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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형도와 대학 시절과 나
게시물ID : readers_2111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께소
추천 : 6
조회수 : 579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5/08/09 15:5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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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힘들었을 때가 언제였냐고 묻는다면 스무 살 때라고 해야겠다. 누군가 꽃다운 스물이라 했지만, 그 나이는 내게 낙엽과 같았다.

 

그때 나는 경영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수업을 듣는 게 고문이었다. 교수가 이라는 말을 뱉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곤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던 나는 대학교에 들어와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등학생 때 마지막으로 쓰고 만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교에 들어오기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검은 노트를 사용했다. 첫 장은 찢어버렸다. 거기엔 그래도 열심히 해보자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언제부턴가 밤 열 시 즈음이 되면 기숙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트랙에 가 달리기를 했다. 처음에는 한 두 바퀴를 뛰는 것도 숨이 찼는데 차츰차츰 익숙해져 갔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다. 수업을 들으러, 시험을 보러, 밥을 먹으러 방을 나서진 않아도 해가 지면 하얀 운동화를 신고 달리기를 하러 나갔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트랙에는 그 시간에도 사람이 꽤 있었지만 내가 아는 얼굴은 없었다. 나는 그래도 혹시 몰라 하늘을 쳐다보며 뛰었다.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컴컴했다. 길에 놓인 가로수 덕에 주홍 불빛이 여기저기 보였다. 트랙에서는 늘 위를 향하던 고개를 돌아가는 길에는 푹 숙였다. 건물 창으로 보이는 어떤 학생의 방, 교수의 사무실,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불빛을 확인하는 게 무서웠다.

 

그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위에는 마른 나뭇잎이 잔뜩 쌓여있었다. 그리고 기숙사에 거의 다다르던 때에 어떤 남자가 내 옆을 지나쳤다.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날 재치고는 내게 등을 보이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그 순간, 그 검은 등을 내 발밑의 말라 비틀어진 나뭇잎으로 찔러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남자의 뒤에서 그의 등을 노려보며 계속 걸었다. 남자는 한 번도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형도 시인을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읽은 그의 시는 <대학 시절>이었다. ‘버려진 책들’, ‘나뭇잎조차 무기로’, ‘눈을 감고’, ‘외톨이’, ‘졸업’, ‘대학’. 나는 분명 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잘못 이해한 시에 왜 그렇게 눈물이 났을까.

 

어쩌면 나는 평생 내 옆의 살아있는 사람이 아닌 이미 죽은 작가에게서만 위로를 받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다. 어쨌건 위로이긴 위로이지 않은가.

출처 <대학 시절>

기형도

나무의자 밑에는 버려진 책들이 가득하였다.
은백양의 숲은 깊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는 나뭇잎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숲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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