 해산하지 않았고 버텼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야외농성을 할 수도 없는 일,(사실은 딱 사흘했다. 6월 17일에 쫓겨나서 20일에 경기장에 들어갔다.) 근처의 ‘므늬 플레지드 궁’의 ‘죄드폼’(테니스랑 비슷한 경기라는데 필자는 해본 적도 구경한 적도 없어 그 이상은 모른다. 아시는 분은 댓글 좀...) 경기장으로 가서는 자기들끼리 새로운 의회를 꾸릴 것을 결의 했다. 유명한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테니스 코트의 서약은 테니스 코트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비드의 그림을 보면 정말 감명적이다. 어쩜 저렇게 멋있을수가!
하지만 현실에선 어땠을까? 유럽인들은 한국인들과는 달라서 털이 많다. 며칠만 면도를 안해도 산적이 따로 없다. 사흘간 야외농성하다가 들어왔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씻지도 않고 당연히 면도도 안했다. 후즐근한 옷에 땀냄새를 풀풀 풍기며 산적들 700명이 경기장에 모여 있는 느낌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결코 멋진 모습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테니스 코트의 선서
엄청나게 멋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사흘만에 노숙을 끝낸 사람들이었다. ㅜㅠ
어쨌든 이렇게 자기들끼리 의회를 차린 것이 국민의회다. 회의장에서 쫓겨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죄드폼 경기장에 가서도 혹시나 다시 불러줄까 싶은 미련에 나흘간 더 죽치고 앉아있었던 것이다.) 결국 루이 16세가 반응을 보였다. 귀족파 의원들에게도 국민의회에 참석할 것을 명령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귀족파랑 비귀족파랑 싸움붙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젠 비귀족파의 승리였다. ‘국왕폐하 만세’ 어쨌든 국왕이 입장을 바꾼 덕에 이겼으니까...
3.
베르사유에서 정치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프랑스의 전국농촌지역에선 괴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귀족들이 농민들을 마구 학살하고 다닌다는 소문이었다. 이른바 ‘대공포’라는 소문으로 프랑스 혁명이 성공한 것은 바로 이 헛소문 때문이었다. 전국의 농촌지역을 휩쓴 이 헛소문 때문에 농민들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누가 믿냐 싶지만 당시 사람들은 진지했다. 전근대시대 기사들이 보급을 위해 마을을 약탈하고 파괴하는 일은 비일비재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다. 당시에는 귀족이 마을을 몰살시킨다는 말이 평민들에겐 농담이 아니었던 시대였다. (충격과 공포를 아느냐 그지 깽깽이들아)
진압되는 중세의 농민반란
“어차피 죽을건데...”라는 생각에 우후죽순으로 반란이 일어났고, 프랑스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다시피 했다.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약 2500~27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중에서 80퍼센트 정도가 농촌 인구였다.
이 엄청난 숫자를 누가 감히 막아서겠는가? 이 엄청난 농촌 봉기를 맞아 루이 16세는 대책을 강구한다. 외국 용병을 고용해서 베르사유로 불러들인 것이다.(응, 이게 먼 소리?) 국왕으로서의 사태 수습은 포기하고 반란이 저절로(?) 잦아들 때까지 베르사유만을 방어하겠다는 것이다.(ㅡㅡ;;;)
결국 국왕이란 작자도 최후의 순간에 자기 자신의 보신만을 도모했던 것이다. 세상은 이런 곳이다. 그러니까 자칭 대한민국의 국부께서도 위급 상황이 되자 한강철교를 끊고 자신 혼자 도망가셨지 않았는가?
외국인 군대가 파리를 지나간다는 소식에 파리시민들도 공황에 빠졌다. 당시 파리 또한 치안상태가 불안했다. 앞서 말했듯 ‘대공포’로 인해 농촌 지역이 엉망이었으므로 도시인 파리에 식량이 제대로 공급될 수 없었고 파리는 오랫동안 식량 부족 상태에 빠져있었다.
파리에서는 연일 식량 폭동이 일어났으며 민심은 흉흉했는데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식량 폭동은 ‘폭동’을 일으킨 군중이 강도짓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식량을 많이 가지고 있는 상인이나 부자들이 주로 대상이 되는데 그들의 집에 쳐들어가서는 흠씬 두들겨 패주고는 자기들이 생각하는 ‘정당한 가격’에 멋대로 식량을 사간다.
‘반(半)강도짓’이긴 하지만 아주 ‘강도짓’은 아니다. 사실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물건들을 사재기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고 있던 이들인 경우가 많았으니 ‘강도’가 ‘반강도’ 짓을 당했다고 보는 게 맞다.
어쨌건 상황이 안 좋은데 군대가 파리근처에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니 “5.18 진압하듯 파리로 쳐들어 오는 거 아닌가?” 시민들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분개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못 먹었던거 하며 이래저래 쌓였던 것들도 한꺼번에 같이 폭발했을 것이다.
결국 시민들은 파리의 병기창을 습격하여 무장한 뒤 대포까지 끌고(그런데 대포알은 안 가져간다 ㅡㅡ;;) 7월 14일 그 유명한 바스티유 감옥을 함락시키기 위해 행진했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둘러싸고 공격을 하려는데 대포가 안 쏴진다. 쏘는 방법도 모르거니와 대포알을 안 가져왔으니 당연하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총이나 대포가 총알 또는 대포알을 발사하여 적을 살상하는 것임을 몰랐다. 바스티유를 향해 쳐들어온 거의 모든 사람들은 창으로 무장했다. 그래서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무기는 총도 대포도 아닌 창이다.(필자도 수업 듣다가 처음 알았다.) 바스티유 감옥은 매우 견고하고 높은 요새였다.
원래는 중세의 정치범 수용소였지만 그땐 감옥으로써의 기능은 거의 없어져 수용하고 있던 범죄자라곤 3명밖에 없었다. 절도범 2명이랑 사기꾼 1명이 갇혀있었다. 그냥 파리내에서 왕의 위엄을 과시하는 그런 장소로써 요새의 기능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외국의 군대가 파리까지 쳐들어올 일도 없는 이상 그 역시 무용지물이었다.
하지만 그 무용지물인 기능도 이 때는 쓰일 때가 왔다. 당시 약 60만 명에 이르던 파리 시민들이 모두 몰려갔어도 수비대가 성벽 위에서 위협 사격 한두 번이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뻘짓으로 인해 뒤바뀐다.
바스티유의 수비대 사령관 드 로네는 군인이라기보단 이상을 추구하는 인문주의자였다. 이성철학을 신봉하는 사람으로 모든 인간은 이성적 존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노로 흥분해서 무장까지 한 채 바스티유로 몰려온 군중들도 말이다.
그는 이성적으로 분노에 차있던 군중들을 설득한답시고 문 열고 나갔다가 혁명의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열린 문으로 몰려든 군중들에 의해 그의 부하들이 그의 뒤를 이었다.(이래서 상관은 잘 만나야 된다.) 그리고 바스티유에 갇혀있던 절도범 둘과 사기꾼은 혁명의 영웅으로 기록되게 된다. 쩝;;;;
바스티유 감옥으로 향하는 시민들
그들은 대포를 끌고 가긴 했지만 포탄은 가져가지 않았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바스티유가 무너진 것은 변함없는 사실. 이 일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프로이센 북부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 살고 계셨던 철학자 칸트 선생께서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2주 후에 이 소식을 전해 듣고는 너무 놀라서 평생 딱 두 번 빼먹었다는 오후 3시 공원 산책을 빼먹었다고 한다. 참고로 나머지 한 번은 죽었을 때라고 한다. 여담이지만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바스티유 함락보다 칸트 선생이 공원 산책을 빼먹었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바스티유 감옥의 함락이 앙시앙레짐, 즉 전제군주의 통치를 이제 끝내려는 신호탄이 될 것인가? 전 유럽의 정치권과 지성들이 주목하였다. 정작 본인들은 홧김에 벌였을 뿐 별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어떤 이들은 개혁주의적인 재무총감이었던 네케르의 파면이 시민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귀족들이 전혀 양보할 생각이 없음을 그의 파면으로 드러내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이것이 바스티유의 함락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높으신 분들의 정치싸움과 이유도 알 수 없이 눈앞에 다가온 외국인 군대 둘 중 어느 쪽이 시민들의 감정을 자극했겠는가? 오늘날과는 달리 국민들의 절대다수가 문맹인 시대, 그리고 아직 자기가 정치의 주인이라는 의식이 없던 당시 파리 시민들에게 재무총감이 뭐 하는 자린지 네케르라는 사람이 뭔지 알 이유가 없었다.
어머나, 내가 그렇게 인기가 많았어? 프랑스왕실의 재무총감 네케르.
삼부회에서 귀족파와 비귀족파 간의 조율을 잘못한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지만
바스티유 습격이 그의 파면 때문이라고 여긴 루이16세 덕에 10일 만에 복직됐다.
홧김에 일을 저질러 모두의 관심을 받긴 했지만 그 이후에 파리시민들에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나마 그들의 브레인(?)들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삼부회에 참여한다고 베르사유에 간 뒤로 함흥차사였다.
하지만 브레인이 없어도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스티유 감옥을 부수고 수비대를 죽였으니 파리는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래서 사람들은 일을 저지르기 전에 감정을 자제하고 이성적으로 판단을 해본 뒤 행동할 필요가 있다.) 살기 위해선 곧 쳐들어올 왕의 진압군부터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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