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주는 저녁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붉은방에서 나온 이후로는 이런 식의 여유로운 생활이 당분간 보장되었기 때문이었다.
총리와의 점심 식사에서는 많은 이야기들이 오갔다. 우선 혜주는 자신의 제안대로 과장의 위치를 그대로 물려받게 되었다. 총리는 혜주가 여자라는 이유로 과장과 동일한 계급으로 임무를 맡게 되는데 약간 주저하는 듯 했으나, 그 역시 혜주가 과장에 버금갈 정도로 모든 일을 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것보다 우스꽝스러웠던 것은 대대장의 표정이었다. 과장의 정체를 뒤늦게 알아챈 그는 놀라움에 입을 다물 줄 몰랐다. 혜주는 과장과 자신이 몰래 폐조직의 일부를 빼돌려 밤늦게까지 연구를 했다는 사실까지 말해버려 대대장을 더욱 놀래켜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규. 진규의 이야기도 총리에게 꺼냈었다. 진규의 연구가 이번 사태 때문에 상업성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었다는 사실과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필요하다는 이야기. 총리는 진규가 원한다면 상당액의 금전적 보상과 농림부 산하의 연구기관에서 편안히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 외에도 혜주는 언제든지 도움이 필요할 때는 연락을 하라는 총리의 당부를 들었다. 물론 앞으로 혜주 쪽에서 도움이 필요할 일은 없을 테지만.
모든 것이 잘 마무리 되어간다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진규를 만나서 진짜 옛친구로서의 회포를 풀고, 지난 이야기를 나누는 일만이 남았다. 혜주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딩동.
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한 양복을 입은 중년 신사가 서 있었다.
'또 정부에서 나온 사람일까?'
혜주는 궁금해졌다. 설마 또다시 제2의 붉은방이 생긴 것은 아니겠지? 혜주는 농담처럼 혼자서 되뇌이며 문 밖에 선 사람에서 물었다.
"누구시죠?"
"김혜주씨 댁인가요?"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저는 석진규씨 변호사 되는 사람입니다."
진규의 변호사? 혜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규가 보상을 타내기 위해 변호사라도 선임했단 말인가?
아니, 결코 그럴 리는 없었다. 혜주는 다시 한번 변호사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석진규씨의 유언장을 집행하러 왔습니다."
혜주는 다시 한번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리고는 급한 마음에 문을 열어젖혔다.
"유언장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죠? 진규가 죽기라고 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변호사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안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봉투를 꺼냈다.
"석진규씨가 죽기 전 김혜주씨 앞으로 맡긴 편지입니다. 저는 이것을 전하러 왔습니다."
혜주는 변호사로부터 봉투를 받아들면서도 아직까지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 진규가 죽었다구요?"
"네. 어제 연구실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습니다."
혜주의 눈에서는 그제서야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혜주는 소매로 눈물을 닦으며 물었다.
"사인은 뭐죠?"
"폐경색입니다. 아무래도 과로가 원인인 것 같다고 그러더군요."
혜주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폐경색이라는 말에 일말의 의심이 들기는 하였다. 혹시 또 다른 변종이 나타나 진규의 목숨을 앗아가버린 것은 아닐까?
"김혜주씨게게 남긴 것은 그 봉투가 전부입니다. 개봉은 직접하시도록 되어있습니다. 전 그만 가보겠습니다."
"네."
혜주는 돌아서서 가는 변호사의 뒤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의 윗부분을 찢었다. 안에는 얇은 편지 한 장이 들어있었다.
혜주는 편지를 꺼내어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혜주야 네가 이 편지를 읽을 쯤에는 내가 이미 이 세상에 없겠구나. 혹여 누군가 이 편지를 보게 될까 두려워 자세한 말을 여기에 적을 수는 없구나. 다만 너를 위해 마련한 선물이 있어. 내 연구실에 가서 문에서 세 번째 줄에 있는 마룻바닥을 열어봐. 그 속에 네게 줄 선물이 있어. 꼭 혼자만 열어봐.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석진규.
혜주는 편지를 다 읽고는 달려가서 밀양대학교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그리고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밀양대학교죠?"
"네 그런데요?"
"석진규 교수님 연구실을 혹시 지금 누가 쓰고 있나요?"
"아뇨. 지금은 비어있습니다."
"전 석진규 교수님 친한 친구인데요. 그 연구실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아뇨.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혜주는 그대로 전화를 끊고는 총리실로 통하는 핫라인으로 다시 전화를 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셨죠? 지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어요."
혜주가 경찰과 함께 진규의 연구실을 찾은 것은 바로 다음날 새벽이었다. 놀랍게도 전화 한 통에 경찰의 동행에 법원에서 발부한 수색 영장까지 혜주에게 지원되었다. 혜주는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꼈다.
"엊그제 돌아가신 양반 수사할 것이 뭐가 있다고."
연구실의 문을 따는 수위아저씨의 표정에는 평소에 진규에게 가지고 있던 친근함이 그대로 우러나왔다. 동행 경찰과 혜주는 수위아저씨가 문을 열 때까지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셋은 안으로 들어갔다.
"죄송하지만 수위아저씨와 밖에서 좀 기다려 주시겠어요?"
혜주는 경찰에게 그렇게 부탁을 했다. 경찰은 말없이 수위아저씨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혜주는 연구실의 문을 닫았다.
혜주는 조심스럽게 마룻바닥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과연 문에서 세 번째 줄의 마룻바닥이 헐겁게 흔들렸다. 혜주가 나무의 한쪽 끝을 누르자 다른 한쪽 끝이 들려 올라왔다. 혜주는 그대로 나무토막을 들어내었다.
그 안에는 두 개의 칸으로 나뉘어져 수십 개의 파일과 여러 샘플병들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두 개의 칸 가운데에 하얀 봉투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봉투 위에는 '혜주에게'라고 쓰여있었다.
혜주는 봉투를 집어들고 안에 있는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천천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혜주에게.
드디어 이 곳을 열었구나.
혜주야 기억나니? 지난 날 우리가 약속했던 것. 암을 고치는 의사가 되자고.
물론 넌 의사의 길을 걸었지만 난 그렇지가 못했지. 하지만 난 결코 포기한 것이 아니었어.
난 내가 연구하는 동충하초를 통해 암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어. 암세포만를 파괴하면서 성장하는 버섯 포자를 개발하려고 생각했지. 그리고 오랜 연구는 분명 결실을 맺었단다.
물론 그 와중에 많은 어려움도 있었고 예기치 못한 희생자들도 있었어. 난 죽어가는 말기 암환자들을 수소문해서 그들에게 몰래 실험을 했어. 그리고 그 테이타를 통해 다시 약품을 개량하는 작업을 반복했지. 그리고 연구는 거의 성공단계에 접어들었어.
난 그러한 실험에서 한 번도 죄책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어. 그들은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었고, 그들의 죽음으로 인해서 영원히 암을 퇴치하는 신약을 개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그들을 위해서라도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예기치 않게 너에게 붉은방의 소식을 듣게 되었어. 그리고 난 내가 의도하지 않은 엄청난 결과에 놀라고 말았지. 난 내가 개발한 그 세포가 그토록 무서운 전염병이 되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 난 내가 행한 그 무서운 짓에 뼈저리게 반성했어.
그리고 나는 결심했어. 그 모든 책임을 지기로. 내가 억울하게 죽어간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난 마지막 실험을 나에게 했어. 그리고 난 분명히 지금 죽어있겠지.
혜주야. 지금 여기에는 정확히 두 개의 샘플과 연구자료가 있어. 만일 내가 죽은 원인이 폐출혈이라면 A연구 결과가 암을 퇴치하는 새로운 신약이야. 그것이 아니라 내가 폐경색으로 죽었다면 B연구 결과가 그것이겠지.
어찌되었든 네가 이 편지를 읽는 순간이 인류가 암을 정복한 첫 순간이 되겠구나. 축하한다. 난 이 모든 연구의 업적을 너에게 선물로 주고 싶어. 이건 우리가 어린 시절 함께 꿈꾸어 온 것이니까 우리 둘의 것이야.
그럼 혜주야 안녕.
석진규.
편지를 끝까지 읽은 혜주는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버렸다. 혜주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눈에는 눈물만이 흐를 뿐.