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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南明)정권 - (8)
게시물ID : history_210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유없음
추천 : 7
조회수 : 175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7/16 09:12:08
본래 양주성에서 승부를 보려했던 남명정권이었다. 그랬기에 주력병력을 모두 거기에 투입했던 것인데 이제 그 양주성이 깨져버렸으니 사실 끝장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남경성 내의 병력은 수백내지 1천이었으며 반면 청군은 그 숫자가 수만에 이르렀다. 제 아무리 남경성이 명대 초기의 수도답게 웅장하고 견고한 성이라고는 했지만 모든 면에서 패배가 자명했다. 이 남명-청과의 전투에서 사가법이 양주성에서 항전한 것을 제외하고는 남명은 이렇다할 저항을 하지 못했다고 봐도 좋다. 남경성은 삽시간에 함락되었고 홍광제 주유숭은 마사영과 무호(蕪湖) 총병 황득공의 진채로 도망쳤다. 이때 황득공은 남경에서의 변고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황제가 갑자기 찾아와 살려달라고 비니 꽤나 놀랐을 것이다. 주유숭은 황득공에게 눈물을 보이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것을 빌었다. 그러자 황득공도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다해 싸울 것을 맹세한다. 이윽고, 청군이 황제 주유숭을 목표로 마무리 짓고자 무호(蕪湖)로 쳐들어오자 황득공은 수하장수들을 불러모아 마지막 결전을 다짐했다. 하지만 명조의 충장으로 죽기를 결심했던 이는 황득공 한 사람 뿐이었나보다. 황득공의 부장들은 그 본심이 달랐다. 당시 청에서는 주유숭에게 현상금을 걸었었다고 한다. 이 황득공의 부장들은 그 돈에 눈이 멀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황득공은 수적열세를 못이기고 난전 중에 전사하고 주유숭은 다시 도망을 치는데 이때 그 부장들이 행동을 개시한다. 주유숭을 붙잡아 청군진채로 가는데 주유숭이 제 죽을 곳으로 간다는 것을 알았는지 그 장수들에게 울며 사정했지만 먹혀들지 않자 나중에는 그들을 물어뜯고 발버둥 쳤다고 한다. 주유숭은 청군에 넘겨졌고 바로 북경으로 압송되어 얼마 후 반역죄로 처형당하니, 그때 그의 나이 39세라 했다. 주유숭이 우두머리답게 끝까지 맞서 싸웠거나 명예를 위해 숭정제 주유검처럼 자결했더라면 훗날 추존되었까. 하지만 주유숭은 그렇지 못했다. 반면 절개를 지켜 죽은 사가법이나 황득공 등 끝까지 자신들에게 항전하다 죽은 이들이라도 청조에서는 그 충성을 갸륵히 여겨 모두 장사를 후히 지내주고 각자 작위를 하사했다. 청에서는 이 주유숭을 나라를 망친 혼군이라 여겨 묘호를 올려주지도, 추존도 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한 나라의 황제로서 저지른 일들을 감안한다면 마땅한 처사라 해도 괜찮을런지. 어쨌든, 이 홍광제 주유숭이 죽었다해서 명나라처럼 바로 남명이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또 그 명맥을 잇고자 발버둥쳤다. 당시 황족들은 꽤 많았다. 다만 황제로서의 자질이 적합했냐는 것이 문제지. 당시 남명의 세력권은 꽤 넓었다. 강소, 안휘, 장시, 저장, 복건성 등으로 항전할 본거지로 삼을 곳은 많았다. (정성공의 세력권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남명의 세력권으로 봐도 무방하다) 주유숭이 청군에 붙잡히자마자 총병 정홍규란이의 주도하에 당왕(唐王) 주율건(朱聿鍵)을 그 후계자로 세워 옹립하니 그가 곧 남명의 제 2대 황제, 융무제(隆武帝)다. 융무제 주율건 이 주율건은 명나라 황실과는 먼 친척이었다. 앞서 죽은 숭정제 주유검이나 홍광제 주유숭과는 꽤나먼 일족이랄까. 아무튼, 이제 이 융무제 주율건이 반청복명 저항의 지도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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